본지는 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제공으로 매주 한 차례, [그 때 그 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한경직
▲故 한경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마태복음 18:21~35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마태복음 18장 21절과 22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형제가 내게 범한 죄를 몇 번까지나 용서하여야 되는가? 이 문제는 양심적으로 옳은 신앙생활을 하려는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당시에 유대교 랍비들은, 선생들은 흔히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물어보니 이미 주님께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감화가 있은 듯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우리 주님은 이 말씀을 듣자마자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여러분 이미 읽은 말씀과 같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 이유도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엄청난 거액의 돈입니다. 그런데 이 빚진 종이 이렇게 많은 빚을 갚을 길이 도무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주인에게 나가 엎드려 불쌍히 여겨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렇게 많은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탕감을 받은 빚진 종이 그 주인집에서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관 하나를 만났습니다. 100데나리온은 매우 적은 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은 자기에게 빚진 동관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동관이 갚을 것이 지금 없는데 좀 참아 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듣지 아니하고 옥에 넘겨서 그 빚을 다 받고야 말았습니다.

동관들이 이 얘기를 듣고 너무 민망해서 그 가운데 하나가 그 주인에게 돌아가서 이 사실을 일러 바쳤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그 주인은 참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크게 노해서 빚진 종을 다시 불러다가 하는 말이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는데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책망하면서 주인이 그때에는 그 빚진 종을 옥에 가두면서 빚을 다 갚아야 나올 것이라며 옥졸에게 넘겼습니다.

이 얘기를 하면서 주님의 결론의 말씀을 성경대로 들어 보세요.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왜 형제의 죄를 우리가 용서하여야 하는가?

첫째,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함을 받고 사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하루에도 죽을 죄를 세 번이나 짓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에 사실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우리의 죄는 일만 달란트처럼 큰 죄입니다. 다른 형제가 내게 짓는 죄는 100데나리온에 불과한 작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은 마땅히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할 도덕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용서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둘째로, 그뿐만 아닙니다. 형제의 죄를 내가 용서하는 것은 앞으로도 내 죄의 용서를 받는 데 필수 조건입니다.

우리는 아무래도 늘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산상보훈에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렇게 잘라 말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늘 외는 주기도문을 주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그 내용을 우리가 항상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내 죄를 용서받는 데 있어서 필수 조건입니다.

셋째,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고 증오심이나 원한을 그냥 품고 있으면 내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또는 육체적으로까지 악한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젊은 여자가 갑자기 오른팔이 마비되어 도무지 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의사에게 가서 아무리 진찰해 보아도 의사가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미국인가 봅니다. 그래서 정신병 의사에게 가서 심리적으로 진찰을 해보니 불행하게도 이 여자는 자기 어머니와 불화하는 끝에 그 마음 속에 증오심을 품었더라고 합니다. 그 마음 속 깊이 자기 오른팔을 들어서 꼭 어머니를 때리고 싶은 독한 마음을 품었더라고 합니다. 정신과 의사의 지도를 받아서 어머니와 화해가 이루어진 다음에 그 오른팔은 자연히 다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노한 소의 우유는 사람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내 오래 전에 어떤 미국의 큰 농장에 가보니까 우유를 짜는 큰 방 안에 좋은 음악을 해 놓았어요. 그래서 "이거 음악은 뭐 하려고 해 놨는가?" 물으니까 소들이 음악을 듣고 마음이 기뻐야 우유가 잘 나온다고 합니다. 노한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는 불행합니다. 그 아기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겁니다. 성나고 독한 마음을 품으면 위액의 분비가 잘 안 되어 소화도 잘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체도 선의를 품고 살게 지으셨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물론 우리의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집니다. 제가 일찍이 신의주에서 젊은 교역자로 일할 때에 그때에 지금 물론 고인이 되셨지만, 곽산읍 교회에서 오래 교역하시다가 은퇴하신 김진근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는데, 그 목사님께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한두 가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잊히지 아니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그것은 자기가 젊었을 때에 신학을 마치고 목사 시취를 받던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초창기라 지금처럼 고시부는 없고, 그저 목사 후보자는 노회석상에 나와 서고, 모든 노회원들이 앉아서 그저 묻고 싶은 이야기, 무슨 문제를 물어보는데, 그 문제를 다 대답해야 마지막에는 노회에서 가결하고 장립시키던 때입니다. 그렇게 시험을 봤는데, 자기 친구와 둘이 같이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이런 질문 저런 질문 하는데, 자기네 딴엔 무던히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으로 '아마 잘 되려는가 보다.' 이렇게 기대를 하고 있는데 맨 마지막 판에 가서 어떤 선교사가 하나 일어나서 무슨 말을 하는가 하니, "여러 노회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저분들이 대답은 그저 무던히 하지만, 하여간 어딘가 아직도 목사가 될 준비는 채 못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때만 해도 선교사 발언권이 아주 강한 때인데 그 말 한 마디 하니까 노회 공기가 싹 변하더랍니다.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한 노회 기간 보류하기로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가하면 '예' 하시오." 그렇게 되어 그만 낙방되었단 말이오.

