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안교회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요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던지신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왜 이런 질문을 던지실까. 지금 베드로와 주님의 문답입니다. 이는 깊고도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린 여러 차례 이 말씀을 듣고 또 묵상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깊은 의미를 우리가 정말로 깨달아 아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를 안다는 것은 우리가 베드로처럼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답은 사랑의 문답인데, 이 문답 이후 베드로는 또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본문 아래 내용을 가만히 보면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것입니다. 이 문답 이후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해 헌신적으로 삽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순교하기까지.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그것은 주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주고 받는 쌍방향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관계에서는 받은 사랑을 잘 알고 그것에 잘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전에 어버이 날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사실 어버이 주일입니다. 주중에 영상하나를 봤습니다. 교육방송인데 통계자료를 보여줬습니다. 사람들의 한달 평균 통화시간을 분석해 놨습니다. 사람들이 연인과 통화시간이 200분이 넘고 친구와의 통화시간이 160분이 넘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과 통화하는 시간이 고작 6분 이었습니다. 얼마나 짧습니까. 무뚝뚝한 부모님과 대화할 말도 많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상의 말미에 나오는 인상적인 글귀가 있었습니다. "부모님과의 그런 통화도 다시는 못할 때가 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받은 큰 사랑이 있습니다. 받은 것을 알면 그걸 잘 감사드리고 잘 응답을 할때 그 관계가 온전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번 5월 8일 어버이 날은 수요일이었습니다. 수요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매년 이 맘때가 되면 학교에서 선생님이 편지를 쓰게 해서 부모님께 주는데, 이상하게 그 날은 아무것도 안주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가는길에 "이놈들이 컸는데 어떻게 어릴 때보다 이런 걸 더 모르지?" 약간 섭섭함이 들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집이 가까워 오자 애들이 먼저 집에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문을 열자, "짠~!" 하면서 정성스레 써놓은 편지와 조금의 용돈으로 편의점 커피를 사서 포장해서 준 것이었습니다. 깜짝 이벤트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응답되지 못한 사랑은 참으로 섭섭한 것이구나. 응답되는 사랑은 이렇게 기쁜 것이구나!"

우리 신앙도 이것을 하나 하나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창 1장]에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날에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이었나요. 생육하라~! Be fruitful~! 생육한다는 것은 영어로는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라 했는데 이는 쉽게 말해 '자라나라'는 것입니다. 한국말에 '철이 들어라~!' 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뭘 의미합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받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잘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온 우주 만물을 다 지으시고 그에게 다 주셨습니다. 아담을 위한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엄청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생육하라' 말씀하신 것은, '그 엄청난 희생을 그 사랑을 네가 알고 응답해 다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사이 기쁨이 넘치는 관계, 그런 세계를 이 땅에 이루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아담은 하나님 사랑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섭섭함 하나님의 서러움이 정말로 크셨을 것입니다. 그런 오랜 한스러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한 아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온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베푸신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셨던 것입니다. 아셨기 때문에 평생을 혼신의 힘을 다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마 22장]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마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유대인들이 지키는 600개가 넘는 법중에 제일 중요한 법이 어떤 법입니까.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신 6:5]의 말씀을 얘기하십니다.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이것이 모든 법중에 제일 중요한 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우리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야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것은, 우리 소유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주님은 정말로 이렇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인 것입니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해 부어주신 사랑이 이미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우리가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부은 바 된 넘치는 사랑에 우리는 '이렇게 응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 관계가 온전해지고 그 가운데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계명은 '하라, 하지 말라'는 식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 속에는 그렇게 해야만 될 마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이미 우리가운데 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 신앙은 두가지입니다. 어느 유명한 선교단체의 구호처럼, To know God 그리고 To make Him known.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선행적 은총을 예수님처럼 먼저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아는 만큼 그 사랑을 알게 하는 일, 전하는 일, 드러내는 일. 우리 신앙은 여기까지 가야합니다.

오늘 왜 이런 말씀 전합니까. 우리가 우리 신앙이 온전해지길 원합니다. 더 깊어지길 원하고 더 주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하고 그 사랑으로 인한 기쁨을 얻기를 원하고. 그러자면 받은 사랑을 잘 알고 잘 응답하려고 해야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길, 방법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와의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친구 동료와의 관계, 부부 관계 등 이 모든 관계 속에 이런 것을 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응답했는가.

