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윤
▲허정윤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6. 생명에 대한 과학의 도전과 한계(6)

(14) 의식과 무의식의 어려운 문제들

물리적 측면에서 보면 의식은 뇌 안의 뉴런과 뉴런 사이에 벌어지는 전기적 신호의 전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뉴런의 전기적 신호는 그 이전에 시냅스 소포체에서 신경전달물질의 화학적 산물이다. 이와 같이 의식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것까지는 쉬운 문제였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는 어려운 문제(hard problem)이다. 뇌가 정보를 어떻게 느끼고 평가하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의식의 메커니즘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발생을 물리적인 현상으로만 본다면, 각 사람에게 동일한 정보가 전달되었을 때에는 질량적으로 동일한 의식이 발생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현대 뇌과학자들이 최대의 난제라고 인정하는 의식의 퀄리아(qualia: 감각질, 感覺質) 문제이다. 퀄리아는 각 사람의 뇌가 감각기관이 전달하는 정보에 대해 주관적으로 다르게 해석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같은 사과를 보고 있어도 모두 똑 같은 붉은 색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퀄리아는 현재 물리적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철학적 명제이다. 신학적으로도 하나님의 창조를 입증할 마지막 열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개척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 의하면, 무의식은 과거에 억압에 의해 좌절되었던 욕망의 기억이라고 설명했다. 억압된 욕망들이 바로 무의식의 내용물이다. 욕망과 억압적 현실이 갈등하는 과정에는 욕망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만, 욕망이 억압되는 지점은 정신과 육체의 경계선이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욕망을 시기별로 나누어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구분했다. 이드는 유아기에 억압된 원시적 욕망이다. 자아는 성장하는 동안 현실에 의해 억압된 것이고, 초자아는 사회의 도덕규범에 의해 억압된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의식의 저류에는 무의식이 동시에 흐르면서 의식과 섞이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은 갈등과 타협을 반복하는 역동성을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무의식의 분석을 통해 인간의 정신적 고통이 내면에 억압된 욕망의 변질된 것임을 해명하고자 했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의 일종인 '억압된 욕망의 위장된 성취'라고 설명했지만, 현대의 뇌과학자들은 꿈을 의식의 일면으로 본다. 현대 뇌과학자들은 뇌와 신경세포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프로이트에 대해서 '절반은 틀린 것들을 말했고, 나머지 절반은 거짓말'이라고 치부한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에서 고대신화와 집단무의식을 발견했던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의 『무의식의 심리학』은 그야말로 헛소리일 뿐이다. 현대 뇌과학자들은 의식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프로이트와 융을 깔아뭉갠다. 그러나 융은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라는 말을 묘비명에 적었고,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안다'고 말했다. 아마도 융은 현대 뇌과학자들보다 앞서 신의 수수께끼가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 않았을까?

현대 뇌과학은 fMRI로 뇌를 촬영하여 어떤 정보와 관련하여 정신작용 또는 의식이 발생하고 있을 때,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은 대개 알고 있는 상태이다. 크리스토퍼 코흐는 『의식』에서 실험을 통해 행동의 대부분이 의식적 접근이 불가능한 무의식적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주장했다. 코흐에 의하면 실생활에서의 의사결정에는 항상 의식과 무의식적인 과정이 혼합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케팅 교수이자 '마음/뇌/행동 연구소'의 소장인 제럴드 잘트먼(Gerald Zaltman)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현대인들이 언어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생활 중에 의식적인 결정은 많아야 5%이고, 나머지 95%가 무의식 상태에서 결정이 이루어진다고 한다(『소비자의 숨은 심리를 읽어라, How Customers Think: 2003』). 그렇다면 인간은 대부분 깨어있는 시간에도 제 정신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스티븐 호킹과 함께 『위대한 설계』를 공저했던 물리학자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Leonard Mlodinow)는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동료인 신경생물학자 크리스토프 코흐의 연구에도 참여했다. 믈로디노프는 그가 연구한 결과를 정리하여 『새로운 무의식: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 Subliminal-How your unconscious mind rules your behavior』를 출판했다. 원제인 Subliminal의 개념은 심리학에서 잠재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잠재의식- 무의식이 어떻게 당신의 행동을 지배하는가'이다. 믈로디노프는 결국 무의식은 드러나지 않고 잠재된 것이지만, 의식적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의식의 중요한 요소는 기억이다.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에릭 칸델(Eric R. Kandel)은 바다달팽이인 군소(Aplysia)의 신경망에서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했다. 칸델 이전에 의식 연구의 주류는 뇌세포의 구조에서 의식의 메커니즘을 발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칸델은 전기적 신호에 따라 신경망의 반응이 달라지는 현상에 착안하여 시냅스 소포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연구했다. 그는 군소의 연구를 통해 기억이 뇌에 있는 뉴런과 시냅스 사이에서 연결이 맺어지고 풀어지는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 현상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 공로로 2000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의 실험과 연구는 학습과 기억의 형성 과정뿐만 아니라, 정신질환 치료제들의 세포내 작용을 연구하는 의학에도 중요한 것이었다. 칸델은 국내에서도 신경과학 교과서로 쓰이는 『신경과학의 원리』를 책임 편집했고, 『기억을 찾아서, In search of memory』(2007)를 출간했다. 칸델은 최근에는 정신병증을 다룬 The Disordered Mind(2018)을 출간했다(국내에서는 미출간). 칸델은 정신과 물질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에 한 걸음 나아가긴 했지만, 퀄리아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15) 지능과 느낌 등에 관하여

