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펜 남자 잉크 종이 연필 손 손가락 블루 셔츠 책상 쓰다 사업 사무실 writing write 글 김도인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정의할 때, 그 사람을 인격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설교자에게는 한 가지 더 평가 항목이 있다. 영성이다. 즉 설교자는 인격과 영성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설교자란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주어진 자다. 결국 설교자를 규정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설교다.

설교는 인격이다. 설교자는 설교자의 삶, 영성, 지성, 감성 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설교자인가를 아는 것은 설교를 보면 알 수 있다.

설교자는 설교로 말해야 한다. 설교를 말한다는 것은 글로 말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는 설교자가 자신이 쓴 글로 설교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말의 설교’가 아니라 ‘글의 설교’다

설교 세미나에 가서 설교를 배울 때가 있었다. 그 때 배운 설교는 말로 하는 설교였다. 당시 설교 세미나는 말로 하는 설교가 추세였다. 이 추세는 지금도 흐름이 꺾이지 않은 것 같다.

제가 하는 세미나에 말로 하는 세미나를 하던 설교자들이 종종 온다. 그렇게 오래 설교를 배웠는데, 설교를 못해도 너무 못한다. 설교는 말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글로 배워야 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말로만 하는 설교는 결국 자신의 설교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설교자는 설교를 많이 할수록 성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오래 설교를 해도 성정하지 못한다. 설교를 말로 배웠기 때문이다.

설교는 글로 배워야 한다. 글로 설교를 배우려면 무척 힘들다. 아니 힘든 정도가 아니라, 전쟁터와 같다. 설교가 성장하려면 글로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설교의 성장은 안락함 속에 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 속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 한 편을 글로 써서 만들려면, 진액을 짜는 수고가 따른다. 하지만 말로 하는 설교는 진액이 아니라서, 짜내는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공식에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이런 세미나 여전히 설교자들이 엄청 많이 몰린다는 것이다.

‘아트설교연구원’은 ‘설교 글’ 배우는 곳이다

설교는 글이다. 나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글을 엄청 강조한다. ‘아트설교연구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진행한다. 그 수업 중, 독서 한 시간 전후 외에는 종일 글을 쓰고 쓴 글을 발표한다.

글을 쓰다 보면 설교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감각을 갖는다. 글을 쓰면 설교 성장이 KTX 같다. 그 결과 설교자들이 행복한 설교, 행복한 목회를 한다.

‘설교는 말이다’라는 흐름이 대세인 목회 분위기에서, ‘설교는 글이다’라고 이야기하면 설교자들이 소 닭 보듯 했다. 소 닭 보듯 하면 괜찮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고 구박받았다.

더 치욕적인 것은 수준 낮은 사람 취급을 받았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있었는데, 성경 해석을 강조하는 목사들의 반응이다.

‘성경 해석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라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불쌍한 눈을 쳐다본다.

그럼 나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글도 쓰지 못하면서….’

설교는 성경 연구가 아니다. 성경 연구를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와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를 들려지도록 하는 것이다. 설교라는 측면만 보면 성경 해석 못지않게 글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성경 해석을 놀랍게 했는데 글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것은 완벽한 설교인가?

이것이 한국교회 설교의 흐름이다.

지금 교인들은 ‘쓰리 포인트(Three Point)’ 설교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 대부분 설교자는 쓰리 포인트로 설교를 한다. 왜 여전히 쓰리 포인트로 밖에 설교할 수 없는가? 글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 포인트(One Point)로 설교를 할 수 있으려면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글을 쓸 줄 모르면, 원 포인트가 거의 불가능하다. 아직까지 글이 받쳐주지 않는데, 원포인트 설교를 하는 설교자를 본 적이 없다.

말로 설교를 배운 설교자는, 글로 설교를 할 수 없다. 글로 설교를 배운 설교자는 말로 하는 설교도 할 수 있다. 어떻게 설교하는 것을 배울 것인가? 글을 쓸 줄 알 때 가능해진다.

팀 켈러 세일러문 포즈
▲팀 켈러 목사(뉴욕 리디머장로교회 설립, CTC 이사장. ⓒ크리스천투데이 DB
기가 막히게 성경 해석을 하는 설교자! 기가 막히게 글을 쓰는 설교자!

