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우리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며(요 17:3),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심판이고 멸망이다(살후 1:8).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은, 한 개념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안다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요일 4장)’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온갖 것을 다 알아도 ‘하나님 사랑’을 모르면, 그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예상 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두려우신 분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일가견을 피력하나, 하나님 사랑에 대해선 침묵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반드시 그리스도인 됨의 증거는 아니다. 그것은 모든 자연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적 속성이다. 죽음, 자연 재해에 대한 공포심에서 발원한 원시 종교로부터 계율적인 고등 종교에 이르기까지, 신에 대한 공포심은 모든 종교의 기저(基底, a basis)를 이룬다. 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 내면에서 저절로 발호(跋扈)되는 생득적인 종교성이다(롬 2:14-15).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면서도 단지 두려운 하나님만 알 뿐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면,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 사랑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지 않는 한, 그의 가호를 입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율법적 사랑이고 이것이 하나님 사랑을 왜곡시킨다.

반면 하나님 사랑에만 지나치게 경도(傾倒)된 이들도 있다. 그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 사랑’ 운운하며, 공의로우신 심판의 하나님에 대해선 일절 함구한다. 오히려 그것을 말하는 자들을 저급한 종교인으로 매도한다. 자연종교가들, 자유주의자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의 사랑 타령에는 ‘악에 분노하며(시 7:11)’,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는(고전 13:6)’ 진리의 사랑 같은 대목은 없다. 당연히 ‘공의’의 상징인 십자가 대속 같은 것도 그들의 관심 사안이 못 된다.

또 다른 한 부류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말하며, 어느 한쪽에 사경(斜頸)됨 없이 균형을 유지한다. 오랜 기독교 전통 속에서 제법 신학적 소양도 구비됐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같은 덕담이 일상 용어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그들의 모습들에서 일견 신앙과 삶의 일치를 보는듯 하다. 미국,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신앙의 문화화(文化化, enculturation)’인 경우가 많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 사랑’도, 그들이 행하는 신앙의 덕목들도 오랜 종교적 습관에 의해 몸에 밴 문화적 행위인 경우가 많으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사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인간 ‘지혜의 총람’이요 ‘철학의 본산’이라는 영예를 가진 그리스(Greece) 같은 나라를 한 번 보자. 신약성경 원전(原典)이 그들의 모국어로 기록되는 특권을 가졌을 뿐더러,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Agape)’라는 독립 명사가 따로 있을 정도로 성별된 언어를 가진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기엔 그들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으로 날마다 하나님 사랑의 절정을 경험하며 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야만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사도 바울에 말을 들어보라.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9-21).”

지구상에서 처음 ‘하나님’ 이름을 알았고, 하나님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받았다는 선민 이스라엘은 어땠는가? 그들 역시 율법 없는 이방인들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렘 4:22)”,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사 1:3).”

그들은 종교적인 전통과 관습엔 익숙했지만, ‘하나님 사랑’엔 무지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과 선지자를 수탁(受託)받았고, 메시아의 조상이라는 독점적인 사랑을 받았지만(말 1:2-3, 암 3:2),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말 1:2)”라고 반문 할 정도로 하나님 사랑에 무지했다.

그들은 남달리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외적 특권들을 전부 무(無)로 돌렸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 도다(요 8:19)”라고 하신 것도 그들의 무지에 대한 탄식이었다.

그들이 가진 하나님 개념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나 자연 종교인들의 신인식과 별반 다를 바 없었으며, 3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신 7:8, 사 63:9)’엔 깜깜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그 때문이다. 성경은 여러 사건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계시했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8)”.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오직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들은 ‘율법의 무지’와 ‘하나님 무지’를 동일시했다.

그들은 율법에만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나 있기에, 모든 인류 중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 자신 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율법을 받은 것을 하나님 사랑의 전부를 받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맞는’ 경우는 그들이 율법이 수여된 본래 목적대로 ‘율법을 법 있게 쓸 때(딤전 1:8)’이다. 즉 그들이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께로 피난하도록 하는 ‘율법의 몽학 선생(갈 3:24)’역할에 충실히 기댈 때, 율법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된다.

‘틀린’ 경우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비롯해 많은 유대인들이 그랬듯, 율법을 ‘법 있게 쓰지 못할 때’이다. 즉 율법으로 자신들의 의를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고 할 때 율법이 그들을 저주로 이끈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롬 3:20)” 때문이다. 성경이 ‘율법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 것은 바로 율법을 법 있게 쓸 때를 두고 한 말이다.

‘모세의 율법이 말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 것도 율법이 죄인을 절망시켜 그를 그리스도께로 이끈다는 점에서이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바울이 …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해 권하더라(행 28:23).”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는 엄격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십자가 강도, 삭개오 같은 죄인들에게는 무한한 자비를 나타내신 것에 대해 숙고해 보고자 한다.

이는 사람에 따라 적용을 달리하는 율법의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그것은 다만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그에게서 이루기 위함이다.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엄위한 율법적 공의로 그들의 죄를 드러내 그들을 절망시킨 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인간은 율법에 절망하지 않는 한 결코 그리스도께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이미 자기 양심의 율법으로 정죄를 받아(롬 2:14-15) 죄의식에 찌든 자들에게는 율법의 정죄가 필요치 않기에, 죄사함을 주시는 그리스도 자비로 품으셨던 것이다(요 8:3-11).

그리스도께로 갈 때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이(요 15:26)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알게 하신다(롬 5:5).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 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길이 그 어디에도 없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