인간이 현실이 아닌 일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지능(intelligence)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자들은 호모 데우스나 포스트휴먼을 만들어 그것들과 공생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상상한다. 동물의 지능은 몸의 크기와 뇌의 크기를 비교하는 대뇌화지수(大腦化指數)에 비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인간의 대뇌화지수는 유인원보다 약 3배, 다른 포유류보다는 약 7배 정도 높다.

지능은 뇌의 단일구조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신경망에 의한 다중적 체계에서 발현되는 지적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 지능은 잠재된 유전적 능력으로도 볼 수 있지만, 지능지수(IQ ; Intelligence Quotient)를 측정할 때에는 이미 학습된 부분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지능에 의하여 형성된 의식은 유전적으로 부여된 지능과 경험이나 학습 등의 환경요인에 의해 발달된 기억과 정서 등을 포함하는 복합물로 여겨진다.

그래서 현대 심리학에서는 지능지수를 검사할 때에는 지능검사(IQ; Intelligence Quotient)와 정서검사(EQ: Emotional Quotient)를 따로 하고 있다. 인간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 훨씬 발달된 문명사회를 건설할 수가 있었던 힘은, 정보를 종합하고 판단해서 추론할 수 있는 지능과 정서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심지어 직접적으로 경험한 정보가 없어도 상상을 이끌어갈 수 있다.

인간의 추론과 상상에 사용되는 도구는 언어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뇌인지과학센터장인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Vilayanur S. Ramachandran) 교수는 인간의 다양한 언어기능을 연구했다. 그는 그의 연구를 정리하여 Phantoms in the Brain』(1999) 등을 저술했다(국내에서는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실험실』로 번역 출판). 라마찬드란에 의하면 뇌의 활동은 마치 유령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좌하두정 소엽 부분이 덜 발달되었거나 결함이 있는 사람들의 뇌는, 그 정도에 비례해서 언어기능이 떨어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문자나 언어를 그대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여 비유적이거나 다의적인 암호나 시적 문장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진화주의 뇌과학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좌하두정 소엽 부분이 덜 진화되었다는 측면에서 보기도 하지만, 현대 심리학은 좌하두정 소엽 병증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인간의 좌하두정 소엽은 유인원의 것과 비교해서 6-7배의 크기로 발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마찬드란은 뇌 속 뉴런에서 발생한 이온과 전류의 흐름에 의해 변화하는 뇌의 기능을 논의했을 뿐이지, 차갑고, 따뜻하고, 빨갛고...... 등의 주관적 느낌이 만들어내는 의식의 퀄리아를 해명하지는 못했다.

