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믿음을 행위와 무관한 ‘구원을 받아들이는 손’으로 이해하는 정통 신앙인들에게 ‘믿음은 복종이다’ 같은 말을 해 주면 당황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종종 ‘믿음’과 ‘복종’울 동일시한다(물론 여기서 복종은 행위구원론자들의 율법 행위적 복종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복음에 복종하는 것(살후 1:8)’이라 했고, 광야 여정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불순종’과 동일시했고(히 4:5-6), 베드로는 믿음을 ‘진리를 순종함(벧전 1:22)’이라 했다.

구원의 방도로서, ‘예수 이름을 부르고(롬 10:13)’,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롬 10:9, 요일 4:15)’은 단순히 입에 예수 이름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굴종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빌 2:10)”으로 묘사했고, 실제로 예수 앞에 나온 이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태도를 취했다(마 2:11, 막 5:33, 눅 5:8, 12; 8:41; 17:16).

특히 거라사인(the Gerasenes)의 땅에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예수를 보고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소서(눅 8:28, 31)”라고 부르짖는 모습은 예수 신앙의 의미를 형상화시켜 준다.

비유컨대 전쟁에서 패장(敗將)이 적국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구명을 호소하며 자신의 주군(主君)으로 맞아들이는 모습 같다.

이처럼 믿음은 단지 교리의 수납 정도가 아니라 ‘마음의 복종’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구속 경륜인 ‘이신칭의 언약’을 받아들이는 ‘복종적 수납(submissive acceptance)’이 믿음이다.

‘믿음’이 순종이기에, 당연히 그 반대의 ‘불신앙’은 불순종이고(히 11:31) 완악함이다(롬 11:6-7).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 11:6-7)”.

그러나 이렇게 믿음을 순종으로 말하면, 이를 당장 악용하는 이들이 있다. 행위구원론자들이 그들이다. "봐라. 믿음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을 위해 뭐든 하는 것이야.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지 않았느냐”며 기고만장해진다.

그러나 ‘믿음에의 복종’은 그들이 주장하듯,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적 의(義)를 행함이 아니다. 거듭나 의지가 정복된 자가 갖는 ‘피동적 복종(passive submission)’이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의 복종적 속성을 알 때,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쉽디 쉬워 보이는 복음이 왜 모든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하고(살후 3:2), 복음 전도가 왜 그렇게 사람들의 저항을 받아왔는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복음 신앙은 은혜롭고 부드러운 외양(外樣)을 가졌지만, 고래 힘줄 같은 죄된 의지의 복종을 요구한다.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어 보이지만, 실제 그 고백이 있기까지는 고백자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그의 완고한 의지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일하심이 있었다.

“사람에게 마음의 복종 없는 수백까지 ‘행위적 복종’을 강요할 수는 있으나 ‘마음의 복종(obedience of mind)’은 강요할 수 는 없다”는 속담은 괜한 것이 아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죄로 죽어 화석화(化石化)된 마음이 믿음을 가지려면, 굳은 마음이 제하여지고 새 마음, 새 영(靈)이 부어져야 한다(겔 36:26).

믿음을 ‘거듭남의 산물’이라 했음은 죽은 자가 살아날 때만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 믿음을 ‘지고의 복종’,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믿음을 갖기까지 이런 지난(至難)한 과정(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은 미리 아심, 예정, 부르심, 거듭남의 결과)이 있다는 것을 알 때, ‘기독교 신앙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는 일부 사람들의 비아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초신자들에게는 오직 은혜만 감지되고, 이런 지난한 영적 과정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 믿음이 오기까지 거친(rugged) 과정과 하나님의 자기 희생적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에게는 복종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 기독교사(史)의 수 많은 순교자들은 이의 반증이다.

반면 이런 ‘마음의 복종’엔 무관심하고 오직 ‘행위적 복종’에만 몰두하는 행동지상주의자들(behaviorists)이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 실용주의자, 계몽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에겐 외형적 행동만이 지고의 가치이며, 행동 없는 이념이나 사상은 전혀 무가치하다. 행위라는 결과물만 생긴다면 동기는 어떻든 문제삼지 않는다.

그들은 행동을 산출해내는 교육을 최고의 교육으로 여기며 생각과 지성만 살찌우는 이론적이고 비실용적인 교육을 무가치하게 여긴다.

종교에 있어서도 그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영적 가르침들을 무가치하게 여기며, 행동 산출을 종교의 지상목표로 삼는다. 19세기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된 M.R.A(Moral Re-Armament, 도덕재무장운동)이나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운동 등이 그 결과물들이다.

이런 행위지상주의 가치관은 교회 안에서 거듭남, 칭의, 재림, 천국 같은 모든 영적인 가르침들을 평가절하하고, 기독교를 행위위주의 도덕주의로 흐르게 했다.

마지막으로 ‘복종적 믿음’에만 참된 확신이 따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확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마음의 복종(obedience of mind)' 곧, ‘믿음’을 수용할 때 성령의 부어짐으로 오는 결과물이다. 믿음이 거듭남의 산물이었듯이, 확신 역시 자기 내면에 기원을 둔 지성적 수납이나 의지적 결단에서 나오는 자의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물론 사상, 학문, 과학에서 나온 이념적(ideologic) 확신이 있을 수 있다. 또 이단 사이비 종교인들이 특정인을 우상화 하려고 도입한 세뇌와 최면적 확신 같은 것도 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은 이런 류와는 전혀 별개다. 기독교의 확신은 ‘마음의 복종(obedience of mind)’으로서의 '믿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 성령의 부어짐의 결과로 온다.

실제로 성경은 확신을 성령의 역사로 말하며, 성령과 확신을 함께 묶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 1:5).”

오늘 많은 설교자들이 성도들에게 신앙적 확신을 심어주려고 세상 일반에서 사용하는 이념적, 감성적, 심리학적인 기제(mechanism)를 동원하는데 그런 것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경적 확신이 나올 수 없다. 확신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이다.

복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줄 알고 그것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 성령으로 말미암은 견고한 확신이 그에게 부어진다. 죄사함, 이신칭의, 구원, 하나님 자녀 됨의 확신(롬 8:16) 등은 모두 ‘마음의 복종’으로서의 ‘믿음’에 성령이 부어진 결과이다.

성경은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이 부어진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율법의 의를 이루기(복종하기) 위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부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이 비둘기같이 강림하신 것은(마 3:16-17) 그 단적인 예이다.

서로의 위에 복종하시는 겸비한 삼위 하나님은 동시에, 복종하는 위에 임재해 주시고 부어지심을 말해 준다.

우리의 신앙의 ‘확신’이, 인위적인 산물인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점검하도록 해 주는 대목들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