필자는 2019년 6월 말 회원들과 팀 켈러 목사의 책으로 ‘논증 세미나’를 했다. 팀 켈러의 책을 연구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는 생각을 오랜 만에 했다.

내용은 탁월하다. 책 이해가 아주 어려웠다. 이는 팀 켈러의 글의 문제일까? 번역의 문제일까?

결론은 알 수 없다. 필자가 아는 것은 글을 이해하기 무척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참여했던 설교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글을 이해하는 데 힘들었다. 몇 번 읽으면 이해가 되었다. 하루가 지나면 다시 읽어야 했다. 결국 글을 이해하는 데 시간을 써야 했다.

팀 켈러의 책을 연구하면서 놀랐다. 팀 켈러를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무척 좋아한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팀 켈러는 성경 해석과 세상을 바라보는 상황에 대한 통찰력이 남달랐다. 또한 팀 켈러는 글을 쓸 때 신학적, 성경적으로 쓰지 않는다. 일상에서 끌고 와 글을 썼는데 이는 제게 놀라움을 주었다.

나아가 탁월한 논증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설명에 논증을 10개 이상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엄청난 독서량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단점이 있었다. 글이다. 글이 어렵다. 다른 어려움이 아니라, 이해하기 힘든 어려움이다. 그렇다고 글쓰기의 기본인 설명, 논증, 적용으로 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이해하기 힘든 글이 그의 치명적 단점이라고 생각했다. 이 단점은 우리나라 독자들을 멀리 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의 많은 설교자들이 팀 켈러의 책을 읽고 열광하는 것이다.

이는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글을 중요시하지 않고 내용만 중요시하는 것이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제가 글을 강조하는 것은 세상 어떤 조직이든, 세상 흐름을 놓치면 그 조직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미 한국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따라 잡지 못하고 뒤로 확 밀려버렸다.

글에서도 세상은 이미 내용 중시에서 글과 구성 중시로 넘어갔다. 이제 사람들은 글과 구성이 좋지 않은 설교는 듣지 못한다. 이는 작금의 교회의 현실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대와 맞지 않는 설교, 시대를 무시한 설교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기대 언덕이 되어줄 수 없다.

필자가 팀 켈러의 설교를 분석한 뒤 내린 결론은 단순하다. ‘더 이상 읽지 않겠다’. 팀 켈러는 듣는 입장에서라면 좋다. 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힘들다. 더 이상 읽지 않겠다는 이유는 통찰력 있고 이해도 잘 되는 인문학 책을 읽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팀 켈러의 책은 단편적으로 글을 중시하는 일반 작가와 기독교 작가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제가 알기에 팀 켈러가 C. S. 루이스의 책을 거의 읽었다고 들었다.

필자는 C. S. 루이스의 글의 경우, 이해하는데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비춰봤을 때, 팀 켈러가 들려지는 글쓰기를 하지 않거나 미국과 한국의 정황이 다르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세상은 콘텐츠보다 글에 관심이 많다. ‘구성의 시대’에, 강단은 글보다 내용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필자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설교의 구성과 글의 구성이다. 콘텐츠가 갖춰지면, 다음으로 구성이 중요하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구성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책 <설교는 인문학이다>를 출간한 이유 중 하나가 ‘세상에 익숙한 교인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였다. 세상에 익숙한 교인들은 글을 중시한다.

최근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관심을 끌었다. 김혜자 권사가 백상예술대상에서 <눈이 부시게>의 내용 중 한 토막을 이야기해 화제가 됐었다. 뒤이어 <대화의 희열2>에서 배우 이정은 씨가 <눈이 부시게>의 한 토막을 또 이야기했다.

두 배우가 말을 하게 된 것은 글이 명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잘난 거랑 잘 사는 거랑 다른 게 뭔지 알아? 잘난 것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나 여기 살아있다. 나보고 다른 못난 놈들 힘내라’, 이게 진짜 잘 사는 거야. 잘 난 것은 타고나면 되지만, 잘 사는 건 너 하기 나름.”

