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목사
▲국내에 방한했던 팀 켈러 목사(뉴욕 리디머장로교회 설립, CTC 이사장). ⓒ크리스천투데이 DB
필자는 지난 주 글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팀 켈러의 설교를 분석한 뒤 내린 결론은 단순하다. ‘더 이상 읽지 않겠다.’”

이 말은 팀 켈러의 ‘설교 내용’에 대한 논평이 절대 아니다. 설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글에 대한 논평이었다. 나아가 우리나라 설교자의 설교 글이 쉬웠으면 하는 바람(hope)에서 한 말이다. 우리나라 설교자의 글도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의 글은 진짜 어렵다. 미국 사람들에게는 쉬울지 모르겠지만, 필자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최근 읽은 책들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다.

필자가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팀 켈러가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철학자였다면, 글이 어려운 것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더십 전문가이자 목사인 존 맥스웰(John C. Maxwell)은 설교자의 기능을 아래와 같이 말했다.

“설교자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자”, 즉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다. “교육가들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들지만, 커뮤니케이터들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든다.”

설교자는 교육가가 아니라 전달자인 커뮤니케이터다. 그러므로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어 전달해야 한다.

팀 켈러의 책은 읽기에 어렵다는 것을 빼면 최고의 책이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성경을 보는 통찰력이다. 그의 성경과 세상을 보는 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제가 놀란 것 중 하나가, 예수님처럼 신학적 언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로 설교를 풀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설교자들에게서 보기 쉽지 않은 것으로, 그 설교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그는 글 쓰는 방식을 안다. 그의 설교는 ‘설명+논증+적용’으로, 글을 쓰는 것이 몸에 베여 있다. 특히 SNS 시대에 맞게 논증을 길게 하지 않고, 짧게 짧게 논증을 펼쳐나간다.

나아가 많은 설교자들이 몇 개의 논증에 그치는 데 반해, 10개 이상의 논증을 사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엄청난 독서력과 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장점에도 단 하나의 아쉬움이 있다면, 설교 ‘글’이 어렵다는 것이다. 여러 번 읽어야 글이 독해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트설교연구원’을 하면서, 매주 4권의 책으로 독서 토론을 한다. 팀 켈러의 책은 최근에 토론했던 책들 중 글이 어려운 편이었다.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좋은 책이 독자들로부터 많이 읽혀지지 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 큰 걱정도 하지 않는다. 필자는 한국 설교자들의 탁월한 어려운 글 소화 능력에 놀라고 있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분명한 것은 설교 글은 쉬워야 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설교자들을 가르칠 대, 어려운 글이 아니라 쉬운 글을 쓰라고 말한다. 학력이 높아졌으나 학습력은 퇴보하는 지금은, 더욱 글이 쉬워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글의 내용이 좋다 해도, 글이 어려우면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 추세다. 요즘 좋다고 하는 책들은 대부분 글이 쉽다. 글이 어려우면 독자들이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글의 시대다. 그 말은 글을 쓸 줄 알아야 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동시에 글을 쉽게 써야 한다는 말이다.

설교자와 교인들의 욕구는 다르다. 설교자와 내용을 중시한다. 그러나 교인들은 글을 중시한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의 해석을 중시한다. 그러나 교인들은 나에게 설교가 들리느냐를 중시한다.

설교자와 교인들의 욕구가 다르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처럼, 설교자가 교인들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글의 시대에는 내용도 중시하지만 글과 글의 형식을 중시한다. 안타까운 것은 신학계는 이런 흐름과 별개라는 것이다. 꽤 영향력 있는 목사들도 글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한다. 목사들은 ‘내용만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신학계의 이런 흐름을 속히 바꾸어야 한다. 내용을 중시하되, 글도 중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는 점점 더 한 귀퉁이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할 수도 있다.

세상에서는 글을 최대한 쉽게 쓰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한국을 강타한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리리의 책도 글이 쉽다. 글이 쉬우니 많은 독자들에게 읽힌다. 지금은 아무리 좋은 내용도, 글이 어려우면 읽히지 않는다.

