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

J. P. 모어랜드 | 황을호 역 | 생명의말씀사 | 294쪽 | 17,000원

“세계적인 과학자 아무개가 말하기를…”, “유명한 대학교 과학 연구팀의 발표에 따르면…”.

언제부터인가 이런 방식의 표현이 많아졌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 말하는 것을 신뢰하고 대부분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로 시작하는 정보는 사실과 관계없는 철학(신학)의 영역으로, 진지한 크리스천이어야만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프랜시스 쉐퍼가 정확히 분석한 대로 현대 사상이 상층부를 억지로 하층부와 분리하면서, 과학이 자리 잡고 있는 하층부는 실증적, 객관적 사실로 존중을 받고, 철학적(신학적) 논증은 상층부에 떠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설명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저자인 J. P. 모어랜드는 나아가 과학의 탈을 쓴 ‘과학주의(Scientism)’가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상층부를 독식하며 철학적인 사상을 마치 실증적인 사실인 것처럼 속이며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쉽게 말해 “세계적인 과학자 아무개”가 말했다 해서, 반드시 그것이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창조나 진화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들어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세계적인 과학자가 말한 것을 인용하며 “이미 끝난 얘기”라고 말합니다.

저자인 모어랜드가 그 논쟁에 참여한다면 “내가 이 책을 통해 말한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과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 경계선을 넘어 무언가 주장한다면 당신은 과학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주의라는 종교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아시길 바랍니다”라고 충고했을 것입니다.

J. P. 모어랜드는 기독교 철학자이자 변증가로 <기독교 철학(CLC, 2013)>, <과학철학(CLC, 2013)>, <논리학, 윤리학(CLC, 2011)>, <이렇게 답하라(새물결플러스, 2009)>,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IVP, 2001)>와 같은 책이 한국에 알려졌습니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신학은 댈러스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탈봇 신학교에서 철학 석좌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만 봐도 모어랜드는 뛰어난 철학적 통찰력으로 기독교 변증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자는 1970년대 말 젊은 지구론에서 오래된 지구론으로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그가 관점을 바꾼 이유는 신뢰할 만한 구약의 전문가 다수(글리슨 아처, 월터 카이저)가 성경이 오래된 지구론을 지지한다고 가르쳤고, 다른 저명한 기독교 학자들의 글을 통해 오래된 지구론 관점이 수용 가능하다고 결론내렸기 때문입니다(265쪽).

정확한 그의 관점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관점은 자연주의적 유신론적 진화론이 거짓이며, 공통 조상론은 의심스럽고, 생명의 역사의 여러 지점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새로운 종류의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점을 시사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의 행위는 과학적으로 탐색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또한 우주가 오래되었고(138억 년) 지구도 오래되었지만(45억 6천 8백만년), 아담과 하와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265쪽).”

젊은 지구론을 지지하는 독자에게 이 점은 이 책을 읽기 꺼리게 만드는 어려움을 줄지도 모릅니다. 간혹 나오는 진화에 대한 언급이나, 한두 번 태초를 138억 년 전으로 소개할 때마다 발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오래된 지구론과 젊은 지구론은 수용돼야 하며, 친절하게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반대로 유신론적 진화론은 신학적·과학적 이유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266쪽).

우주 지구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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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지구론과 오래된 지구론의 논쟁은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가에 대한 문제이고, 동시에 과학적 증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정통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이에 대한 끈질긴 토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쟁하는 데 있어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기록된 의미 그대로 정확히 해석하고 과학적 증거가 주관적인 신념으로 곡해되지 않도록 철저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모어랜드의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는 위의 논쟁에서 어느 편에 서는가와 상관없이 양 측면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나아가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무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책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믿는 것을 주장할 때 과학적인 증거를 사용하기 때문이며, 그때 사용하는 과학은 절대로 ‘과학주의’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과학주의는 “성공적으로 검증되었고 적절한 과학적 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는 과학적 주장만이 진리이며, 합리적으로 입증된다고 암시하는 것(36쪽)”입니다.

“과학 분야로 분류하지 않는 일부 학문에 대해 최소한이 합리성 상태를 기꺼이 용인”하지만, “과학적 상태가 아니거나 과학적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시해도 될 정도의 지적인 가치를 갖는다(37쪽)”고 믿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오감으로 식별이나 인식이 가능하고 측정할 수 있으며 관찰하고 검증 가능한 것들만 참 ‘진리’라고 믿는 신념이 ‘과학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말하고 성령의 내주를 주장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는 ‘과학주의’의 주적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과학주의’를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과학주의가 “어떻게 기독교를 소외시켜서 문화의 타당성 구조 밖으로 몰아내는지 이해(276쪽)”하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자녀를 세상에 빼앗기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모어랜드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은,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주도면밀하게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비과학적 지식 혹은 선험적 지식이 후험적 지식(과학주의가 주장하는 유일한 지식)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험적 지식의 근간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또한 과학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정의한 ‘과학’이라는 기준만 진리를 식별하는 유일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맹신하기 때문에, 철학이자 종교입니다. 한 마디로 과학주의는 참으로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과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고, 과학의 자리로 내려와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상을 따를 겸손한 자세를 갖추어야만 참으로 과학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한 마디로 과학과 기독교는 친구가 될 수 있고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로서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주의의 거짓을 주의한다면 말입니다.

모어랜드는 어려서부터 과학에 탐닉했던 사람으로, 다섯 살에 현미경을, 여섯 살엔 화학 실험 세트를 가지고 놀았고, 여덟 살에는 기상 관측소를 세우고 온갖 날씨 관련 자료를 기록했습니다.

또 중고등학교 때는 화학과 물리에 푹 빠져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받고, 대학 때도 화학 실험실에서 연구하며 시간을 보낸, 정말이지 과학을 참으로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짜 과학, 과학의 탈을 쓴 철학의 인식론인 ‘과학주의’에 맞서라고 권면합니다. 과학주의의 실체를 보고 그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독재적인지 알라고 부르짖습니다. 조용하지만 치명적으로 기독교를 파괴하고 있는 ‘과학주의’에 맞서도록 이 책이 좋은 예방 주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 책은 철학적 사고를 많이 요구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읽어서라도 내용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다른 크리스천에게도 알리라고 강력하게 권면하는 저자의 바람처럼 천천히 생각하며 내용을 잘 소화해서 읽어 봅시다.

그런다면 조용히 교회 안팎으로 침투하여 영혼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철학’이자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고 주의하여 이를 멀리하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큰 유익을 얻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조정의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유평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