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6차
▲최더함 박사가 주제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모든 게 넘쳐나는 맥시멀(maximal)한 세상이다. 세속주의(secularism)의 화려함과 요란함은 끝을 모른다. 이러한 때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더 얻어야 하는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이다. 실제로 집안에 있는 옷의 70%는 입지 않는 옷들이라 한다.

‘만능 디렉터 정구호’ 하면 기독교계에선 아직 생소한 인물이다. 그러나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하면 모두 ‘아-’하고 탄성을 지을 것이다. 그의 놀라운 크리에이터로서의 능력은 지금도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과 유명 브랜드의 행사장에서 무제한 발휘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창의적 기획력의 비결을 묻자, “단지 늘어놓은 것들을 정리하는 미니멀리스트(Minimalist)의 지혜일 뿐”이라 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계속 판을 뒤바꾸며 서로 주도하다가 밀려났다 하는 반복의 세계이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많이 누리려 한 과거의 습관과 형태는 이제는 더 이상 창의적이지 않는 일들이다.

정구호에겐 사무실이 따로 없다. 대신에 정구호의 사무실은 노트북이다. 그가 노트북과 함께 작업하는 곳이 곧 그의 사무실이다. 그와 함께 일하는 모든 직원들은 재택근무자들이다.

기존의 사고를 가진 사람에겐 이런 패턴은 상상을 초월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미니멀리스트들의 등장은 점점 득세하고 주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세태요 시대적 조류라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들을 읽어내는 것이 분별력이다.

교회사에서도 탁월한 시대적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변호하고 전파한 이들이 많다. 그들은 대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의 현안들과 사상들과 가치관들을 정확히 읽어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 프랑스 리옹의 주교를 지냈던 이레아니우스(130-200), 삼위일체라는 라틴어 용어의 제조자인 터툴리안(160-22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5-220), ‘헥사플라’의 저자 오리게누스(185-254), 아리우스주의의 추방자인 아타나시우스(290-373), 그리고 ‘은혜 박사’이자 일명 어거스틴으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 등 초대교회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변증가들과 신학자들 모두 시대의 분별하고 탁월한 지혜를 교회에 제공한 인물들이다.

그런 기초가 있었기에 중세의 보에티우스(480-524)와 스코투스(800-877)와 안셀무스(1033-1109)가 나타나 시대의 요구에 대답했고, 마침내 종교개혁가들을 낳고 칼빈으로 하여금 기독교 신학의 총합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교회 안에 시대를 거꾸로 사는 이들이 있다. 미니멀이 아니라 되레 맥시멀의 세계로 나아가, 드디어 혼돈(카오스)으로 일단의 무지한 무리를 끌고 가고자 하는 자칭 지도자들이 있다.

이들의 첫째 과오는 늘어진 것들을 정리하지 않고 오히려 흐트려놓는 것이다. 한 번 흐트러지면 수습이 곤란한 시대다. 콩이 담긴 그릇을 엎어버리는 일은 간단해도, 다시 쓸어 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들의 두 번째 과오는 자신들의 무지에서 기인한다. 신학적 무지는 반드시 잘못된 신앙 행위로 이어진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이다. 교통법규를 무시하고 운전을 할 수 없듯이, 교리를 모르거나 무시하면 그는 반기독교인이다.

세상 사람들도 법을 지켜야 하듯이, 기독교인은 무엇보다 교리라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교리에 대한 무지와 경시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평가는 옳은 지적이다.

종교개혁으로 새로 형성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믿고 따른다. 이에 의하면 이 세상에 세워지는 모든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따라 세워지고 폐하여지고 흥망성쇠를 이룬다.

그러므로 한 통치자가 ‘내가 보기에 악한 군주’라고 생각될지라도 그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를 두고 함부로 퇴위를 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탈하는 범죄적 행위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 23장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온 세상에서 최고의 주님이자 왕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공공의 선을 위해서, 하나님 아래에 국가의 위정자들을 세우고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칼의 권세로 그들을 무장시켜서 선한 자들을 보호하고 격려하며,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하게 하셨다(1항)”.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세금과 그 밖의 공과금을 납부하고 그들의 합법적인 명령을 따르고 양심대로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국민 된 의무이다. 위정자가 신앙이 없거나 우리와 다른 종교를 가졌다고 하여 정당하고 적법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불복종해선 안 된다.(중략) 어떤 다른 구실을 붙이더라도 위정자에게 주어진 통치권이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4항)”.

우리 속담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했듯이, 한 사람의 무지와 잘못된 선택으로 교회를 혼돈의 세계로 몰아넣고 잘못된 교리를 선동하는 일은 백해무익한 일이다.

교회사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런 선동가들은 본질적으로 미니멀한 사람이 아닌 것인가? 작고 세밀하고 소중함을 추구하는 겸손의 미덕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꽁꽁 묶어두는 지혜자는 될 수 없는 것인가?

역사상에서 자신을 높이거나 떠벌리는 사람 치고, 천국 백성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적은 없다.

최더함 박사(Th.D. 역사신학. 개혁신학포럼 총괄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