필자가 세상의 ‘책 쓰기’ 강의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들었다.

“책은 책을 읽지 않는 80%를 대상으로 써야 한다.”

아주 ‘쇼킹’한 말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독자는 글이 어려우면 읽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동의어다.

책은 내용이 좋아야 한다. 다음은 글이 쉬워야 한다. 그럴 때 독자가 그 책을 읽는다. 즉 내용만큼 글도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쉬운 일상 언어로 설명하셨다. 그 이유는 청중에게 쉽게 전달돼야 이해가 됨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쉽게 전달을 신경쓰셨다면, 설교자들도 쉽게 전달되도록 쉬운 글로 써야 한다.

설교의 내용만큼 중요한 것이, 교인에게 들리느냐 하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들리려면, 쉬운 글이 전제된다.

예수님 말씀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꽂혔다. 반면 팀 켈러의 설교는 한 단락 한 단락의 뜻을 이해하려고 힘써야 했다. 최소한 다섯 번은 읽어야 했다. 그러나 다섯 번 이상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이런 면에서 지난 주 팀 켈러에 대한 말에 오해가 없기를 소망한다.

설교를 듣는 교인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면 안 된다. 어려우면 설교를 들을까 말까 자체를 고민한다. 설교가 쉬워서, 그에 대한 고민 없이 듣도록 해야 한다. 그럼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스스로 결단할 것이다.

설교가 어려운 이유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언어를 사용하셨는데, 많은 설교자들이 일상 언어가 아닌 신학 언어, 성경 언어로 설교하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글이 어려운 것은 교인들에 대한 배려가 적다는 증거다. 요즘 화두 중 하나가 배려다. 기업은 고객들이 물건을 구입하도록 하기 위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지나 역지감지(易地感之), 역지행지(易地行之)까지 고민한다. 최소한의 배려가 고객의 마음을 사는 시작임을 알기 때문이다.

설교 글이 어려운 것은 역지사지를 하지 않음과 다를 바 없다. 나아가 독불장군(獨不將軍)식 설교를 하겠다는 것이다. 독불장군이란 혼자서는 장군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부하 없이 어떻게 장군이 될 수 있는가? 교인 없이 어떻게 설교가가 될 수 있는가? 교인들이 설교를 듣고 변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기독교가 세상을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필자의 부족한 글 때문에 크리스천투데이에 팀 켈러의 설교를 연구해 온 고상섭 목사(만나 대화한 적 있음)의 글이 게재된 것을 보고 기뻤다. 고상섭 목사는 팀 켈러의 책에서 엄청난 진액이 계속 흘러나와 좋아한다고 했다.

필자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필자도 팀 켈러를 좋아한다. 단 글이 쉬웠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읽고 싶다’는 강한 바람 때문이다.

팀 켈러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8일 팀 켈러 복음신학 관련 포럼에 많은 목회자들이 참석한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설교를 잘 하는 설교자는 글을 잘 쓴다

최근 SNS 등으로 교제하는 어느 목사가 필자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목사님 역시 설교 잘 하시는 분들은 글을 잘 쓰시네요. 새벽기도 15-20분짜리 글을 보니까 읽어도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 제 글은 읽으면 로봇 같습니다. 딱딱하고 강의하는 느낌, 무엇인가 설명하는 느낌,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이 질문에 필자가 보낸 메시지는 아래와 같다.

“설교와 글은 하나입니다, 설교와 말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설교와 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글을 쓰지 않고 설교를 하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최근에 공부를 많이 한 목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설교자는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사람마다 설교 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하지만 필자는 설교에서 글이 중요함을 시간이 지날수록 체감하고 있다. 설교 글이 어려우면, 교인들이 설교에 불만을 갖게 됨을 알기 때문이다.

아트설교연구원 회원 중 이재영 목사(대구아름다운교회), 이언구 목사(용문교회)는 글이 좋다. 두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한다.