그리고 자기 집에 돌아와서 그날 저녁에 자려니까 잠이 잘 안 오더라고 합디다. '그 선교사가 왜 그런 얘기를 했겠나?' 그 선교사가 미운 마음도 생기고, 고민을 퍽 하다가 마지막에 드는 생각이 '그 선교사가 나와 무슨 사혐(私嫌)은 없는데, 그 선교사가 그런 말을 했은즉 이건 필연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기 반성을 해 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반성을 해 보니 사실 준비 못된 점이 많더랍니다. 그걸 깨닫고는 그저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선천 거리에 나갔다가 같이 시험을 하다가 낙방된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저 그 친구를 만나니까 이 친구는 만나자마자 그 선교사에 대해서 욕설을 하면서 그놈 때문에 우리가 낙방이 되었다고, 그런 못된 놈이 어디 있느냐고, 노발대발 하더랍니다. 그래서 김 목사님이 아, 그러지 말라고, 우리가 그분과 무슨 사혐이 있느냐고, 우리가 이거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이럴 때에는 자아반성을 해야 된다고 해도 그러나 듣지 않더라고 합니다.

그후 여섯 달 더 지나서 다시 그런 방법으로 시험을 받은 다음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두 분 다 같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친구는 그저 목사가 된 다음에도 언제든지 그 선교사님 얘기가 나오면 "에이, 그놈!" 그저 성이 나서 늘 욕을 하더랍니다. 그러더니 그 친구는 몇 해 안 가서 목회생활에서 아주 떠나게 되더라고 해요.

저는 그때 젊은 교역자로서 그 말을 깊이 들었습니다. 교역자나 평신도나 물론하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나 원한을 오래 품게 되면 그 자신이 손해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 속을 떠납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인데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속에 항상 임재해 계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든지 죄는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넷째,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최고 표준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삶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늘 언제나 잊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도, 여러분이 그 얘기 다 아니까 다시 할 필요 없어요. 용서하여 주었어요. 다른 사람은 돌로 치자고 했어요. 주님의 생활의 최고봉은 물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최고봉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다시 말하면 원수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야말로 최고봉이 아니겠습니까?

고상한 인격의 요소는 물론 성결, 진실, 사랑, 충성, 온유, 겸손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아마 그 가운데도 최고의 요소는 용서할 줄 아는 용서의 정신일 것입니다.

옛날 요셉은 그의 성결한 생활, 충성된 성품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 가운데도 최고의 장면은 아마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있을 때에, 오래 전에 자기를 애굽에 팔아먹은 형들이 쌀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앞에 와서 엎드렸습니다. 원수를 갚으려면 형들을 모른 체하고 얼마든지 원수를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요셉의 인격의 최고봉을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의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불가결한 인격의 요소입니다. 얼마나 이 정신에 미치는가 하는 것은, 그 인격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인격에 가까우냐 하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산상보훈에서 우리 주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용히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장 31절로 3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장 8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시여, 저희들이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원수의 죄까지 용서하여 주시는 그 얼굴을 신령한 눈으로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오 아버지시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 모든 동포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어서 피차에 불쌍히 여기고 피차에 불쌍히 여겨서 협동하고 단결하여 이 난국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먼저 내 자신을 살피며 내가 혹 어떤 분에게 대해서 무슨 혐의를 품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살펴서 이 시간 온전히 고치고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해 주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