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 연애는 다큐다
1. 장모와 아내의 밀착된 관계가 남편과 가정에 미치는 영향

“처가와 뒷간은 멀수록 좋다.”

화장실이 옥외에 멀리 있던 시절,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은 되도록 멀수록 좋듯이, 처가도 너무 가까우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처삼촌 벌초하듯 한다.”

무슨 일을 대충대충 무성의하게 할 때 쓰는 말이다. 내 삼촌도 묘지까지 돌보기는 무리인데, 아내의 삼촌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이니 산소를 돌보게 되면 하는 둥 마는 둥 해치운다는 뜻이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

처가는 신세를 지거나 가까이 살 곳이 아니라는 것.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되어야 처가살이를 한다는 뜻일 거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다.”

딸과 함께 사는 사위는 백년이 지나도 어렵고 신경 쓰이는 사람으로, 손님처럼 잘 대우해야 할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의 옛 속담 중 처갓집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속담들이 하나같이 옛말이 된 것 같다.

요즘은 일부러 처가살이하는 사람도 제법 있고, 더는 손님이 아니라 아들보다 더 살가운 사위도 있으며, 처가의 집사처럼 행동하는 이들도 많다. 처가가 요즘처럼 가까운 시대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외가와 워낙 가깝다 보니 요즘은 아이들도 고모보다 이모를, 고종사촌보다 이종사촌을 훨씬 가까운 진짜 친척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가정 내에서 여성의 입김이 세지고 엄마와 다닐 일이 많다 보니 시누이보다는 자매와, 시어머니보다는 친정엄마와 어울리는 과정에서 더욱 친밀해진 것이 분명하다. 이런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그 밀착도는 과거와 현저히 다르다.

남편들도 시댁에 가면 늘 문제가 생기고 고부갈등으로 뒷감당에 골머리를 앓으니, 좀 불편해도 차라리 처가를 가는 것이 편하다는 사람이 많다. 최소한 거기서는 아내 기분도 좋고, 자신도 웬만큼은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밀착된 아내와 장모 사이에서는, 부부간의 다툼과 이견이 모두 장모에게 보고된다. 또한 아내로부터 항변을 듣는다면, 그것은 아내만의 의견이 아니라 장모의 불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환경에 처한 남편은 아내에게만 인정받는 것으로는 좋은 남편이 될 수 없다.

이 문제는 마마보이와 비슷한 의존적 ‘마마걸’의 문제다. 딸을 결혼시키면 큰 고생을 시키는 거라고 여기면서 끝까지 내가 돌봐줄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 엄마, 내가 없으면 딸이 제대로 살기 어렵다고 착각하는 엄마들의 작품이다.

그런 엄마들은 딸이 결혼생활에서 닥친 문제들로 조금이라도 속상해하면 견디지를 못한다. 그래서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너는 죽어도 그 집 귀신이다”라며 참고 살라고 돌려 보내기는커녕 “뭬야? 감히 내 딸을?” 하면서 감싸고, 그때부터 사위로부터 지키는 보디가드 역할을 자처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밑지는 결혼이었다면서, 차라리 이혼하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한둘 본 게 아니다.

한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을 보니, 아내를 사랑하지만 장모와의 밀착 관계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이혼을 선택하게 된 한 남성의 사례가 등장한다. 아내를 장모에게서 독립시키고 좀 더 관계를 회복하도록 노력해 볼 수는 없었느냐는 의사의 말에 대답한 그 남성의 넋두리가 절망적이다.

“장모님과 아내는 한 몸이라 제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는 관계.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을 한 사람 감당하기도 힘든데, 한 몸처럼 움직이는 두 여자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마치 끈끈한 영적·경제적 공동체인 최순실과 박근혜를 가족과 그 누구도 파국에 이르기 전까지 떼어놓지 못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이런 관계는 남편의 역할을 대폭 축소시킨다. 장모가 이미 돌아가셨거나 멀리 살면 힘들어도 두 사람이 해결할 일인데, 매번 결정과 실행에 도움을 받으니 친정엄마가 절반은 남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마보이의 엄마가 아내 역할까지 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한편 마마보이는 아내가 잘 용납하지 않지만 마마걸은 남편 입장에서 오히려 편하게 생각할 부분이 있다. 하지만 매사에 장모의 뜻대로 일이 결정되면 잡음이 없고 편해서 방치하다가, 아내와 장모의 관계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딸의 가족과 친정 부모의 가족은 두 가족이지 한 가족이 아니다. 결혼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것이지, 부모의 언저리를 계속 맴도는 삶이 아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나면 부부가 한 몸이지, 엄마와 딸이 한 몸은 아니다. 영혼의 독립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다.

의존적 신앙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부모가 자기 믿음으로 자식을 천국에 데려가 줄 수 없다. 그와 같이 딸의 가정도 엄마가 어떻게 할 수가 없고, 손을 댈수록 흐트러지기가 쉽다.

여성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앞으로 이 문제는 더욱 심해질 수 있고, 관련된 문제로 고민하는 가정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결혼을 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가정에 주어진 독립성을 성숙하게 세워나가야 한다.

