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에는 죄 처리 방식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죄를 사했다(사 6:7), 죄를 깨끗이 했다(히 9:14, 벧후 1:9, 요일 1:9), 죄를 도말했다(사 44:22), 죄를 가려준다(롬 4:7), 죄를 인정치 아니한다(롬 4:8), 죄를 멀리 옮겼다(시 103:12), 죄를 용서했다(엡 4:32), 죄를 간과했다(롬 3:25)등 다채롭다.

죄 처리에 대한 표현 양식들은 다양하지만, 이 모두를 한 마디로 압축하면 ‘죄를 사했다(롬 4:7)’이다.

바꿔 말하면, ‘죄사함(remission)’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죄 처리 방식이라는 말이기도 하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과 우리의 연약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선 로마서 4장 7-8절에 나타난 ‘죄사함’, ‘죄의 가리움’, ‘죄를 인정치 아니함’에 한정지어 생각하고자 한다. 셋은 모두 동일한 의미이며, 뒤의 둘은 앞의 ‘죄사함’을 확장, 변용으로 볼 수 있다.

‘죄사함’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통해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셨다. 성경이 ‘구속’과 ‘죄사함’을 동일시한 이유도 여기 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그리고 ‘구속’을 통한 ‘죄사함’은 철저히 하나님의 공의를 반영한다. 당사자가 하든 누가 대신하든 ‘죄값 지불(구속, 救贖)’이 선행돼야만 ‘죄사함’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구속을 통한 죄사함’은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다 포괄하지만, 그것은 죄에 대한 결과론적 해결책이지 죄를 안 짓도록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

구속을 통한 ‘죄사함’이 인간을 타락 전 무흠한 상태로 돌려놓을 순 있지만 범죄 가능성까지는 차단할 수 없다. 비유컨대 특정 질병을 고쳤다 해서, 그것이 다시는 그 질병에 걸리지 않게 담보해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죄사함’은 풍겨내는 뉘앙스 그대로, 죄를 지은 자에게 필요하며 반복성을 함의한다. 예수님이 형제가 잘못할 때 “70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 18:22)”고 하신 것은 ‘죄사함’의 반복성을 말한 것이다. ‘70번씩 일곱 번’이 상징하듯, 죄인은 끝없이 하나님께 잘못하며 끝없이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반복성을 담지한 ‘죄사함’은 완전한 죄의 해결책이 못되기에, 하나님은 ‘의로 여기심’을 첨가하여 완전한 ‘칭의’를 주셨다. 웨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해설서 저자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는 “우리의 칭의는 ①우리의 죄를 용서하심, ②우리를 의로 여기심 둘로 구성됐다”고 한 것은 옳다.

성경 역시 구속의 궁극적인 목표를 ‘죄사함’을 넘어 ‘칭의’에 둔다. 무흠의 상태로 돌려놓는 죄사함만으로는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이룰 수 없기에, ‘의로 여기심’을 입혀 완전한 칭의에 까지 이르도록 해 주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죄의 가리움을 받음

“죄의 가리움을 받음(sins are covered, 롬 4:7)‘은 ‘죄사함’의 다른 표현이다. ‘죄사함’이 그랬듯, ‘죄의 가리움을 받음’ 역시 죄의 가능성까지 막아주는 원천적 죄처리 방식이 아니다.

‘죄가 가려지는’ 방식으로는 원천적 죄처리가 불가능하다. 주지하듯 ‘가려준다’는 뉘앙스 자체가 근원적인 해결책이라는 느낌보다는 미봉책(彌縫策)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가려진 것이 걷혀질 때, 해결되지 못한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약 무엇을 완벽하게 처리하려 했다면, 처음부터 ‘가리우는’ 방식이 동원되지 않았을 것이다. ‘죄를 가리우는’ 방식 자체가 죄에 대한 온전한 해결의 불가를 시사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범죄 가능성을 가진 인간의 연약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완전책이 아닌 ‘가려주는’ 미봉책을 취할 수밖에 없게 했다.

태초에 에덴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죄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 그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었던 것도(창 3:21) 일종의 미봉책이다. 하나님은 그의 죄의 수치는 그대로 둔 채, 가죽 옷으로 그것을 가려주었을 뿐이다. 이는 장차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방식을 예시한 것이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는 말씀은 ‘죄의 가리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허물을 덮어준다(covers over an offense, 잠 17:9)’는 것은 허물을 원천적으로 해결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허물을 드러나지 않게 가려줌’을 뜻한다.

이어 나오는 ‘허물을 거듭 말한다’는 상반된 내용이 ‘죄를 가려준다’는 의미를 조명한다. 허물이 드러나지 않았음은 누군가가 그것을 가려줬기 때문이고, 그 누군가가 가려줌을 해제하는 순간 허물은 그대로 노출된다. ‘가려짐’이 죄의 원천적인 해결 방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미봉책에 불과해 보이는 ‘죄의 가리움’이 완벽하게 율법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도록해 줌은 ‘죄를 가려준 것’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 그의 죄의 수치를 완벽하게 가려주었듯이, 그리스도의 의(義)는 죄의 수치를 완벽하게 가려준다. 의(義)로 가려진 그 안에는 여전히 부끄러운 수치가 있음에도 그것을 가린 그리스도의 의(義)가 그를 완전케 했다.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죄를 인정치 아니함

‘죄를 인정치 아니함’ 역시 ‘죄사함’의 다른 표현이다. 이는 죄가 없는데 죄를 인정치 아니한다는 말이 아닌, 뉘앙스 그대로 죄가 있음에도 죄를 인정치 아니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죄에 무감하여 죄를 방관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죄를 떠날 수 없는 부패한 죄인에게 ‘죄사함’을 주기위한 하나님의 고육지책이다.

그러나 죄가 있음에도 ‘죄를 인정치 아니하려면’ 반드시 새로운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에도, 세상 일반의 공도(公道)에도 반하기에 비난과 공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믿는다는 이유로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해주는 ‘이신칭의’교리가 이제껏 계몽주의자들, 신율주의자들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아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비난을 피하기 위해 ‘칭의’를 법정적 선언(judicial declaration)으로 규정한 바울과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를 위시해, 루터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언제나 하나님의 법정에 호소했다.

마스터스 세미너리(Master's University and Seminary)의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 역시 “누가 속속들이 죄가 없다면 그는 자체로 완전하기에 구태어 법적으로 그를 의롭다고 선포해 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의한 죄인을 의롭다 해 주는 ’이신칭의‘는 언제나 법정에 호소하여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에게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다’고 인정해 준다. 이는 그의 법정적 선언(forensic declaration)이며 이 법정적 선언은 ‘율법’ 외에 한 하나님의 법 곧, ‘믿음의 법’에 근거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1-27).”

‘율법(the law)’의 제정자가 하나님이듯이 ‘믿음의 법(the law of faith)’의 제정자도 하나님이시다.

‘죄사함’, ‘죄를 가려줌’, ‘죄를 인정치 아니함’은 모두 ‘죄사함’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들은 기독교 입문자들에게 시여되는 단회적인 은혜일 뿐더러,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어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죄에 노출된 성도들에게 입혀주시는 반복적인 은혜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연약성으로 인해 반복적인 ‘죄사함’의 긍휼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입은 죄사함과 의의 완전성을 손상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연약성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만을 더욱 의지하도록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