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0: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본문의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4개 복음서 중에 3곳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본문과 달리 맹인의 이름을 기록해 놓지 않았습니다. '한 맹인', '맹인 둘'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왜 두 복음서는 구체적인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가. 그것은 이 구원의 사건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누구라도 이 맹인이 가졌던 믿음을 가지면 그도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에는 이 이야기에 이어 삭개오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기록해놨습니다. 바디매오와 삭개오. 바디매오는 맹인이면서 거지였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모든 사람의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같이 깊은 절망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단순히 천국가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깊은 절망 속에 있던 삶이 한없는 희망의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들이 가진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육안이 뜨여진 치유의 역사를 넘어서서 인간 안에 또 다른 눈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인도 사람들은 두 눈 사이에 까만 점같은 것을 찍거나 바르고 다닙니다. Third-eye. 제3의 눈이라는 것인데, 이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는 영혼의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 뜨여지는 것입니다. 이를 너무 신비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히11: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무엇인가. 바라는 것을 실제의 것처럼 보게 합니다. 또 보지 못하는 것들을 확실한 것으로 보게 합니다.

이런 눈을 우리가 꼭 가져야합니까. 그렇다면 왜 그래야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절망을 경험합니다. 바디매오처럼 사고로 장애인이 되거나 재산을 다 잃어버리게 될 때, 또 삭개오처럼 따돌림 왕따를 경험하게 되는 경우, 큰 절망을 경험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아직도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2위로 여전히 최상위권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 안에 깊은 절망과 슬픔이 있습니다. 깊은 한(恨)이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정말 한스러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삿11장]에는 입다라는 사사와 그의 딸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민족의 명운이 달린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입다는 하나님께 맹세(서원)를 합니다.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시면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하러 나오는 이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그런데 제일 먼저 나온 이가 누구였습니까. 자기 딸입니다. 악기를 치며 춤을 추며 나왔습니다. 입다는 옷을 찢으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그 딸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 딸의 죽음은 어떤 죽음입니까. 죄없는 이의 죽음, 너무도 한스런 죽음입니다.

또 [행12장]에는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는데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못지켰다고 사형을 당했습니다. 이것도 억울한 죽음입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항의할 수도 없는 억울함, 한(恨)이 이 안에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안에 이런 갇힌 세계, 한(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죄 중의 제일 큰 죄입니다. 왜냐면 살아남은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큰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큰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이 죄라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버릴 만큼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그 안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분명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다 아시고 또한 그 한(恨)을 풀어내실 수 있으십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그 한이 풀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을 믿는 자들은 한(恨)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이 땅에 그런 한(恨)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비참한 절망 속에 갇힌 영혼들을 하나님 구원의 능력으로 위로하고, 영혼의 감옥 속에 갇혀있는 그들안에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른 눈이 뜨여지게 해야합니다.

본문을 보면 바디매오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맹인일 뿐 아니라 거지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자들도 경험할 수 있는 영적 정황입니다. 서두에 말했다시피, 이것은 일반적인 모든 영혼 안에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면 좋아보이고 웃는 것 같아도 속은 다를 수 있습니다. [잠14:13]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저는 학창시절에 이것을 정말 많이 느낀 사람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웃고 즐기는데 마음은 어두운 것입니다. 웃고 떠드는 모임이 끝나고 혼자 집으로 가는데 그 공허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영혼의 어두움, 영혼의 궁핍함이 사람들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 안의 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합니다.

그런데 바디매오 안에는 뭐가 있었습니까. 온갖 괴롭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신체적 장애와 현실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황가운데 있는 자이지만, 그 안에 구원받을 만한 귀한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뭔가요.

막10: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는 "주님, 나를 좀 봐주세요" 이런 말입니다. [행2:21]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렇게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구원의 이 놀라운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소감을 다음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바디매오의 훌륭한 점에 대해서, "그는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것에 감사했습니다. 또 외칠 수 있는 입이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하고 귀한 묵상입니다. 눈은 볼 수 없지만 그 없는 것을 보지 않고, 가진 것 주어진 것을 보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의 초점이 절망적인 상황에 맞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에 관해 맞춰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는 것이 바디매오안에 놀라운 점입니다.

우리 삶이 양면이 있습니다. 특히 믿는 자들 안에 양면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고난 속에 있는 교우들에게 고난을 능히 이겨나갈 수 있는 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다른 면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즉 고난이 있으면 다른 면으로는 큰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바울은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은혜받을 때이고 지금이야 말로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뭔가요. 많은 환란이 있는 때입니다.