필자는 글이 좋지 않은데 설교를 잘 하는 설교자를 아직까지 만나본 적이 없다. 좋은 글을 쓰면서 설교를 잘 하는 설교자는 많이 만나봤다. 아트설교연구원 회원들을 봐도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설교자는 글을 잘 써야 한다. 그리고 쉽게 써야 한다. 이는 설교자의 책임이자 의무다.

신학 수준뿐 아니라 글의 수준도 높여야 한다

요즘 교인들이 하는 말이 있다. “설교자들이 독서(공부)를 하지 않는다.”

어떤 장로는 충격적인 말까지 했다. “설교자는 서울대학교 법대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 필자는 그 말을 “설교자는 서울대학교 법대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갖춰야 한다”는 소망이 담긴 말로 받아들였다.

이 말을 한 장로는 목사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책을 많이 사 드리고 싶다고도 했다. 책을 읽으라고 사 드리고 싶지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사 줄 수 없다고도 했다.

아무튼 교인들은 설교자들의 지적 성장을 원한다. 그것은 설교에 따라 자신의 인생도 결정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대형서점 신학 코너에 가면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신학 관련 책들도 많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책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글쓰기 책이 엄청 출간되고 있다. 심심하면 글쓰기 책이 출간된다. 한 일반 온라인 서점에서 ‘글쓰기’라는 단어를 검색하니 2,760권이 나왔다. 그러나 기독교 온라인 서점에서 ‘글쓰기’를 검색하니 18권밖에 뜨지 않았다. 이는 글쓰기에 대한 인식 차이가 엄청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인들은 목사가 세상에서 최고이길 원한다. ‘우리 목사님이 설교를 잘 하길’ 원한다. 이는 매주 최상의 설교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교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신학과 인문학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나아가 글쓰기 수준을 높여야 한다.

저는 설교자들에게 매주 20쪽 이상의 과제를 제출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과제 외에 매주 책 4권 읽기를 강요하다시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설교자들의 지적 수준과 글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설교와 낚시의 공통점

낚시와 설교의 공통점이 있다. ‘낚는 것’이다. 낚시로 물고기를 낚는다. 설교로 교인의 마음을 낚는다. 물고기든 교인이든, 낚여야 원하는 곳으로 끌고 올 수 있다.

낚시를 했는데 고기가 입질만 하면 절대 끌고 올 수 없다. 매번 허탕일 뿐이다. 교인들도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 낚여야 한다. 만약 말씀에 낚이지 못하면 수많은 설교가 허탕일 뿐이다.

설교자들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교인들이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는데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설교로 교인들의 지성과 감정을 낚을 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교가 교인들에게 ‘입질’만 하게 했지, 말씀에 걸려들도록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에 물리지 않으려는 교인을 물게 하는 것이 설교다. 그 핵심에 글이 있다.

필자가 설교자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설교는 어렵다.”

전에 설교 세미나를 갔을 때, ‘설교는 쉽다’, ‘설교, 누구나 잘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에 적잖이 실망했다. 필자는 설교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설교 글(원고)을 쓰는 것이 세상에서 최고 어려웠다. 설교 글을 쓰지 않는다면, 설교가 쉽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 글을 써 보라. 결코 쉽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설교는 아주 어렵다.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 이는 설교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설교 글을 잘 써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청중을 ‘물게’ 하는 글은 누구나 잘 쓸 수 없다. 설교자는 교인들이 말씀에 물리지 않는 글을 쓰는 자가 아니다. 교인이 설교를 통해 말씀에 낚이도록 하는 자이다.

크리스천투데이 신문에서 인천 효성중앙교회 정연수 목사의 글을 읽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교회 뜨거운 ‘영성’, ‘지성’을 통한 접촉점 만들어 전해야 한다.”

맞는 말이다. 지성과 영성이 만나야 한다. 그는 지성 없는 영성은 설득과 공감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글이 중요한 이유가 이에 있다. 글은 교인을 지성, 공감, 설득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들이여! 매 주일 설교로 교인을 말씀에 낚이도록 하자. 이런 설교를 하려면 먼저 글로 나와야 한다.

교인들을 낚을 수 있는 설교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아주 어렵다. 그러나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럴 때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낚인 자’가 된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