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제공으로 매주 한 차례, [그 때 그 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한경직
▲故 한경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마가복음 10:13~22

오늘은 세계적으로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6월 둘째 주일이올시다. 어린이들을 인생의 꽃이라고 해서 '꽃주일'이라는 이름도 가지게 됩니다. 자연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 제일 아름다운 것은 어린이들일 것입니다. 꽃은 작으나 크나 그 어디에 피었든지 아름답습니다. 어린이들도 작으나 크나 또 어떤 종족에 속하든지 빛깔이 희나 검으나 다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 가운데에는 예수님과 이 어린이들에 대한 아주 아름다운 일화가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이었습니다. 어떤 한 곳에서 아마 어머니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가까이 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그들을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사랑의 뜻인 줄 압니다. 이 제자들은 주님을 할 수 있는 대로 도와주기 위해서, 분주하신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 성경에 기록하신 대로 매우 분히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런 어린아이들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아니하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경계의 말씀을 더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받아서 친히 안으시고 그들 머리 위에 안수를 하시며 축복을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일화를 통해서 우리 주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좀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는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위대한 인격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냉정하거나 너무 엄숙해서 어린이들이 감히 가까이 올 수 없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이며 인정이 깊은, 자애로운 품성을 가지셨던 것을 우리가 이런 일화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때는 마지막 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때입니다. 물론 주님의 마음 속에는 십자가가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마음은 한편 무거웠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만날 때에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축복하셨다는 이런 얘기를 우리가 읽어볼 때에 그의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깊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또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적힌 말씀을 읽어 보면 어린이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천사들이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하늘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또는 "삼가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내 아버지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소자 중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 "누구든지 소자 중 하나이라도 실족케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달아매고 바다에 던짐을 받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미루어서 예수님께서 이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깊었는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당해서 사랑하는 우리가, 대부분 부모 되는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옛날 유대의 어머니들처럼 어린이들을 꼭 주님께 데리고 나와야 되겠습니다. 이 어린이들을 주님의 품에 안겨 주고, 주님의 축복을 받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로 받은 귀한 아들 사무엘을 성막까지 데리고 와서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사실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가 누가복음을 읽을 때에 엘리사벳이 귀하게 받은 어린아기 요한을 성전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바친 기록을 우리가 읽어볼 수 있습니다. 혹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온전히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바친 것을 우리가 또 읽어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기 세례는 특별히 하나님께 어린 아기를 바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될 수 있는 대로, 6개월 전에 어린이들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의무를 부모들이 바로 감당해야 될 줄 생각합니다.

제가 바로 몇 주일 전에, 한국에 선교사로 나온 어떤 가정에서 초청을 하기에 제가 오후에 가보았습니다. 가보니까 자기 가까운 친구들 한 30명가량 청한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 오신 분도 있고, 스웨덴에서 오신 분도 있고, 중국에서 오신 분도 있고, 물론 한국 분도 여러 분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해서 잠깐 예배를 다 드렸습니다.

그다음에 그 부인이 난 지 한 두어 달밖에 안 된 작은 어린아기를 데리고 와서 제게 안겨주면서 특별히 부탁을 합니다. 우리가 오늘 특별히 하나님께 어린애를 바칠 마음이 있으니 어린아기를 받아 안고, 특별히 아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해서 그 아기를 위해서 다시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선물 가운데 가장 귀한 선물은 이 어린아기들입니다. 이 어린아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인 줄 생각합니다. 또한 부모님들이 이 어린아기에 대한 책임을 아기 적부터 일찍 감당하는 것을 배워야 될 줄 압니다. 어린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에는 먼저 하나님을 찾을 줄 알도록 배워 줘야 되겠습니다. 말과 같이 기도도 배워 줘야겠습니다.

사실, 주기도든지 사도신경이든지 열 가지 계명 같은 것은 주일학교에까지 와서 배울 필요가 없는 줄 생각합니다. 으레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어렸을 때에 집에서 배워 줘야 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의 귀한 구절을 암송시키는 것도 어렸을 적부터 배워 주면 일생을 잊어버리지를 아니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습관이든지 모든 종교적인 교육을 어렸을 적부터 부모들이 반드시 시작해야 될 것입니다.