미국의 신경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정서에 관련된 신경과학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된다. 다마지오는 1994년에 성공한 사업가였던 말기 뇌종양 환자 엘리어트의 치료를 위해 전두엽 수술을 시행했었다. 수술 후 엘리어트에게는 수술 전과 달리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엘리어트의 경과를 관찰했던 다마지오는 전두엽에서 정서를 관장하는 부분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인지와 정서가 함께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디마지오는 『데카르트의 오류』(1994)를 써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부정했고, 『스피노자의 뇌』(2007)를 써서 뇌의 물질적 구조와 사유의 기능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하나는 신에 귀속되는 사유의 불멸성 때문이었으나, 다마지오는 물질이 영원한 것이고 사유는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다마지오에 의하면 생명이 발생한 것은 물질에서가 아니다. 태초에 느낌(feeling)이 있었고, 그 느낌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냈다. 생명은 몸과 신경계가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 느낌의 지도를 만들어 간다. 그것이 문화이다.

그래서 디마지오는 The Strange Order of Things-Life, Feeling, and the Making of Cultures(2018)를 썼다(국내에서는 『느낌의 진화』로 번역 출판). 그러나 슈뢰딩거가 물질과 정신의 연결 지점을 찾지 못했듯이, 다마지오도 느낌이 물질과 연결되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마지오에게 생명과 느낌과 문화들의 질서는 이상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인간의 뇌속에 나타나는 의식의 퀄리아는 크릭과 코흐가 해결하지 못한 NCC(의식의 신경 상관물)에 다름 아니다. 크릭과 코흐는 정신적 사건과 그것의 NCC 사이에는 분명한 대응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자아를 형성하며, 미래를 계획하고 선택하는 NCC는 인과적 힘을 갖지 않는 부수현상이나 환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크릭과 코흐에 의하면 물질적 NCC가 없으면 의식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에게 정신의 95%를 차지하면서도 발현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역시 퀄리아다. 그 외에도 꿈이나 수면 중에 걸어 다니는 몽유병, 간질병 한자들에게 보이는 종교적 환상 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퀄리아의 문제이다. 그동안 조상의 무의식이 자손의 DNA 속에 잠재되었다가 표현될 수 있느냐는 논란도 퀄리아에 속한 문제였으나, 최근에는 뉴런의 DNA가 정신작용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그 가능성이 인정되었다.

그렇다면 자손의 의식과 행동은 조상이 물려준 무의식에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DNA에 잠재된 무의식이 첨단 DNA 시퀀서(해독기)로도 데이터화되지 않는 것은 퀄리아의 문제이다. 미해결된 의식의 퀄리아 또는 NCC는 아직도 너무 많다. 의식의 퀄리아 또는 NCC는 이제 생물학, 물리학, 뇌과학, 신경과학, 심리학 등의 과학적 연구뿐만 아니라, 철학과 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가 협동 연구해야 할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현상을 살펴보면 볼수록, 물리법칙과 생명법칙이 따로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생명현상을 물리법칙으로 왜곡해서 다 해결된 것처럼 설명하는 진화론은 결국 사실과 다른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생명과 물질을 연결하는 고리는 결국 의식의 퀄리아 또는 NCC에서 발견될 것이며, 발견과 동시에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도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지능보다 더 우수한 인공지능(AI)이 눈앞에서 작동하는 시대이다. AI는 용량을 늘려서 인간의 뇌보다 지능을 훨씬 더 좋게 만들 수 있다. AI에게 어떤 문제의 해답을 요구하면, AI는 어떤 식으로든지 답을 내놓는다. 인간은 곧 어려운 문제들의 해결을 AI에게 넘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AI가 모든 문제에 대해 올바른 해답을 내놓는다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인간이 먼저 사실대로의 물리적 데이터를 AI에 입력해야 한다. AI는 입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대답을 내놓기 때문이다.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사실대로의 창조론 데이터를 입력하지 못한다면, AI는 무신진화론자들이 입력한 왜곡된 무신진화론 데이터로 대답할 것이다. 유발 하라리가 상상한 것처럼, 데이터교의 신이 된 호모 데우스의 AI가 우주만물을 창조한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AI가 하나님의 자리까지 인간의 세상에서 밀어낸다면, AI를 만들어낸 과학을 부정하고 무지의 안일에 빠져 있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허정윤(Ph. D. 역사신학, 케리그마신학연구원, djtelcom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