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누가복음 15장에는 모두 세 개의 비유가 나란히 등장을 합니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4-7절)’, ‘잃어버린 동전을 되찾은 비유(8-10절)’, ‘잃어버린 아들(탕자)의 비유(11-32절)’ 모두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기쁨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핵심을 ‘회개와 은혜’라는 두 축으로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을 일컬어 소외된 자들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곳곳에는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나약한 여자들, 죄인들과 그들의 회개 부분이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누가복음 15장 말씀에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함께, 회개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가 그 어떤 복음서보다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방탕한 아들에게 있는 것도, 방탕한 생활에서 되돌아왔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지금 우리가 작은 아들의 입장에 있는지, 아니면 큰 아들의 입장에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작은 아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돌아온 아들을 온 정성을 다해 기쁘게 맞이하고, 큰 잔치를 열어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나타내 줍니다. 곧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면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오로지 자신을 내려놓는 것, 은혜의 보좌 앞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이 아닌 어떤 잣대를 가지고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어디 무서워서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죄를 고백하면 그 무게에 따라 벌을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의 정도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오직 진정 어린 회개만을 원하시며, 회개하는 자들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신뢰를 통해 우리 자신의 잘못들을 하나씩 짚어보는 것이 곧 풍성하고 귀한 은혜의 잔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오로지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며, 은혜의 보좌 앞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귀한 시간 하나님께 모든 죄를 고백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기억하며, 더욱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자녀들이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를 통해 중·고등학교를 가며, 대학교를 입학하거나 혹 졸업을 해서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는 부모의 도움을 절실하게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회로 진출한 뒤에도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면, 불효막심하다고 모두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걸음마 믿음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적인 믿음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걸음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일 매일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늘 입으로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리고 ‘아멘’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데, 믿음의 결과로는 변화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딱하고 한심하기도 합니다.

젖먹이가 젖을 뗀 후에는 기어다녀야 합니다. 한 단계 발전을 한 것이지요! 다음에는 어린이집에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치원을 통과해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대학 또는 사회로 나아갑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생활 전선에 뛰어듭니다.

세상도 이런 순서로 나아가는데, 신앙인들은 왜 한 계단씩, 두 계단씩 걸어 올라가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믿음 생활이 오래될수록, ‘믿음의 노후 생활’도 필요합니다. 믿음에는 정년이 없다지만, 한계선은 그어 놓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나이가 50살이 되었다면, 오래 믿고 의지했던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았으면,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기가 아닐까요.

그렇다 해서 하나님이 빚진 것을 받으려는 분은 아닙니다. 이미 빚진 모든 것들을 탕감해 주셨으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탕감받고 나서 그냥 잠잠히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탕감받은 은혜의 보답입니다.

작은 교회 언덕 해 빛 햇살 구름 하늘 소금
▲ⓒ픽사베이
한국교회의 앞날을 생각해 봅니다. 대형교회가 춤을 추는 시절은 지나갈 것입니다. 요즘 같이 무조건 대형교회만 찾는 신앙인들이 많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큰 교회에 가면 부담도 덜고, 남 보기에 ‘큰 교회 다닌다’는 명성도 얻고, 자신의 사업에도 이익이 될 뿐 아니라 금전 부담이 적습니다. 직분을 맡지 않아도 성도 수가 많으니 ‘나 하나쯤이야’ 하는 안일한 신앙 태도를 갖습니다. 이것이 곧 대형교회와 그곳 성도들이 저지르는 큰 실수입니다.

그리고 목사를 따라,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들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로서의 자질과 사명을 잃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교회는 첫째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하면 나타낼 수 있을지 늘 고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면 선교, 구제면 구제, 장학사업이면 장학사업 등으로 확실하게 선을 긋고 교회의 색깔을 확실하게 나타낼 필요도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우리 교회 신앙의 목적을 알리고,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대형교회보다, 15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들이 더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예단해 봅니다.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뜻 있는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수많은 역사들을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천대받고 소외된 이웃을 스스로 찾아가셔서,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커지다 보면 엉뚱한 곳에 정신이 팔리기 쉽습니다. 헌금이 많아지면, 때로 무언가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 사업과 구제보다 교회 건물에 드는 비용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요, 세상 사업가들의 방법이자 낭비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되는가 여부는 규모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함께하시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오늘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기대하시는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목사 장로들은 오늘 누가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이익에 이끌려 증언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억압에 눌리거나 그들의 향응을 제공받아, 그들의 편에 서서 증언하는 목자는 참된 목자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소외되고 가난한 자, 그리고 억눌린 자들의 곁으로 다가가는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