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영성이다
습관이 영성이다

제임스 K. A. 스미스 | 박세혁 역 | 비아토르 | 329쪽 | 15,000원

오래 전 유명한 교회의 목회자 세미나에 참여했다가 적잖이 실망한 적이 있다.

평신도 훈련에 관한 세미나였는데, 대부분의 시간이 소그룹을 효과적으로 인도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고, 경건 훈련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나 실천은 찾기 어려웠다. 그저 소그룹을 잘 이끌어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참여한 목회자들은 대형교회의 건물과 명성에 압도당하면서 부푼 꿈을 안고 각자 사역지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 때부터 평신도 훈련에 대한 갈증과 공허함이 있었는데, 책을 읽는 동안 잊었던 그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났고 책은 나의 오랜 질문에 답을 주었다.

책의 화두는 ‘사람들은 배우고 아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오래 전 경건 훈련에 힘썼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알려졌던 바이다.

4-5세기부터 사막으로 들어간 수도사들은 그들의 경건 훈련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수도생활을 통해 감정이 통제되지 않으면, 지식으로 습득한 경건의 내용들이 한순간에 붕괴되는 것을 그들은 수없이 경험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 있도록 지으셨기에,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쉴 수 없습니다(23쪽)”라고 말한 이유도 맥을 같이 한다.

마음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경건은 결국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기 일쑤이고,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다.

저자 스미스는 인간에게 있어 이성과 지식보다 마음과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열망을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제자도가 심중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핵심을 ‘예배’에서 찾는다.

예배를 통해 거룩한 습관이 마음 깊은 곳에 안착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책의 골자여서, 책 제목을 <예배란 무엇인가>라고 붙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먼저 ‘제자도’에 대해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제자도는 우리 마음을 정렬하는 방식,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거기에 주목하는 방식(14쪽)”이다. 결국 제자도는 앎과 믿음보다 열망과 갈망의 문제인 셈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성의 제자도’를 주장하고, ‘생각’을 통해 거룩함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지주의적’ 사고(18쪽)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도로 아는 지식은 주민이 아니라 구경꾼의 지식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외부인이 마을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나는 다르게 배웠기 때문에 다르게 이 마을을 알고 있다(218쪽)”, “결국 교육의 핵심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아닐까(219쪽)?”

“우리는 무의식, 즉 지배하는 이야기들의 저장소를 잘 돌보아야 한다. 당신이 예배하는 것을 조심하라.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바를 결정하고, 따라서 당신이 만드는 바와 당신이 일하는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280쪽)”, “당신이 사랑하는 바가 곧 당신이다(276쪽)”.

분명 사람의 모든 지식이 삶의 방식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많이 생각하지 않았거나 더 많은 정보를 얻지 못해서가 아니고, 인간은 그저 생각하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 정서, 마음과 같은 것을 반지성주의로 치부해 온 오랜 관습에 젖어 살았다. 그것은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론에 기댄 인간 이해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사상을 담는 고정된 그릇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역동적 피조물”임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인간은 무언가를 갈망하고 원하는 에로스적 피조물이다(25쪽). 인간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무언가가 자신의 정체인 셈이다.

경건도 마찬가지다. 지성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의 창조적 목적에 맞게 설정되어야, 경건한 삶이 가능하다. 의식보다 더 근원적인 성향과 지향이 하나님(텔로스)을 갈망해야 한다.

이런 상태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계속되는 모방과 실천을 통해 우리 안에 내재되는 ‘제2의 천성(38쪽)’을 형성해야 가능하다. 제자도는 정보의 습득(information)이 아니라, 재형성(reformation)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리셋(reset)하는 것이다(39쪽).

제임스 스미스 교수
▲저자 제임스 스미스 교수(미국 칼빈대). ⓒ크리스천투데이 DB
스미스는 우리의 마음을 재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예배에서 찾는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지향을 재조정하시고, 우리 욕망을 재형성하시는 무대다. 예배는 그저 우리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시는 공간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재훈련하시는 체육관이기에 제자도의 핵심이다(125쪽)”.

우리는 예배를 통해 창조 목적에 맞는 존재가 되어가므로 예배의 목적은 “창조 명령의 갱신(140쪽)”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예배는 우리의 성품을 형성하고 맘몬 중심의 세상가치에 대항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나님은 반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드라마(예배)로 초대하시고, 우리가 복음의 드라마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의 성품을 새롭게 형성하신다(155쪽).