그걸 생각하고 본문을 다시 봅시다.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와의 문답이라고 했습니다. 세번의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번의 질문을 깊이 주석해보면 이런 뜻입니다. "네가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 "네가 그 무엇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 "네가 네 목숨을 버릴 정도로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속에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또 제자들을 먼저 그렇게 사랑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그 사랑을 먼저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속에는 베드로가 받은 주님의 그 크고도 깊은 사랑을 하나 하나 깨닫는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들, 주님이 보이시고 행하신 기적들, 가르치신 모든 가르침들속에 담겨있는 깊은 사랑을 제자들은 깨달아 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는 어떻게 응답합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런 응답을 하니, 마지막에 주신 말씀이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이 말은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양을 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깊은가요.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을 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자를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행동으로 응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이 말씀에 늘 도전을 받아야합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되어야합니다. 사랑은 우리 생각속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고 나타나져야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요한사도는 다른 편지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런 말씀 볼 때 우리 신앙이, 우리 사랑이 얼마나 거짓된 것이 많습니까. 위선적인 것이 많습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치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고 알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의 삶과 인격으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보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의 신앙이 얼마나 실천이 중요한 것입니까. 이와 관련해서 [마 25장]에는 또 하나의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3개의 비유중에 마지막 비유. 31-46절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 신앙에 던져주는 정말 강렬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게 뭔가. 우리가 정말로 올바른 신앙을 한다는 것이 뭔가.

[마 25장]은 심판의 비유 종말의 비유라고도 하는데,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이 갈라내십니다. 쉽게 표현해서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 갈라냅니다. 그것을 당시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른쪽에는 양들을 모으고 왼쪽에는 염소를 모읍니다. 그처럼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복받을 자들아 너희는 내가 준비한 복을 다 받으리라. 너희는 내가 주를때 먹을 것을 줬고 목마를때 마시게 했고 나그네 되었을때 맞아주었고 병들었을때 돌봐주었느니라. 그래서 너희는 나에게 이러 이러한 것들을 다 해주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고 내가 준비한 복을 다 받으리라" 그러니까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대답하는가. "네? 저희가요? 우리가 언제 그랬죠?" 그러니까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는다고 하면, 십일조 잘 드리고 기도생활 잘하고 예배도 잘 참석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중요한 신앙의 '가늠자'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신앙의 훈련이 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소중한 방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야합니다. 그런 신앙의 훈련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리까지. 주님이 돌보길 원하는 자들을 돌보고, 주님이 살리길 원하는 영혼들을 살리고, 주님이 이루길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기까지 우린 나아가야합니다. 그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안에 있는 사랑이 증명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간단히 신앙을 배웁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런 팻말 문구처럼. 예수 믿기만 하면 천국 다 들어간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러나 우리 신앙이 좀더 정직해지고 또 진지해져야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는데 사는 것은 형편없다 해 보십시오. 예수 믿고서 형제를 더 미워하고 더 이기적으로 살고 아무런 비움도 베품도 없이 산다고 해 보십시오. "뭐, 그래도 난 천국갑니다~" 라고 한다면, 문제 있는 것 아니겠습니가.

[마 25장]의 비유는 심판의 비유입니다. 이를 우리가 잘 봐야합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가 오른편에 있게 되느냐. 어떤 자가 왼편에 있게 되느냐. 그건 그의 일상의 삶이, 평소의 삶이 어떠했느냐? 그걸 주님이 보신다는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늘 이웃을 형제를 먹이고 입히고 마시우고 돌보고 그런 일을 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그것을 선행이라고도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네? 저희가 언제 그랬죠?" 이 응답속에는 자기가 무수히 행한 선행을 선행이라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늘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반면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저주를 받은자들이라고. 준비된 영벌을 받을 것이라" "왜요?" "너희는 내가 주릴때 먹을 것도 안줬고 목마를때 마실 것도 안줬고 병들었을때 돌보지도 않았느니라" "네? 우리가 언제 안했습니까. 저희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한 것을 다 기억합니다. 자기 신앙에 대한 자랑이 있습니다. 자기 공로 치적 이것만 드러냅니다. 주님 말씀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안한 것이 곧 나에게 안한 것이니라" 평소의 삶이 일상의 삶이 이런 판단을 받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늘 사는 것이 주님이 돌보길 원하는 영혼들은 돌보지 아니하고 주님이 먹이길 원하는 영혼들은 먹이지 않고 그런 일에는 무관심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무슨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까. [요 21장]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정말 사랑해? 정말 정말 사랑해?" 왜 세번씩이나 물으셨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분명 그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봐야할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은 그만큼 우리 신앙에 이것이 중요한 주제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짜 사랑한다는게 뭔가.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한다는 게 뭔가. 그것은 내 양, 주님의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영혼들을 나도 사랑하는 것. 주님이 돌보길 원하고 주님이 먹이길 원하고 주님이 돕길 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가 돌보고 먹이고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진정 살아갈 때에, 마지막 때에 심판의 때에 주님 오른편에 의인의 회중 가운데 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