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많은 비유들 중 가장 유명한 두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고, 나머지 하나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잘 알고 있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억압받고 소외당하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인 같다’고 할 정도입니다.

인종이나 종교,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뛰어넘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성경 속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무조건적인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교훈일 것입니다.

필자가 40년 넘게 섬겨왔던 교회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400-500명의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가게 됐습니다. 무척 가슴 아프고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일부 성도들이 연합했고, 작은 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성도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쇠사슬로 교회 문을 잠궈 버렸기 때문입니다. 덩치 큰 몇몇 집사들은 교회 문 앞에 서서, 반대편 성도들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교회에 들어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 예배는 드려야겠기에, 여러 방안을 고민하다 하는 수 없이 작은 교회를 빌려 우리끼리라도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배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말씀 선포입니다. 설교를 하실 분이 있어야 했습니다. 교회 담임목사님들은 각자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해야 하기에, 은퇴하신 저희 예장 통합 부산남노회 원로목사님들께 예배 설교를 부탁하고자 전화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오늘 언급되는 원로목사님은 세 분이십니다. 물론 실명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필자가 전화드렸던 분은 오래 전 장로고시를 치르던 중 면접관으로 수고해 주셨던 분이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내용을 짧게 설명드리면서 주일 설교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말입니까? “문제가 있는 교회는 설교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한 동안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필자는 설마 이런 말씀까지 하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정말 황당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설교를 부탁드렸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오로지 “문제 많은 교회에서는 설교하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원로목사님께 똑같이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분 역시 “이번 노회가 끝나면 할 수 있다”는 대답만 남기셨습니다. 참으로 민망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세 번째 목사님께 부탁드렸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사례금은 많이 드릴 수 없다”면서 설교를 부탁드렸는데, 의외로 그 목사님은 흔쾌히 수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속으로 두 주간 설교를 해주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사례비를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희들의 딱한 사정을 아시고 미리 헌금을 준비하셔서 선뜻 내놓으신 것입니다.

교회 바로 세우기를 위해 모인 모든 성도들은 눈시울이 촉촉해졌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귀한 원로목사님이 계시구나!’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애써온 신음 소리가, 잠시나마 기쁨의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드벤처 높이 등산 산 피크 정상 회담 도움 팀웍 지원 보조 소년 도전 절벽 섬김의 리더십 servant leadership
▲ⓒImage by Sasin Tipchai from Pixabay
이 세 분의 원로목사님들 중, 우리의 이웃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지 않고 외면하며 지나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장 원로목사님, 레위인 원로목사님은 환경과 여건을 고려한 나머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한 분의 목사님은 거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아마 설교를 사양하신 목사님들은 주위 환경이나 눈치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노회에서 힘 깨나 쓴다는 장로가 앞장서 교회를 장악한 뒤 노회마저 자신의 아성으로 만들어 떡 주무르듯 하고 있으니, 혹시 그의 귀에 들어가면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이후 그 교회에서 행사가 있을 때, 불러주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떠하셨습니까?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 몸이 아파도 병원조차 갈 수 없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셔서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시고 그들이 원하는 행복을 선물하셨습니다.

말씀이 그리워서 설교를 부탁하는데, “문제 많은 교회는 갈 수가 없다”고 말하는 원로목사가 정녕 주님의 종일까요? 평생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애써 오셨던 그 노고가 한 순간에 날아 가버리는 재앙의 분출 계기가 되진 않았을까요?

예수님 당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내려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해, 감히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는 큰 영광을 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죄를 회개하며 이웃에게 토색했던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놀라운 변화와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중심에는 바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자비가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거반 죽어가는 사람을 남겨놓은 채 몰래 피해가던 그 때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오늘날에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강단에서는 늘 거룩한 척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앵무새처럼 말씀하시면서 정작 본인들은 그럴 뜻이 전혀 없습니다. 거짓 탈을 쓰고 종의 모양만 행사하는 목사님들이 아닌지, 심판대 앞에서 밝혀질 줄 믿습니다.

분명 이 땅에는 참 목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부 타락한 목자들 때문에 교회가 비신앙인들에게까지 욕을 먹고 하나님의 영광에 누를 끼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그가 이르되 자비를 베푸는 자니이다”라는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누가 이웃인지’ 돌아보는 성찰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 분쟁에서 아픔과 고통을 당하는 이들은 누구의 이웃입니까? 교회의 목자와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늘 자신을 돌아보며, 성도들에게 상처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그들의 선한 싸움을 수용해야 합니다. 한층 더 성숙된 믿음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드러내는 귀한 종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상대가 누구든지 베풀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이 익숙해지셔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선한 행실로 주님의 향기를 사방으로 퍼트렸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