스미스는 제자도의 핵심인 예배에 관해 두 가지 형태를 말한다. 첫째, 예배를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향식 예배 개념이다. 우리가 예배를 올려드린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예배를 ‘우리의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향식 예배는 자연히 진실한 마음을 강조하고 위선을 배제하는데 중점을 두게 되어(121쪽), 항상 새로운 것, 참신한 것을 찾게 된다. 진정성을 보여 줄 참신한 예배 형식을 찾다 보니, 전통 예배보다는 현대식의 ‘구도자 예배’와 같은 새로운 형식을 찾는다.

더 웅장한 찬양대와 오케스트라, 조명과 무대 장치 등에 막대한 예산과 힘을 쏟아 붓는다. 이런 상향식 예배에서는 예배를 행하는 주된 행위자가 사람이 되기 쉽다(124쪽).

둘째는 위로부터 아래로 이루어지는 하향식 예배다. 칼빈은 성례전이 “엄밀히 말해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예배 시간에 우리가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말씀을 듣는 것 같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예배하도록 이끄신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그 분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일하신다. 하향식 예배에서는 전통적 예배 형식이 구태의연한 반복 행위가 아니라, 매 순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예배자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일주일 내내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암묵적으로 가르치는 세속 예전으로부터(155쪽), 우리의 심령을 재조정하시는 하나님의 활동 시간이다.

“예배는 일차적으로 혁신적 창의성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지혜로운 수용과 신실한 반복을 위한 공간이다(126쪽)”, “반복은 하나님이 우리 습관을 바로잡으시는 방식이다. 우리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129쪽)”.

스미스는 예배에 대한 시각을 상향식이 아니라 하향식으로 바꾸라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자녀들도 기독교 예배 전통에 자랑스럽게 편입될 수 있다.

“형성적 청소년 사역에서는 젊은이들이 더 폭넓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성령의 리듬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젊은이들에게 기도와 주목, 분별, 금식, 예배라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훈련을 소개하는 것은 그들에게 은총의 강으로 들어갈 뗏목을 마련해 주는 것과 같다(239쪽)”.

오늘날 우리들은 “‘공교회적’ 기독교 유산이라는 풍성한 보물 곧 수천 년 역사 가운데 성령이 신실하게 교회를 이끌어 오신 과정을 망각하고 무시한다. 대신 우리는 신앙이라는 바퀴를 재 발명하려고 애쓰느라 바퀴가 기우뚱할 때가 많다(221쪽)”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스미스는 제자도의 핵심이 되는 예배를 주일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예배를 확장하여 삶의 방식으로 만든다(180쪽). 그래서 가정이 하나님의 가정(교회 공동체) 안에 자리 잡게 하고, 가족을 교회라는 ‘첫 번째 가정’ 안에 두어서 혈연관계가 상대화되게 한다.

교회는 혈연 관계보다 그리스도의 피가 더 우선하는 공동체, 자연적 가정이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는 공동체다(185쪽). 이렇듯 제자도의 중심에 있는 예배는 가정과 다음 세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예전이 된다.

스미스는 그렇다고 인간의 지성적 측면을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일(고후 10:5)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동의한다(17쪽).

그런데 그의 요점은 우리가 아무리 많이 생각하고 그 생각에 거룩한 것들을 채워도,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저절로 변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니다. 결국 내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것, 그래서 내 몸이 저절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내 자신’이다. 제자도의 지성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듣는 설교에 만족하는 한국교회가 되짚어야 할 대목이다.

결국 스미스에게는 우리의 지성뿐 아니라 마음과 감정이 주를 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제자도의 최종 지점이다. 그리고 그 지점까지 갈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책 전반을 통해 전개하고 있는 ‘예배’다.

예배를 하향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도, 예배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 우리 교회들이 성찰해야 할 내용이다. 삶의 변화는 전인적 변화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지정의가 모두 오염되었다. 지성의 회복만으로 전인적인 치유를 이룰 수 없다는 점에서 스미스의 논지는 타당하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지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미스가 말하는 하향식 예배도 성도들의 이해가 뒷받침될 때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역동적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중한
크리스찬북뉴스 서평, 다빈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