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성경
▲오래된 성경. ⓒ픽사베이
성경이 우주와 인류 역사의 기원은 밝혀주지만, 인류사를 서술한 역사책은 아니다. 성경을 역사책으로 오인할 때 ‘단군(檀君)’과 ‘욕단(창 10:25- 26)’을 동일시하고, 다니엘서 연대기(단 7-12장)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재림시기 예측 같은 무리한 가설들을 세우게 된다.

성경이 천국 백성의 도리를 가르치지만 그것이 성경을 윤리교과서로 만들지 않는다. 메시아의 족보를 잇기 위해 시부(媤父)와 통간한 다말이(창 38:18) 믿음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조상에 등재되고,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이신칭의(롬 4:5- 6)’가 기독교의 핵심교리가 됨은 기독교가 윤리 그 이상임을 말해 준다. ‘신앙’과 ‘윤리’를 동일시하는 계몽주의자들에게는 도무지 해석 불가한 대목이다.

또 성경이 마음의 평안, 기쁨을 말하지만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을 가르치는 심리학 교과서는 아니다. 신앙을 가지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 목적은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요 5:39)와 그의 구원을 가르치며(딤후 3:15), 평안과 기쁨은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열매로 말한다(롬 5:1, 갈 5:22, 벧전 1:8-9). 따라서 배가 아플 때 내과를 찾고, 뼈를 다쳤을 때 정형외과를 찾듯이 마음을 치유하려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에 신비적 체험이 따르지만 기독교는 신비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의 체험과 신비주의의 체험은 그 뿌리부터가 다르다. 전자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따르는 초월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자연인의 오감적(五感的)인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그들의 신비체험이 놀랄만 한 영험(靈驗)으로 숭상되지만, 우리가 보기엔 그저 자연인의 신비체험일 뿐이다.

플라톤(Plato) 신비주의자들이 ‘땅에서 하늘을 넘보는 자’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중생자들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요 3:3) 땅에 속한 미중생자인 그들이 자신들의 철학적 메커니즘(mechanism)으로 하늘을 경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 보편적인 종교 메커니즘으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 체험을 획득하려는 종교다원주의 역시 같은 부류이다.

또 성경은 인간의 공급원(供給源, source of supply)이 하나님이심을 밝혀주지만 부자 되는 원리는 가르쳐주진 않는다. 기독교를 그렇게 몰아갈 때, ‘경영 경제학자 하나님’이라는 야릇한 용어를 만들어 내고, 오병2어의 이적(마 14:17-21)은 그리스도를 경제 문제의 해결자로 삼는 근거 구절로 등극하게 된다.

주지하듯이 그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 그리스도가 자신의 살을 죄인에게 먹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한다는 것을 예표한다(요 6:51, 57).

위에 열거된 대조적인 두 입장들은 기독교를 영적인 것으로 보려는 자들과 현실타개적인 것으로 보려는 자들 사이의 관점차에서 결과한다.

기독교 신앙을 현실 타개책(打開策)으로 왜곡시키는 배후에는 실용주의(Pragmatism) 가치관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 실용주의의 기원은 인간 행복을 삶의 중심에 놓는 인본주의 가치관이고, 또한 영적인 것보다 물질을 중시하는 유물론적 가치관이다. 이 점에서 실용주의는 죄와 그 기원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론으로 무장된 근대 실용주의(Pragmatism)의 출현은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72-1907)에 의해서이고, 1930년대 미국의 경제 대공황(Great Depression)때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상 체계로 발돋움 함으로서 활짝 만개(滿開)됐다.

실용주의는 교육, 철학, 경제, 정치는 물론 종교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의 핵심 개념은 ‘현실에 도움이 되는 것만 가치롭다’이다.

