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교회 백성훈
▲발음발성 아카데미 주요 참석자들 모습.
“성경적 공동체의 본질, 리더 위한 공동체 아닌 복음 위한 공동체”

기독교 내에 다양한 종교관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네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믿는다’ 로 정의할 수 있는 ‘이신론’이다. 이신론은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맞지만, 그 후에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 인생은 우리가 주관하여 사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믿지만 동행과 임재는 믿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도 믿는다’ 로 정의할 수 있는 ‘다신론’이다. 다신론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많은 신들 중 하나님도 존재한다는 논리다. 성경에도 다양한 이방신들이 거론되고 이방신을 믿는 이교도들이 자신들의 신도 믿지만, 하나님도 믿는다고 말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물론 자신들의 신이 더 위대하다고 말한다. 그 중에 하나님도 믿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으로 믿는다’로 정의할 수 있는 ‘범신론’이다. 자연 만물이 각각 신의 형상이라 믿는다. 그래서 하늘도 신이고, 바다도 신이고, 산도 신이다. 기독교와 결합해서 모든 자연 만물을 하나님으로 믿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부분 다신론과 범신론이 결합되는 경우가 많다.

네 번째는 ‘하나님만 믿는다’로 정의할 수 있는 ‘유일신론’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고, 다른 것으로 대신할수 없음을 믿는다. 이 신앙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이 땅의 창조자임을 믿어야 한다. 지금부터 필자는 이 신앙으로 ‘오직 믿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믿기 위해, 대가 지불과 우선순위의 헌신 필요”

‘오직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감당해야 할 신앙이 있다. 마치 맛집에 가면 줄을 서야 하는 것과 같다. 바로 대가 지불과 우선순위라는 헌신이다.

하나님만 믿기에, 하나님만을 위해 우리는 다른 세상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은 언제나 세상의 유혹 속에서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가 있고, 우선순위를 양보하지 말아야 할 때가 생긴다.

그런데 이런 ‘오직 믿음’을 무너뜨리는 논리가 있다. 바로 ‘적당히’라는 논리다. 뭐든지 적당한 게 좋다는 말은 큰 사회적 공감대를 가진다. 하지만 직장에서 적당히 일하고 연애할 때 적당히 사랑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신앙생활을 취미생활로 여기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 극단적인 믿음을 요청한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은 적당한 믿음으로 불가능하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계속 생각하라!”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히브리서를 살펴보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원문에는 ‘깊이’라는 말이 없다. ‘카타노-에사테’라는 원어가 ‘계속해서 고려하라, 계속해서 생각하라’는 명령어로 되어 있다. 즉 ‘깊이’라는 말은 ‘계속’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지금도 교회 안에 신앙이 흔들리고 또 흔드는 사람들이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 3:12)” .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는다는 말은, 교회 성도들 중 믿음 없이 다니면서 믿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는 교회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들의 방해에 속수무책 당하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날이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신앙을 지켜야 할까? 다음 구절인 13절을 보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는 말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허락되는 한 매일 서로 권면하라는 뜻으로, 그래야 속수무책 당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게 된다는 것이다.

서로 권면할 내용은 바로 예수님을 ‘계속’ 생각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누가 힘들어하면 예수를 생각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위로하기 위한 세상의 수다가 주인이 되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를 생각하고 있어야 예수를 말할수 있다.

이름없는교회 백성훈
▲예배 빌드업 컨퍼런스 단체사진.
“예수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신앙은, 애매하고 미지근한 신앙을 만든다”

얼마전 영화 <그린북>을 봤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 흑인이지만 천재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당시 차별이 더 심한 미국 남부지역 투어를 결정한다.

투어 기간 운전사로 고용한 사람은 역시 인종차별의 태도를 가진 백인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투어를 다니며 겪게 되는 일들을 영화로 만든 것으로, 실화를 재구성했다.

운전사 백인이 보기에, 이 흑인은 아주 독특하다. 차별을 받던 흑인들과 달리 부유한 삶을 살기에 흑인들과도 섞이지 못하고, 백인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여전히 차별을 당해 섞이지 못하는 상황을 발견한다.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은 흑인 피아니스트의 깊은 내면에 쌓여있던 고민을 절규하듯 쏟아내는 장면이다.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나는 뭐죠?”