사실 인간 일생의 가장 중요한 때는 한 살부터 일곱 살 때까지라고 합니다. 이 한 살에서 일곱 살까지는 온전히 어린애들이 부모의 무릎에 있습니다. 이때에 어머니 된 사람, 아버지 된 사람이 어떠한 교육을 하며 키우는가가 일생을 지배하는 큰 영향력을 가진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항상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둘째는 우리가 이 일화를 읽는 가운데 제자들의 실수를 찾아봅니다. 물론 제자들의 본의는 아닌 줄 압니다. 제자들의 본의는 예수님을 도와주기 위해서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한 줄 압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접촉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이와 같이 방해하게 된 그 배후에는 아무래도 옛날이나 오늘이나 흔히 어른 된 사람이 어린이들을 좀 경하게 여깁니다. 그때에도 가령 어른들이 와서 예수님을 꼭 뵙겠다고 했다면, 제자들이 물리치지 아니했을 거예요. 어머니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뵙겠다고 하니까 물리치면서 꾸짖어서 보내려고 했던 거예요.
지금 개척 교회에 나가서 전도하는 전도사나 혹 전도 목사에게 개척 교회 형편을 물어봅니다. "지금 거기 형편이 어떻습니까?" 좀 물어볼 때 있습니다. 물어보면 흔히 대답하는 말이 "그저 어른이 한 20명 모이고요, 아이들만 그저 50~60명 모입니다." 그런데 그 말도,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얼른 생각나는 말이, 그런데 사실대로 보고는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땅히 말을 어떻게 해야 될꼬 하니, "어른도 한 20명 모이고, 아주 장래성이 많은 아이들도 50~60명 모입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될 겁니다. 근데 보통은 그렇게 대답 안합니다. 왜 그런가 하니, 우리 어른들은 그저 아이들을 좀 경하게 여기는 그런 마음이 우리 누구에게나 거의 다 있습니다.

사실 50세나 60세가 넘은 분을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해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도 대단히 귀한 일입니다. 대단히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어렸을 때, 어린아이들 때에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실상 결과적으로 보아서 더 중한 일입니다.

왜? 50세 60세 된 이는 예수를 믿고 교회를 들어온다고 해야 그저 기껏해야 자기 영혼이나 구합니다. 더 일할 기회는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일 적에 어떤 어린이 하나를 온전히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할 것이면, 일생을 그로 하여금 옳은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 뿐더러, 일생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장래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됩니다. 어린이들을 경시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거 사실 우리 교회 안에 주일학교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영아부가 아주 중대합니다. 유치부가 아주 중요합니다.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가 아주 중요합니다. 주일학교 선생이 어떠한 어린이 반 하나를 맡아서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그 책임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저 어른들한테 설교를 하라고 하면 밤을 새우면서 잘 준비하겠지만, 뭐 아이들한테 하는 설교야 대강 생각해서 하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린 학생 열 사람을 내가 맡아서 가르친다고 할 것이면, 그 열 사람의 일생에 대한 책임이 내게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에 온전히 마음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온전히 회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내 구주로 꼭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이 주일학교 선생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일생의 분기점이 이 영아기와 유년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린애들의 마음은 문자 그대로 옥토입니다. 길바닥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돌짝밭이 아닙니다. 잡초가 없습니다. 가시덤불도 아직 나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봄밭, 옥토입니다. 이 옥토에 악한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기 전에 진리의 씨를 꼭 바로 뿌려줘야 됩니다. 이것이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특별히 우리 교회 안에서 책임인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부모들의 책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기억할 것은 모든 교육이 그렇지만, 특별히 종교교육, 교회교육은 입과 혀로만 되지는 아니합니다. 내가 친히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입으로는 가르치지만, 자기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을 아이들이 본다고 한다면, 그 교육이 바로 되겠습니까?

특별히 종교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만 되지 아니합니다. 내가 보여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이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여주면 그만큼 효과가 있습니다.

또 사실 우리가 어린애들을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 한 가정에서도요, 사실 아버지가 참 신앙이 있는지, 어머니가 참 신앙이 있는지, 오빠가 참 신앙이 있는지, 누나가 신앙이 있는지, 어린애들이 그 모르는 것 같아도 뻔히 다 알고 있습니다.

전에 어떤 예술가가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기를 시작해서 여러 달을 걸려서 하나 그렸습니다. 그걸 자기 집에 댓살 난 어린 딸이 있는데, 그 딸을 데려다가 "얘, 이분이 누구 같으냐?" 그 애가 하는 말이 "아휴, 참 인물이 이쁘게 잘 생겼구만요." 그 이상 더 다른 이야기가 없단 말예요. 그 말을 듣고 예술가는 마음에 실망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다시 그려야겠구나.' 다시 상상하면서 여러 달 걸려서 또 다른 그림 하나 그렸어요. 그다음에 또 딸을 데려다가 "이분이 누구 같으냐?" 쓱 보더니 "아이, 그분 얼굴이 좀 무섭구만요." 무섭다고 그랬습니다. 이 아버지가 또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기도를 하며 성경을 보면서 많은 묵상 끝에 다시 초상화를 하나 그렸어요. 그리고 자기 딸을 데려다가 "얘, 이분이 누구 같으냐?" 그때 자기 딸이 하는 말이 "아, 그분이 예수님이 아닐까요?" 그때에야 이 예술가가 "아, 과연 이 그림이 이거 바로 그렸구나." 하였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모르는 것 같지만, 과연 누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과연 누가 참된 신앙이 있는지 다 압니다. 어린이들을 못 속입니다. 어린이들의 통찰력이 어른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이 어린이들에게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 책임이 어른 된 사람, 우리 믿는 사람들, 부모들, 주일학교 직원들, 여러 교우들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의 향기"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인격에 향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지 못하면 결국 다른 냄새를 피웁니다.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우리 후배들에게 장성한 우리가 어떠한 향기를 남기는가? 사람이란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혼자 죽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어떻게 사는 가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내가 어떻게 죽는 가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기에 천당에도 혼자 가는 사람이 없고, 지옥에도 혼자 가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내가 천당 가면 다른 사람도 많이 이끌어 가지고 같이 천당에 갑니다. 내가 지옥에 가면 다른 사람도 많이 이끌어 가지고 지옥에 갑니다. 어린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하는가? 우리가 이런 점에 대해 항상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어린이를 중심한 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이가 이 어린이들 같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어린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아니하면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들이 되라는 그 말입니다. 여기 성경에 보면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러나 믿음에는 아이가 되라고 그랬습니다. 여기에 어떤 면을 예수님께서 특별히 생각하시면서 말씀을 하셨는가?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아마 무엇보다도 제일 첫째는 어린이들의 천진성일 겁니다. 어린이들은 참됩니다. 진실합니다. 한다면 합니다. 무사하게 합니다. 외식이 없고, 과장이 없고, 권모가 없고, 술수가 없습니다. 야심도 없습니다. 진실합니다.