한때 회자됐던 “교실 안에서 학생들을 이론적으로만 가르치는 열 사람의 교사보다 빵을 만들 줄 아는 제빵사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는 유행어는 당시 미국의 실용주의 가치관을 잘 대변한다. 실용주의는 미국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넘어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했던 동 시대의 국가들에서도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국민이 잘 먹고 잘 사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Winston Churchill, 1874-1965),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鄧小平, 1904- 1997)”.

이런 실용주의 가치관은 일제강점기, 6.25 격동기를 지나 1970년대까지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했던 한국 사회에도 동일하게 유입되어 일정 부분 효과를 보았고, 한 때 “꿩 잡는게 매”라는 속담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실용주의(Pragmatism) 가치관이 팽배하던 시절 기독교 내에서 과학, 역사, 인류학, 정치, 경제, 심리학을 성경으로 직접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불어 이즈음 “성경에 부자되는 비결이 있다”, “성경에 우등생의 비결이 있다”는 담대한(?) 주장들도 쏟아져 나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를 로마의 식민(植民) 통치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듯이(행 1:6), 실용주의 신앙인들에게 예수는 그들의 제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메시아로 등극했다.

이런 실용주의적인 신앙은 현실에 별로 유용하지 못한 구원, 거듭남, 양자됨, 영생, 내세 같은 영적인 가치들이 주된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기독교의 핵심 사안인 ‘구원’은 그들에게 저주를 멈추고 금세의 복을 열어주는 통과의례(通過儀禮)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율법의 저주’란 현세적 복을 뺏어가는 원흉일 뿐이었다.

이렇게 실용주의적인 성경 해석이 가능했던 것은 첫째 성경의 방대함이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할 수 있는 나름의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단들의 발흥도 그들의 주장 근거를 얼마든지 성경에서 찾아낼 만큼 성경이 방대하기에 가능했다. 일정한 성경 해석의 기준이 없으면 언제든 성경이 오용(誤用)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주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딤후 3:15)’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이유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마 1:21)’이지, 사람들의 현실타개를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들게 하신 것은 예수께 순종하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현실 타개적(打開的)인 의미보다는 베드로에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시켜 그를 사람 낚는 전도자로 삼기 위해서였다(눅 5:4-10).

모세가 홍해를 가른 이적은 믿기만 하면 홍해가 갈라지듯 모든 난관이 한 방에 해결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장애물도 돌파하여 끝내 택자의 구원을 성취하신다는 뜻이다. 홍해 이적은 유월절 어린양의 구원(고전 5:7)과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가나 혼인잔치의 이적은 단지 그리스도는 삶의 결핍을 채워주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혼인을 귀히 여기신다는 뜻과 함께, 물이 순식간에 포도주로 바뀌듯이 죄인을 순식간에 의인되게 하는 거듭남(重生),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은혜를 예표 했다.

이 외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것들을 통해 말씀하려고 한 것은 ‘죄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문제에만 천착하게 하고 영적 문제를 간과시킨다면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실용주의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 신앙의 목적을 현세적인 축복이나 유용성에 둠으로써, 영적 축복들인 구원, 거듭남, 양자됨, 영생 같은 신앙의 핵심 가치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뿐만 아니다. 이렇게 현세적인 축복을 중심에 놓을 때, 기독교의 가치관이 아예 전도(顚倒)된다. 곧 하나님 사랑의 엑기스인 구원을 받았음에도, 현세적인 것에 대한 결핍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는 하나님 사랑을 못 받았다는 왜곡된 생각을 갖게 한다.

예컨대 각자가 향유하는 금생의 복들을 비교하며, 자신은 누구만큼 못 가져 하나님의 사랑을 그만큼 못 받았다고 결론지으며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처럼 현세적이고 물질중심적인 실용주의 가치관은 신앙의 근간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뒤흔드는 매우 파괴적인 사조이다.

물론 하나님이 생사화복의 주권자이며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허락으로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성경이 우선적으로 가르치려는 지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성령은 오늘도 성도 곁에 오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가치와 행복’을 깨우치시며, 그것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임을(요일 4:9-10) 일러주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 2:29)”.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