겉보기엔 천재이며 스타이고 부자였였지만, 늘 불행했던 삶의 이유가 드러났다. 우리 신앙생활에 비유해 보자. 믿음을 가지기 위해 세상을 버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음을 가지지도 못한 상황이다.

“우리는 가지고 싶지만 가지지 못하는 믿음과, 버리고 싶지만 버리지 못한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것이 신약시대 바울이 바라본 우상문화 앞에서 쩔쩔매는 교회들의 모습이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예수님을 계속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속 생각하기 위해서는 서로 권면해야 한다. 무엇으로 권면해야 할지 우리는 안다. 바로 성경이다.

당시 바울의 고민은 도대체 교회 안에 복음이 어떻게 들어가야, 예수만 생각하는 열매를 맺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은 답은 정말 예수의 복음만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심지어 복음에 ‘나’ 자신조차 섞이면 안된다고 할 정도이다. 성경은 나 자신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회는 복음으로 천국문을 여는 곳이다. 열쇠의 원리는 그 열쇠로만 열 수 있다. 열쇠가 변형되면 절대로 문을 열 수 없다. 그것이 복음의 특징이다.

구약 요나서로 가보자.

요나가 탄 배의 선원들은 이교도들이었다. 폭풍우가 누군가의 잘못에 의한 심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요나에게 3가지 질문을 한다. 직업이 무엇인가? 고향이 어디인가? 어느 민족인가?

이 질문들은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는데 꼭 필요한 질문들이다. 즉 너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이 섬기는 우상을 알고 싶다는 의미다.

성경은 대화의 과정에서, 요나의 우상을 밝혀낸다. 마치 검사가 취조하듯, 선지자가 이교도들에게 취조를 당한다. 마침내 요나의 답변은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였고, 다음이 종교에 대한 내용이었다. 즉 그의 주인은 바로 자신의 민족이었다. 요나의 우상이 밝혀졌다. 그래서 도망을 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순수한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복음이다. 그래서 새롭다는 개념을 강조하기보다, 돌아가야 한다 개념이 강조되어 한다. 어디로 돌아가는가?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곧 복음이다.

“리더를 위한 공동체는 순수한 복음을 훼손하게 될 것이다”

많은 공동체의 리더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먼저 생각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싶어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평소 천재적인 재능은 있지만 관계성이 부족한 사람들일수록 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일일이 사람을 만나고 대하고 해결할 능력이 없거나 이런 과정을 피곤하게 생각한다면, 절대적인 권위를 만들어 절대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절대적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리더의 생각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순종해야 하기에, 어떤 말이라도 옳아야 한다.

그래서 이럴 경우 복음이 훼손된다. 복음에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서, 점점 시간이 갈수록 리더의 생각이 더 우선되게 된다. 나아가 복음을 말할 때도 리더의 선포가 곧 진리이므로, 각자 팔로워들이 생각하는 복음의 내용이 가벼워진다. 리더의 말이 곧 진리가 되는 과정이 된다.

이름없는교회 백성훈
▲백성훈 목사의 이름없는교회 설교 모습.
“교회 역사를 보면,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면서 망했고 예수를 전파하면서 부흥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이런 공동체의 특징은 ‘믿음의 선포’를 강조한다. 왜냐하면 일일이 각자가 성경을 보고 묵상하면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의 말에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을 강조한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한지를 묻는다면, 불순종이 된다.

영적인 선포를 할 때도 복음이 훼손된다. 예를 들어 사탄의 전략은 결국 패한다는 선포를 해 보자. 우리 삶에 여전히 유혹하고 있지만 결국 패한다, 그것인 진리다. 왜냐하면 이미 패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포하기를 “지금 내가 믿음으로 선포하면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사탄은 언제 패했는가? 내가 믿음으로 선포할 때 패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아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패했고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늘 패하고 있다.

승리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내가 선포한다고 지금 승리하는 게 아니다. 이미 승리한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지금 선포하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4)” 말씀하셨다.

오직 성경 하나 들고, 예수만 생각하자. 그래서 공동체의 모든 기준이 성경이 되고, 리더는 성경을 붙들고 전하는 통로가 되자. 그것이 성경적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다. 어떻게 나를 버릴 수 있을까를 묵상하자. 그만큼 리더부터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백성훈 목사(김포 이름없는교회, <팀사역의 원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