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식탁
▲음식을 나누는 모습.
1. 인류 역사상 가장 쇼킹한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 예수가 되신 사건입니다. ‘수직낙하’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이 땅으로 번지점프.

하나님이시니까, 이 땅에 오고 싶으면 구름 타고 오셔도 될텐데, 에스겔서처럼 휘황찬란한 형태로 나타나실수도 있을텐데, 가장 평범한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을 선택해 직접 여인의 몸에 잉태되는 고통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 땅에서도 가장 낮은 곳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스며든 것입니다.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어린이의 모습으로, 청년의 모습으로, 그렇게 형태가 변화하며 사람이 되셨습니다.

놀랍게도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벌어질 대로 벌어진 틈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4)”.

2.하나님과의 사이를 회복시킨 역할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 멀리 있고 알 수 없던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식탁교제를 즐겨하셨습니다. 그 분이 직접 요리하시지는 않았지만 그저 식탁에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유교권에서도 ‘겸상’ 문화가 있었던 것처럼, 식탁은 계급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밥상이라는 것은 ‘대접’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서로 ‘평등’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 예수가, 죄인 중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는 것은, 평등하다는 이야기이면서 대접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절할 노릇입니다. 계급 사회가 분명한 2천년 전에 말입니다. 선민 사상이 분명한 유대인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행복식탁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
3.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 됨’입니다.

“건물과 건물이 연결되어가야 합니다(엡 2:21f)”.
“그것이 성전입니다(엡 2:21b)”.

그것을 위해 그분은 친히 성전의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엡 2:20b).

주 안에 하나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 분도 역할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건물의 가장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 않은 모퉁잇돌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서로 하나 되기 위해 생기는 모든 기둥과 건축물들을 버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하나되겠다는 다짐을 하는 교회들은 절대 무너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은 바라십니다.

따라서 높아지는 교회일수록 모퉁잇돌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과 제도, 외형만 보일 뿐입니다.

4. 우리는 교회 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수평에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이 서있어야 합니다. 누구도 주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인되신 예수께서 ‘모퉁잇돌’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가리고 가장 힘든 곳에서, 우리 모든 무게를 지탱해 주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주인될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 안에서 늘 서로 가까워져야 합니다. 공동체를 일구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5. 청년부 연합 수련회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세 번째 모임까지는 담임인 제가 직접 참여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청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양 교회에서 유일하게 담임으로 그 자리에 참여한 제가 아무 말도 안하면, 서로를 경청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처럼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행복식탁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
세 번째 모임이 끝나고 나서 예수님의 비명(?)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야 너무 무겁다.”

경청자에서 제 역할을 바꾸었습니다. ‘얕은 물 되어주기’입니다.

깊은 물을 건너가기 위해, 먼저 디딜수 있는 얕은 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임인 제가 가벼운 존재가 되어줌으로써, 서로 하나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모임 자체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모임이 무거워지면, 우리 주님 지신 등에 멍 하나 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프로그램이 뭐가 되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 됨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강사가 어떤 설교를 하느냐도 둘째 문제입니다. 주 안에 하나 됨이 더 중요합니다.

프로그램은 잊어도 사람은 남습니다. 사람의 계획은 다 잊혀져도, 하나님의 사랑은 남습니다.

6. 지난 주일 예배는 컴패션과 함께 비전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북한 어린이센터를 컴패션과 함께 세우기 위한 비전을 품고 예배드리기 위함입니다.

예배 후 같이 식탁교제를 할 때, 비전예배를 위해 오신 컴패션 담당자 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오늘 행복했어요. 기뻤어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지만…, 건물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늘 듣던 설교 때문도 아닌데… 과연 뭘까? 이렇게 활기찰 수 있을까 싶어요.”

그런데 저는 그 이유를 압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서로 낮은 돌, 얕은 물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누군가에게 밟혀주고,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지는 수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참 행복한 목사입니다.

성도 분들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면, 그 분들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는 잘난 것 없는 목사에게 이런 귀한 성도 분들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립니다.

행복식탁
▲행복식탁에 모인 청년들.
7. 지난 주에는 교회 청년이 ‘행복식탁’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행복식탁’이라는 이름은 2년 전 제가 청년들의 저녁 일상 가운데, 퇴근하거나 집에 돌아가면서 밥이라도 한 끼 먹게 해주고 싶어서 시작했던 소소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역이 바빠져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하고 싶어도 못했던 일을 한 청년의 결심으로, 직접 장을 보고 메뉴를 선정하고 청년들에게 저녁을 대접했습니다.

교회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을 예약해 주일 저녁에 함께 모였습니다. 청년들 약 25명이 왔습니다. 생명샘교회 청년들뿐 아니라, 각자 초대한 청년들도 와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준비를 한 청년의 얼굴에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습니다. 각자 돈을 내고 모두 함께 수고해서,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요리하면서 주인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이렇게 해, 저건 저렇게 해’ 하면서 부딪치는 일도 없었습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스테이크, 파스타, 감바쓰 등의 요리들이 등장했습니다.

사진 찍는 사람과 불 앞에 있는 사람, 마늘 써는 사람과 얼음 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 찬양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그냥 어우러졌습니다.

누구도 너는 여기서 뭐하냐 너는 왜 이렇게 하냐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맛있게 먹고 아주 짧게 나눔을 했습니다. 그 모든 모임과 나눔에 있어서 누구도 주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향기는 가득했습니다.

저는 한 마디 설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모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다시 한 번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동시에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나, 그들의 일부가 되기도 했습니다.

8. 제게 말할 기회가 짧게 주어졌습니다. 저는 평상시 생각을 말했습니다.

“앞으로 이 행복식탁이 공동체의 롤모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교회 네 교회가 없고, 내 친구 네 친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공동체가 이제 필요합니다. 목사의 존재는 점점 옅어지고, 한 명 한 명이 주체가 되어 서로 섬기고, 서로 음식을 해먹고,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하고, 자연스럽게 찬양이 울려퍼지는 그런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제가 섬기는 교회가 주님의 향기와 사랑이 듬뿍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옅어질수록 아름다운 공동체는 더 강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함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같은 존재의 위치로 스며듬으로, 서로 하나 되게 해줄 수 있는 모퉁잇돌 바로 옆에, 작은 돌멩이로 함께할 것입니다.”

행복식탁
▲먹음직스럽게 준비되는 음식.
9. 시대 교회들의 아픔과 분열. 또 목회자와 성도 간의 간극, 세대 간 간극의 원인은 ‘너나 나나 자꾸 주인 되려 하는데’ 있습니다.

높음이 낮음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수직이 수평됨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높은 곳으로 가려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높아지려 할 때마다, 더 깊은 무게를 지고 계실 모퉁잇돌 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모두에게 행복한 식탁이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