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영화 <덩케르크> 속 한 장면.
나는 어릴 적 신앙심이 강한 어머니로부터 ‘주일성수’에 대해 배운 것이 기억난다. 주일 예배는 절대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머니만 주일성수를 강조한 것이 아니고 그 당시에 교회 분위기는 예배를 빠지고 놀러 가면 왠지 ‘천벌’을 받을 것처럼 이야기했다. 워낙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니, 그 당시에는 벌 받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예배를 드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앙생활 하도록 가르치는 문화는 잘못된 것이다. 이 또한 두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학교에서도 배운다. ‘인과응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좋은 일에는 좋은 결과,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결국 나쁜 결과를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다시 말해 벌 받지 않기 위해 선한 일을 도모하게 된다. 이런 교육 역시 벌 받지 않기 위해 주일을 지키는 행위나 별반 다르지 않다. 다 두 마음을 품은 것으로 청결한 마음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조금 더 면밀히 살피자면, 벌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보상을 탐하는 것의 이면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것은 본질적으로 보상을 위해 선을 품는 마음과 동일하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 형벌을 피하려는 의도로 선을 품는다면, 그것은 한 가지를 품은 것이 아니다. 그 의도는 명확히 두 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에게 벌은 두려워해야 할 요소가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불의를 행한다면, 오히려 벌 받기를 원해야 한다. 약이 병자를 고치듯이, 형벌이 그를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픈 환자가 약의 쓴맛을 두려워한다면, 의사가 환자를 마취시키고 절개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의사에게 항의하고 난리를 칠 것이다.

이런 저항이 강렬하게 불타오를수록, 그의 저항은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폭로할 뿐이다. 다시 말해 그는 건강을 원했지만, 그것을 품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건강하게 될 수 있더라도 말이다.

할 수 없는 것을 계속 원하는 것은 두 마음이 아니다. 장애물이 욕망하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하는 사람이 스스로 방해자가 되는 것, 스스로 원하면서 스스로 방해자가 되는 것, 그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비슷한 예로,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실수 자체가 아니라 실수로 인한 창피라면, 이 두려움은 실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기는커녕 더 파멸적인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다른 면으로 본다면, 그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벌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은 진리 안에서 선을 행하는 것을 돕기는커녕 그를 파멸하게 만든다.

이는 병 걸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벌로 두려워떠는 자는 결코 선을 행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형벌은 약이다. 그때 누구나, 심지어 어린 아이도, 약이 잘못 사용될 때 약처럼 위험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이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지라도, 치명적인 질병을 초래할 수 있다.

정리해 보자. 영적으로 이해할 때, 치명적인 병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영원의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치명적인 병이다.

이 병에서 보호받기 위해, 이 병에서 구조받기 위해, 사람이 자기 자신을 벌하는 것이 유익하다. 다시 말해 죄 많은 세리처럼, 자신의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다(눅 18:13).

이때 벌 받는 것은 더욱 유익하다. 그리하여 형벌로 인해 그는 깨어 있게 되고 정신 차리게 될 것이다. 형벌은 삶에서 그의 자리가 될 것이고, 선을 위한 자리가 될 것이다. 그가 마땅히 벌 받기를 바란다면, 선을 위한 자리가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다른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더욱 치명적인 병이다. 첫 번째 병이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요 완고함이요 아집이라면, 이 두 번째 질병은 비겁이요 비굴이요, 위선이다.

후자의 병은 환자가 잘못된 방식으로 약을 사용하는 것을 의사가 공포 가운데 지켜볼 때만큼이나 소름끼친다.

벌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을 품은 사람은 아직 병들었다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에 선을 품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들었다. 그의 병은 정확히 이것이다: 병과 약을 혼동하는 병.

확실히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죄인을 위선자로 만든다. 그는 위선자의 메스꺼운 두 마음을 품고 있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어도(이 두려움은 잘못된 방식으로 약을 복용하는 것이므로), 이것으로 인해 마음이 청결해질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형벌은 병이 아니라 약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