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 복음의 영광 볼 수 있는 능력
거듭나 그리스도의 영광 보는 자만이
복음에의 복종, 곧 예수 믿을 수 있어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복음 전도가 종종, ‘제발 예수 좀 믿고 구원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오해받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 권면을 받아들이면 전도자와 복음의 체면이 서고, 그것이 거부되면 전도자나 복음이 무참(無慘)히 짓밟힌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복음 전도는 그 자체로 권위와 위엄을 가지며, 어떤 경우에도 그것의 권위가 떨어지는 법은 없다.

복음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이 따른다‘는 경고도 함께 함의돼 있기에,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그가 복음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복음의 정죄아래 들어간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믿음이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복음의 명령(命令)에 대한 복종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에의 복종’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명령자’와 ‘명령 이행자’의 관계 속에 있음을 확증한다.

사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명령과 복종’ 없인 어떤 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복음의 권면’까지도 그러하다.

인간은 제시되는 복음을 받아들이므로 구원을 받고, 그것을 안받아들이므로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공고히 한다.

재삼 강조하지만,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복음의 제시를 받고 구원받는 사람은 그 복음에 복종하여 ‘예수를 믿는 자’이다.

믿음이란 다만 복음에 대한 지적인 수납(intellectual receiving)이 아닌, 의지적 복종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복음의 권면을 지엄하게 받아들여 “아멘” 하는 복종적 태도이다.

물론 이 ‘복음에의 복종’인 믿음은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려는 ‘율법적 복종’과는 다르다. 그것은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손 곧, ‘형식상의 복종(formal obedience)’이다.

‘율법적 복종’이 인간의 의를 드러낸다면, ‘복음에의 복종’ 곧 믿음은 예수를 높인다. 동시에 복종개념이 빠진 지적 동의에 불과한 믿음은 예수를 높이지 못할뿐더러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으로 전락된다.

◈복종의 능력을 가진 거듭난 자만이 예수를 믿는다

영적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그가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단지 그에게 있어 생물학적인 생존이 가능하냐 아니냐 하는 차원이 아니고, ‘복음에의 복종’을 하고 그를 향해 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이다. 이렇게 볼 때, ‘복음에의 복종’은 인간 능력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신인협력주의(synergism)같은 알미니안(Arminian)들은 하나님이 구원을 제공해도, 믿고 안 믿고는 인간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기에, 그들에게 신(信)·불신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 문제로 귀결된다.

이렇게 믿음이 인간 의지의 산물이 될 때, 구원은 자기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되고, 믿는 자들을 겸비하게 하기보다는 자고하도록 만든다.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도 연민보다는 우월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정통 신학에서는 죄로 죽은 인간은 ‘복음에의 복종’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본다. 죄로 죽은 인간의 의지는 죄에 예속되어 있고 전적 무능해졌기에 오직 죄된 선택만 할 수 있을 뿐, ‘복음에의 복종’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죄의 죽음에서 살아나는 거듭남 없이는 ‘복음에의 복종’ 같은 것은 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거듭남’을 ‘믿음’보다 앞세운다.

이렇게 ‘믿음’은 거듭남의 결과로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아무도 자기의 믿음에 대해 자랑할 수 없게 만들뿐더러, 거듭나기 전에 인간이 그것을 갈망하거나 받을 준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엡 2:8-9).

구원 신앙에 이르기 전 인간 편에서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일부 청교도들의 ‘준비 신학(preparation theology)’, 십자가의 요한(Saint John of the Cross, 1542-1591)이 말한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의 통과’ 같은 것은 당연히 그들에게 거부된다.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를 향해 ‘나오라’고 했을 때, 먼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후 비로소 그가 그 명령에 복종해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듯(요 11:43), 죄인은 먼저 아들의 음성을 듣고 죄의 죽음에서 살아나는 ‘거듭남’ 후에라야 ‘복음에의 복종’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전 12:3)”는 말씀 역시, 성령으로의 거듭남 없이는 예수를 주로 부르는 ‘복음에의 복종’을 할 수 없다 는 말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가 ‘복음에의 복종’ 곧,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은 무덤 속의 시신(屍身)이 살아나려고 자구책(自救策)을 강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듭남을 믿음의 결과로 보는 이들은 거듭남의 인지(認知)나 경험은 믿은 후 일어나기에, 믿음을 거듭남에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험적 순서로 보면 이것이 맞다. 믿지 않는 한 거듭남을 인지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적 논리와 ‘구속의 서정(order of redemption)’에서 본다면, 당연히 거듭남이 믿음보다 앞선다. 거듭남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일어났다면, 믿음은 현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그리스도가 위하여 죽은 거듭난 택자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 속에서 이뤄지는 구속 경륜에서 볼 때, ‘거듭남과 믿음’에는 시간차가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2천년 전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연합시켜 거듭남을 현재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둘의 동시성이 오늘날 ‘믿고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과 ‘거듭나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 모두를 용납할 수 있는 아량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동시에 죄로 죽은 미중생자에겐 ‘복음에의 복종’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기어코 거듭남을 믿음에 앞세우려는 이들의 주장도 가납할 수 있게 된다.

◈거듭나 볼 수 있는 자만이 예수를 믿는다

성경은 ‘거듭남(regeneration)’과 ‘배움(learning, 앎)’을 동일시한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는 말씀은 ‘아버지로부터 거듭난 자만이 예수를 알고 믿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듣고 배움‘을 ’거듭남‘과 동일시하여, 거듭나 예수를 아는 사람만 그에게로 오게 된다고 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죄의 죽음에서 살아나는 ‘거듭남’을 ‘눈 열림(open eyes) 계시(revelation)’와 동일시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난 자만이 눈이 열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거듭나 죄사함을 받은 자를 ‘보는 자’로,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보지 못하는 자’에 비유했다(요 9:39-41). 하나님은 죄로 소경된 자를 거듭나게 하시므로, 그리스도와 복음의 영광을 보게 한다.

사도 바울은 죄의 죽음에서 살아난, 거듭난 자에게 주어지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과 ‘마음 눈을 밝힘(enlightening of heart eyes)’에 대해 말했다(엡 1:17-19). 거듭나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가진 자만이 복음의 영광을 보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예수를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소경이라고 한 것은(요 9:41) 그들이 거듭나지 못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때문이다.

또 다른 성경은 ‘씻음’을 ‘거듭남’과 동일시한다(the washing of regeneration, 딛 3:5). 중생의 씻음이 그와 하나님 사이를 막은 죄를 없이하여,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한다(마 5:8).

이 점에서 거듭남은 복음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거듭나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만이 ‘복음에의 복종’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된다. 거듭남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