옛날 신의주에서 대심방을 할 때에 어떤 집에 가서, 지금도 잊지 아니합니다. 들어가 앉았는데 그 어머니는 잘 믿고, 아버지는 별로 신앙이 없는 분이에요. 우리가 대심방으로 들어가 앉으니까 그 어머니가 한 댓살 난 여자애가 있는데, 그 아이에게 "얘, 너 아버지 저 뒤뜰에 계시더라. 가서 얼른 오시라고 해라." 그 애가 뛰어간단 말예요. 조금 있다가 이어 들어오더니 얼른 그 어머니 보고 크게 하는 말이 뭔가 하니 "아버지 없다고 그러래."

그 진실합니다. 그저 사실대로 대답합니다. 마음이 맑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눈동자처럼 마음이 맑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처럼 참되고 신실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어린이들에게 있는 그 신뢰성을 아마도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은 그저 부모님의 말씀이면 꼭 그대로 믿습니다. 처음엔 믿는다는 그 말씀이올시다. 부모의 말씀이면 꼭 그대로 될 줄 믿습니다. 동양의 한 어진 소년의 어머니도 이웃집에서 돼지 잡는 소리가 나니까 어린애가 물어봅니다. "아니 거 돼지를 왜 잡아?" 얼른 대답한 말이 "거 너를 주려고 잡는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말이오. 그 후에 어머니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거 돼지고기 안 사다 주면 얘에게 거짓말이 되겠단 말예요. 그래서 꼭 그 집에 가서 돼지고기를 사다 주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어린애들의 그 절대적으로 부모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깨뜨려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무슨 위험한 일이 있으면, 그저 어린이들은 온전히 부모의 품에 안깁니다. 절대로 부모를 신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받들라고 하는 뜻인 줄 압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오" 어린애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그리고 어린이들은 교만이 없습니다. 겸허성을 아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신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지식의 교만도 있을 수 있고, 금전의 교만도 있을 수 있고, 권세의 교만도 있을 수 있고, 문벌의 교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런 교만이 없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와 부한 집 아이가 같이 놉니다. 지식 있는 박사의 아이들과 노동자의 아이들이 같이 놉니다. 아이들 사회는 평등입니다. 거기에는 원망이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합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 천국을 받들라고 하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말씀을 한다고 할 것이면, 어린애들은 잘 잊어버리지요. 그저 거기서 싸움하고 싸움한 것을 이내 잊어버립니다. 혐의를 오래 품는 법이 없습니다. 어린애들 그렇습디까? 성경에 보면, "분을 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는데, 아마 이것도 꼭 배워야 될 줄 압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한다고 할 것이면, 어린애들은 아마 제일 잘 웃지요. 낙천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린애들은 항상 웃습니다. 부모들은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는 그런 가정에 간혹 심방해 봅니다. 그러나 그 애들은 가만 보고 있으면, 아주 웃고 잘 놉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저 그저 부모님을 의지하고, 기쁜 가운데서 지냅니다.

오늘 이 어린이 주일을 당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가지시고 그들을 사랑하시는가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사실 여기 우리가 생각하는 이 일화는, 역사를 통하여 모든 아동의 권익운동, 아동보호운동, 아동을 보호하는 기관, 고아원, 주일학교, 교육운동, 일반 교육운동의 원천이 되는 일화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화를 다시 한번 읽을 때에 우리 하나하나가 부모 된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되겠습니다. 주일학교 직원이 된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좋은 모범을 보여주어서 어떻든지 이런 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마땅히 배울 것은 배워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날, 우리 집의 아이들만 생각해서도 아니되겠습니다. 부모 없는 고아들, 불우한 불구자들, 이런 모두 불우한 중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진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응분의 책임을 다해야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근본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을 축복하셔서 귀한 어린이들을 보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가를 저희들이 다시 한번 추억하였습니다. 아버지시여, 우리도 이런 날을 당하여서 우리 부모 된 책임을 깊이 생각하게 하여 주시고 나의 이 귀중한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국의 어린이들이, 모든 어린이들이 기쁘게 건강하게 튼튼히 자라나고 배울 수 있는 이런 사회, 이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최선을 다하는 저희들이 또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