설교는 글이 좋지 않은데도, 재진술 해석으로 넘쳐난다. 안 해도 될 말로 도배된다. 배우 이정은 씨가 <눈이 부시게>를 인용해 한 말은 사람들이 퍼다 나른다.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통찰력 있는 해석에 목이 매여 있다. 동시에 설교자는 명문장을 쓸 수 있는 글쓰기에 목이 말라야 한다. 결국 이 둘을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도 속히!

글쓰기의 가치를 모르면 글을 무시하는 것이 정상이다

설교자들은 글의 가치를 잘 모르는 듯하다. 글을 쓰지 못해도 설교를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설교는 글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확신한다. 그 결과 글은 세상 작가들의 전유물로 여긴다.

글은 세상 작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독교 작가인 설교자의 전유물이기도 하다. 설교자만큼 글을 많이 쓰는 작가는 없다. 일반 소설가보다 글을 더 많이 쓸 수밖에 없는 최적의 환경이다.

소설가들은 몇 년에 한 권 책을 출간한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소설가 정유정이 2019년 소설 <진이, 지니>를 출간했다. 이 소설은 3년 만에 나왔다.

설교자가 일주일에 10여 편을 설교하는데, 1주일이면 50페이지를 쓰게 된다. 한 달이면 200페이지를 쓴다. 이 분량이면 소설 한 편 분량이다.

즉 설교자는 한 달이면 소설 한 편을 출간할 수 있는 분량의 글을 쓴다. 그러니 세상 최고의 작가는 설교자다.

하지만 세상에서 설교자를 작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작가들이 설교자들의 글을 보면 뭐라고 할 것인가?

작가라고 말하기는커녕 작가 반열에도 넣기 싫어할 정도다. 설교자는 글을 쓰는데 글을 쓸 줄 모르는 작가의 부류다.

그럼 설교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야, 우리는 하나님만을 위해서 존재해! 세상의 기준에 끼워 맞추지 마!’

그럼 전도는 뭣하러 하는가? 왜 목사가 되려면 신학대학원을 졸업시키는가? 그냥 초등학교 나온 사람으로 세우지!

교회는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통로다. 어떤 것이든 영향력을 끼쳐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 글일 써야 영향력을 미친다. <눈이 부시게>처럼 명문장으로 뭇 사람들의 말에 오르내릴 정도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다.

설교자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작가가 있는가? 이런 현상에 설교 현장에서는 넘쳐난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설교자들과 대화할 때마다 글의 무용론을 말한다. 글쓰기는 설교자에게 해당 사항이 아니라는 듯 말한다. 이는 필자 또한 다르지 않았다. 누가 글을 잘 쓴다고 하면 이렇게 말했다.

‘글이 뭐가 중요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그리고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런 무지의 소치가 3년 독서, 1,200권 읽은 다음에 산산조각나게 깨졌다. 이때 비로소 글이 보였기 때문이다. 글이 뭔지 보이지 않으니 오직 성경 해석만 강조했고 성경 해석을 설교로 했다. 그것이 최고라고 외쳤었다.

글이 중요함을 깨달은 뒤부터, 글쓰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더욱 절감하고 있다. 중요함을 알기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글을 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아트설교연구원’ 모임에서는 종일 글을 쓴다. 그렇게 성경 해석으로 설교를 해도 변하지 않던 설교자들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엄청 변한다.

‘사람이 달라진다. 글이 달라진다. 설교가 달라진다. 목회가 달라진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지금은 목회가 안 된다고 한다.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목사라고 생각은 해 보지 않는가? 되는 사람은 된다. 설교 하나만으로도 목회가 되는 목사도 꽤 있다.

설교자들을 가르쳐 본 경험에 의하면, 그 설교자의 삶을 들여다봐야 한다. 목회가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 삶을 산다. 시간을 바람과 같이 날려버린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일주일이 확 지나친다. 지적 성장과 영적 성장을 꾀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목회가 되는 사람은 그 삶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하루 하루를 감사함으로 치열하게 산다.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은 삶을 덤으로 살기에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산다. 이런 사람은 목회가 된다.

글만큼 치유 효과가 큰 것도 없다. 글만큼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큰 것도 없다. 글만큼 성장이 큰 것도 없다.

글을 무시하는 것은 글의 가치와 능력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글의 가치와 힘을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이 교회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