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우리 친척들 중, 장애인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영적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올해 초 필자의 처가 식구들인, 동서들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지혜와 명철이 이룬 복음의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어 전하고자 합니다.

필자가 예전 항공회사에 취업하여 부산에서 근무를 할 때입니다. 저는 4대 독자이며 식구라고는 고향에 계신 어머님밖에 없었습니다. 무척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필자를 위해 고단한 삶을 사시면서 남들 못지않게 바르게 길러주셨던 아름다운 믿음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다 결혼 적령기가 되어 선을 한창 보던 시절, 지금의 아내와 선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진주에 사시던 어머니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병원에 모셔야 했습니다. 식구라고는 저 혼자 밖에 없어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병원에서 간호를 하며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고, 근무를 마치는 저녁 무렵 시외버스를 타고 어머님이 계시는 진주 병원으로 돌아가 밤새 간호를 해야 했습니다. 고단한 만큼 바쁜 하루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필자의 딱한 사정을 알고 다니던 교회 성도님의 중매에 의해 선을 봤습니다. 그 날 마침 두 명의 아가씨와 연달아 선을 보기로 했지만, 한 아가씨의 갑작스런 출장으로 인해 지금의 제 아내와만 만났습니다. 마침 전에 선을 한 번 봤던 인연이 있었습니다.

처음 선을 봤을 때는 그녀의 회사 근처에서 만났다가 다음 주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지만, 갑작스런 예비군 훈련으로 연락을 미처 하지 못하여 끝나고 말았는데, 오늘 그 아가씨가 병원에 꽃을 한 아름 들고 찾아왔습니다.

필자는 교회에서 문병을 온 학생들에게 잠시 간호를 맡기고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면서, 결혼을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아가씨 집으로 가서, 부모님을 만나뵙겠다는 약속을 한 뒤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졌습니다,

아침이 되어, 아가씨 집을 찾아갔습니다. 장인 되실 어르신에게 큰 절을 올리며, “장로님! 이번 달 24일에 아가씨와 ‘결혼’하겠습니다”라고 담대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르신께서는 “결혼하게” 하시며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필자는 그 때 너무 놀란 나머지, ‘건너 마을에 최진사 댁에 딸이 셋 있는데~’ 하는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장인께서는 재산이나 직업이나 능력 따위는 보시지 않고, 오로지 교회에 다닌다는 한 가지 조건만으로 승낙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믿음에 필자는 감동했습니다. 어느 누가 감히 현재 시어머니가 중풍에 쓰러졌음에도, 차후 고단한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 딸을 시집보낼 수 있겠습니까?

장인 어르신의 승낙으로 필자는 무사히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는 위로 언니 세 분 있고, 아래로 처남이 있었습니다. 1남 4녀 중 딸로는 막내였던 것입니다. 장인께서는 교회 장로, 장모님은 권사이시며, 제일 큰 형님도 장로이십니다. 셋째 형님 역시 저와 나이가 같은 위 동서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처가 집안에는 장로만 약 28명인 아름다운 크리스천 집안이었습니다. 단지 제 둘째 동서 형님 가족만 교회를 나가지 않아, 장인 어르신을 비롯한 동서 가족들이 늘 마음 속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늘 권면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장인과 장모께서 돌아가시고 동서들만 남게 된 후, 자녀들의 결혼식 등이 있을 때 한 번씩 만나게 됩니다. 장로이신 큰 동서 형님은 공직에 계시다 일찍 퇴임하신 뒤, 사진작가가 되어 활동 중이십니다. 둘째 형님은 수협에 근무하다 은퇴하셔서 농사를 짓고 계시고, 셋째 동서는 사업을 하다가 나이로 인해 귀농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손아래 처남은 약 20년간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퇴직한 후, 장인 어르신께서 바라고 원하셨던 목회자가 되어, 지금은 교회를 맡아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남의 누나들 4명의 의논 후 처남이 목회하는 교회로 모두 방문해 축하해주기로 했습니다. 약속한 날을 잡아, 방문지인 남해 당항교회로 찾아갔습니다.

동서들과 옛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만남의 즐거움과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제일 큰 동서인 형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필자는 그 말씀에 크게 감동을 받아, 글로써 선한 복음의 지혜를 널리 전하고자 합니다.

큰 형님께서는 성품이 강직하시면서, 온화함과 유머 감각이 풍부하시고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둘째 동서 형님께서 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음을 늘 안타까이 여기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식구 모두들 잘 들어봐! 우리가 너무 감사한 것이 있다. 우리 식구들을 비롯하여 일가친척들 중에 장애인이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다”라며 빙그레 웃으시면서 다음의 말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영적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 말씀을 듣고, 우리 모두는 서로 쳐다보면서 “맞네, 정말 맞네” 했고, 옆에 있던 집사람의 언니가 “형부, 이제 교회에 나가시지요!” 하며 용기 내어 말했습니다.

둘째 형님이 빙긋 웃으시며 긍정적인 눈으로 살며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복음의 씨가 마음 밭에 뿌려져 마음 속 깊이 교회당 종소리가 숨소리처럼 느껴지는 울림이 전해져, 마치 집안 분위기가 천국의 찬송소리가 울려퍼지는 것 같았습니다.

둘째 형님은 대가족의 장남으로, 부모님께서 예수를 믿지 않아 제사가 많았던 터라 교회를 나갈 수 없었던 처지였습니다.

마침 얼마 전 큰 아들이 결혼했는데, 아주 믿음이 좋은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아, 복음의 가정으로 변화됐습니다. 놀라운 소망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이미 크리스천으로서의 선택된 하나님의 가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큰 형님의 깊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말씀 가운데, 유일하게 교회를 나가지 않는 동서를 위해 애가 마르게 기다리며 교회를 나갈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며, 장차 임할 예수님의 재림과 앞으로 천국을 향한 소망을 권면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선하고 아름답다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형님은 교회를 나가지 않으실 뿐,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는, 요즘 시대에 참으로 귀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위해 전심을 다해 정을 쏟으시며, 화목과 화평을 위해 많은 조언으로 위로하시는 그 모습은 참으로 크리스천들이 누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갓집 촌수는 촌수도 아니다’는 옛말도 있지만 동서들과의 관계에서도 참된 신앙인으로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큰 형님의 성숙한 질서와 믿음을 보며, 외롭게 자라면서 신앙생활을 해온 저로서는 훌륭한 선배이자 교사이며,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런 좋은 집안으로 장가를 보내신 것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사랑이 있지 않을까요? 특히 장인 어르신의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장인 어르신께서 하늘나라로 가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때 장인 어르신께서 생전에 절대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선한 일과 수고들이, 돌아가신 후 어려운 이웃들을 통해 속속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물하셨습니다.

“우리 친척들 모두가 장애인이 한 사람도 없어 정말로 감사하지만. 영적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라고 말씀하신 큰 형님의 말씀이, 남해 바닷가에서 집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내내 귓전을 울립니다.

둘째 형님을 구원하기 위한 큰 형님의 깊은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반드시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합니다. 둘째 형님의 가정에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을 믿습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