남편은 장인 장모를 공경하되 가장으로서 행동하고, 아내도 엄마와 친밀하되 남편보다 더 많은 일을 공유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딸은 엄마를, 엄마는 딸을 놓아주어야 한다.

2. 과도하게 밀착된 가족들의 비애

결혼 후 한동안 가족이라는 정체성과 정의 면에서 혼동을 겪는 시기가 있다. 다른 세계로 가면서도 알을 깨지 않으려는 습성 때문에 아내나 남편을 그저 ‘우리 가족’에 더해진 한 사람으로 인식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특히 분가하지 않고 부모님과 시댁에서 함께 살던 풍습 때문에, 그런 시절을 겪은 사람들이 만든 조언과 인식들의 잔재가 남아 있기도 하다.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개념이나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속담처럼 며느리를 정식 가족으로 취급하기를 유보하는 사고방식이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는 끈끈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삼형제가 나온다.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사실상 이혼하고 실직한 큰형과, 별 볼일 없는 영화감독이었다가 역시 쉬는 중인 막내가 청소용역 업체를 인수해 동업을 시작한다. 둘째만 꽤 큰 기업 부장이다.

동네 동창들과 거의 매일 저녁 술을 푸는 삼형제의 유대감은 너무 끈끈해서 아무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늘 싸우고 자기들끼리도 지긋지긋하다면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혼이 거의 확실시되는 큰형의 아내는 같은 동창으로 둘째와 동갑인 여자였는데, 이혼 사유 중 중대한 한 가지가 바로 그 과도한 형제들간의 끈끈함이었다.

동창이라 잘 이해하면서도, 우애가 좋으니 나쁠 것은 없는데도, 아내는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낀다. 형제간의 일이라면 열일 제쳐두는 사람인데, 아내인 자신은 만날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렇다고 만나지 말라 할 수도 없고, 억지로 떼어놓을 수도 없다. 관계를 흔들고 또 흔들면, 결국 떨어져 나가는 것은 형제가 아니라 자신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려난다.

실직이라는 고난을 돌파하는 일도 아내가 아니라 동생이랑 할 수밖에 없는 남자, 이혼 사유가 형제간의 우애라고 한다면 모두가 여자인 자신을 욕할 것 같은 기묘한 억울함이 그 자리를 더는 버틸 수 없게 한 것이다.

절반의 해피엔딩으로 이혼까지 결정되지는 않지만, 형제간의 문제는 미완으로 남았다. 드라마 작가도 어쩔 수 없는 물보다 진한 관계….

형제간의 우애가 깨지고 남보다 못한 가족도 많은 세태 속에서 원수처럼 지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어쩌면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일 정도로 참담하고 불완전한 결혼생활일 수 있다.

왜 이런 가족관계가 문제가 될까? 이는 물론 우선순위 문제다. 내 배우자이면서 누군가의 가족이면,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반길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딸이나 아들, 형제 자매이면서 또 나의 배우자이기도 한 사람은 끝내 내 마음의 빈자리를 다 채울 수 없는 법이다.

민수기 12장에서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와 결혼했다고 비방했는데, 미리암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병에 걸렸다.

이는 모세에게 부여된 권위를 무시하는 태도를 책망하시는 동시에, 결혼해서 한 몸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무리 가족이지만 참견할 수 없는 일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자기 며느리에게 그들의 풍습대로 새 남편을 찾아주고 독립시키는 진정한 이타적 배려와 사랑을 보여주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일들을 시공간의 차이가 현저한 오늘날 각기 다른 문화에 사는 각 나라 사람에게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부부의 독립성을 말씀하고 있다.

3. 부모를 ‘떠나서’ 이루는 가정이 진짜 가족

많은 부부들이 가족과 부모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간섭’은 결코 가족의 권리가 아니다. 갈라서는 부부들이라도, 두 사람만 따로 살게 두면 이혼율이 현저히 줄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결혼은 가족을 떠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그런즉 이와 같이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라(마 10:7-9)”.

한 육체가 된 둘을 나누지 못하는 것은 당사자들과 제3자, 그리고 가족이 모두 포함된다. 오늘날 크리스천 중에도 치명적 이유도 아닌 것으로 자녀를 이혼시키려 애쓰는 이들이 종종 있는데,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일이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 2:23-2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다(레 17:11). 부부는 생명을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누구보다 밀접한 사이이며, 둘은 새 생명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창조적 관계이다.

이토록 소중한 존재를 만난 아담에게 하나님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라고 말씀하신다. 24절은 ‘그러므로(therefore)’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배필이 될 여자를 만났으니까 부모를 떠나라는 거다.

여기서 ‘떠난다’는 것이 반드시 집을 나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며느리나 사위와 함께 살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모든 부부가 핵가족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제부터 모든 삶을 부부 위주로 살라는 것이며, 더는 부모에게 의존해 양육을 받는 존재가 아닌 독립된 새 공동체로 살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말씀을 지키면 손해 볼 일이 없다. 결혼한 사람의 가족은 배우자다. 한 육체인 배우자보다 가까운 가족은 둘 사이에 독이 될 뿐이다. 이 우선순위에 근거한 거리감의 조화가 진짜 행복한 그리스도의 가정을 완성하는 중요한 조건이 될 것이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30여 종
www.woogy68.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