6: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6: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6: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6: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많은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더 거룩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수록 말씀대로 더 열심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누구에게도 거리낌없이 복음전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끊임없이 한계를 경험하면서도 그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치열한 신앙의 훈련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깨달은 귀한 세계가 무엇입니까.

6: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크리스챤들 안에 있는 양면성입니다. 예수 믿어서 욕먹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만큼 영광스러운게 있습니다. 악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됨이 있고. 무명한 자 같으나 또 유명한 자이고. 이를 하나하나 다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이해되는 분들은 정말 진지하게 신앙하는 분들입니다. 정말 많은 어려움 속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힘쓰는 분들입니다. 죽을 것 같은데 정말 살아있습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그 영은 새롭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그 근심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기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 같은데 또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부자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또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나눕니까. 우리 삶에 이런 양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양면 중에 우리가 어디다 초점을 맞추고 사느냐? 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해도, 그러나 그와 전혀 다른 희망적인 면이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 면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눈이 안되는 것, 힘든 것만 보지 말고, 우리 안에 열어주신 귀한 세계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져 있는 풍요롭고 복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합니다.

바디매오는 그런 면에서 훌륭했습니다. 그의 삶에 온갖 문제들 비참한 상황들이 있었다 해도 그에게 주어진 귀한 것을 바라보고 그것에 지극히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하나님 아들의 오심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습니다.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이 귀한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의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보지 못하지만 주를 보기를 원했던 열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많은 고난 속에 있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결론적으로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6: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6: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너희가 힘든 것은 마음이 좁아진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절망과 비관은 어디서오는 것인가. 그것은 다 마음에서 옵니다. 다른 말로 관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옛날 원효라는 유명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찾으려 중국으로 긴 순례의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길을 가다가 피곤해서 밤중에 잠을 자게 되었는데 자던 중 목이 말라서 달빛에 비춰진 물을 보고 마셨습니다. 시원하게 마시고 자고 일어났는데, 아침에 보니까 자기가 마신 물이 담긴 통이 해골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그래서 내 마음을 바로먹으면 세상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더 깊은 세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인간 영혼은 본래 한없이 아름답고 깨끗한 것인데, 죄로 인해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더러운 것을 닦아내면, 그 죄를 씻어내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없이 밝고 아름답고 희망적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든 것은 늘 마음 안에서 좁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음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 바디매오 인생의 반전은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그는 맹인이고 거지였습니다. 그럼에도 '왜 내가 보지 못하는가? 왜 내가 찢어지게 가난한가?' 이렇게 생각하고 신세한탄하면서 절망에 빠져있지 않았습니다. 자학하거나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게 있는 귀와 입' 그것에 감사하고 그것에 집중하고 그것으로 예수의 소식을 듣고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가던 자들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귀신 쫓을때 하는 말입니다. 매우 멸시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바디매오는 더욱 심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얼마나 주님 보기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처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간절히 주님을 찾아야합니다. 부르짖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간절함이 또 어디서 크게 드러납니까. 주님께서 그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를 부르라" 하셨을 때에, 그는 겉옷까지 내던지고 주님께 나갔습니다. 겉옷은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보호막 같은 것입니다. 추울 때는 이불이 되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는 몸을 보호해주는 것인데, 그것을 내던지고 뛰어서 주님께 나아갈 정도였습니다. 왜? 구원이 그 걸치는 겉옷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겼던 그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주의 자비가 내게 임하시면 임하는 것임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뛰쳐나온 바디매오에게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뭐를 해주기 원하느냐?" "너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우리가 각자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디매오와 같이 내 안의 비극을 넘어서서 내 안에 온갖 부족함과 연약함과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세계를 바라보고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바디매오보다 나은 자들이 아닙니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언제든지 부르짖어 기도할 수도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 안에 여러 어려운 상황들로 인해 답답해진 마음 힘든 마음 있다면 마음을 넓히고, 그와 전혀 다른 세계를 보는 눈이 뜨여지길 바랍니다.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에 바디매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입니다" 이 말은 "주님, 내가 눈 뜨길 원합니다" 입니다.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아멘. 그는 이렇게 눈이 뜨여지게 되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삶,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과 변화가 우리 안에도 새롭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