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
▲‘꼬마 목사’ 류한승 목사를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 ⓒ교회 제공
1. 추운 겨울에 메마른 가지를 보면, 봄꽃을 머금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나무의 자기 비움을 봅니다.

찬 바람이 분다고 훈풍이 부는 곳으로 나무가 옮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며 메마른 가지가 될 때, 이미 그 순간 나무는 봄을 머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어떤 고통도 인내하면 꽃피우는 나무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2.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그 누가 얼굴도 모르는 아이를 품었다고, 10개월을 인내하며 온 몸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산고의 고통을 아는 사람만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은 곧 생명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이름은 인류 모두에게 그리운 이름입니다.

3.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는 처녀의 몸이었습니다.

소녀의 몸 안에 이상한 생명의 움직임을 느끼고는 자신이 믿었던 약혼자 요셉에게 상의하지만, 요셉은 몰래 그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잉태된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일깨워 주셨지만, 성경은 묘하게 그 장면을 그리며 마리아의 외로움을 우리에게 소개시켜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4-25)”.

“그의 아내를 데려왔고”가 아니라 “왔으나”로 표현함으로써, 요셉이 마리아를 대했던 모습에서 이전과 다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결혼 전부터 예수를 품은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사랑했던 약혼자 요셉에게서 외면받고 고독과 싸워야 했습니다. 얼마나 마리아가 순결을 간직한 채 하나님의 아들을 가졌다고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녀를 향해 흉흉한 소문만 감돌았을 것이 뻔한 일입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아 오직 하나님만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모습은 모든 어머니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를 몸 안에 품은 즉시, 보이지도 않는 아이와의 만남을 위해 어머니는 많은 것들과 이별해야만 합니다.

좋아하는 음식과 헤어져야 하고, 매일 같이 만나야 했던 사람들과 이별해야 합니다. 아이를 잉태한 순간부터 어머니는 고독한 존재여야만 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생명을 품고 사는 자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입니다.

4. 10개월이 지나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엘리사벳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들은 마리아는 감격하며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가 얼마나 비천한 상황이었는지, 그 상황에서도 만세에 복이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늘 남아있던 메시지가 있습니다. 시므온을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눅 2:34-35)”.

볼을 부비고 눈을 맞추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바로 그 순간, 예수를 키우는 일이 왜 마음을 찌르는 것일까 상상할 수 없습니다.

5.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며, 아이가 건강하기 위해 자기가 연약해짐을 감내합니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들은 휴가를 냅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버는 모든 돈을 자녀를 위해 투자합니다. 마리아의 가정은 남편이 목수일로 연명해가는 가난한 가정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도 비둘기로 제사를 드린다고 표현함으로 가정 형편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의 몸을 표현하기를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한 마디로 못생기고 볼품없고, 신체도 비리비리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얼마나 골골댔을지 눈에 그려집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본래 모습은 오직 어머니 마리아만 압니다. 내 아들이 얼마나 몸이 약한지, 그로 인해 속을 얼마나 애태우며 키우고 있는지 그 마음은 마리아만 압니다.

막달라 마리아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스틸 이미지. 막달라 마리아(루니 마라)
6. 그러던 어느 날, 유월절이 되어 온 친지가 한데 어우러져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즐겁고 유익한 유월절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입니다. 예수가 사라짐을 그제서야 발견합니다.

몸도 약한 아이가, 한 번도 그래서 엄마 곁을 떠난 적 없던 아이가 사라졌으니 발칵 뒤집혀졌을 것입니다. 사흘을 뒤져 찾아낸 곳은 기가 막히게도 성전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예수를 끌어안고 “다행이다, 다행이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도함과 동시에, 멋대로 자리를 이탈한 예수에게 훈육합니다.

“너 왜 그렇게 돌아다녀! 엄마 아빠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

그런데 그 때 아들 예수님의 대답은 부모의 마음에 대못을 박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어디가 저의 집입니까? 저의 집은 여기 성전입니다. 제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그토록 땀 뻘뻘 흘려가며 목수 일을 해가며 몸 약한 예수를 키웠던 아버지 마음에도, 자신 먹을 것 먹지 않고 하나라도 예수를 위해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마음에도, 못 하나가 박힙니다.

성경에서는 이 날 이후 아버지 요셉이 더 이상 예수와 함께 등장하지 않고 사라집니다. 어머니 예수에 대해서도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눅 2:51)”고 기록함으로써, 얼마나 큰 상처가 생겼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7. 자기 밥보다 자녀의 밥 걱정을 하는 사람이 어머니입니다. 늘 남긴 밥, 찬 밥도 자녀가 볼까봐 숨어 먹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시간이 지나 예수님의 본격적 사역이 시작했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서 드러난 일상을 요약하면, 안식일 밀밭 사이에서 바리새인들과 변론, 회당에서 마른 손 가진 자 치유, 바다로 가서 어마어마한 인파들 속에 귀신들린 자와 아픈 자 치료 후, 구태여 산으로 올라가 제자들을 세워 주십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또다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를 시기하는 일당들은 예수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그 소문이 퍼져나갑니다. 나아가 친척들도 예수를 붙잡으려고 돌아다닙니다.
집에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형제들을 데리고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그럼에도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인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집이므로 당당히 뚫고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마리아는 조용히 다른 사람을 시켜 예수를 부릅니다.

자녀의 사역을 혹시나 늙은 어머니가 망칠까 걱정되는 마음뿐, 그 마음을 가진 자의 이름은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밖에 어머님이 오셨어요. 형제들도 함께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차갑게 돌아온 예수님의 반응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어머니 마음에 꽂힙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대중들을 향해 다시 시선을 옮기고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자기 형제요 어머니이다.”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말입니다. 친척들과 다른 아들들 앞에서 어머니의 이름은 그렇게 갈기 갈기 찢겨집니다.

그제서야 짐작이 갑니다. “이런 것이구나. 비수같이 내 마음이 찢기워지는구나.”

8. 비수는 십자가 위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를 바라보며, 어머니 마리아는 아이를 품은 첫 순간이 밀려들어와 괴로웠습니다.

분명히 아이도 복되고 나도 복된 인생이라 했는데, 나의 인생은 왜 여전히 비참한가? 하나님 아들을 품고 살았지만 잉태한 순간부터 고독과 싸워야 했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았고, 심지어 아들로부터도 모멸을 당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가장 이 순간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린 아들.

피투성이가 되어 고개를 떨구어가는 아들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기 자신. 마리아는 하나님께 울부짖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제가 어머니여야 했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입니다. 평생 자기를 바라보지도 않았던 아들 예수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며 미안함 가득한 눈빛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그리고 옆에 요한에게 말하기를 “요한아, 너의 어머니다. 잘 부탁한다.”

9.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가장 걱정하셨던 것은 자기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그 진심을 전하는 순간이 바로 십자가 위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전 생애를 통틀어, 어머니를 잊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품는 순간부터 자기로 인해 외로워야 했고, 자기로 인해 배고파야 했고, 멸시받아야 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예수님은 잊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를 사랑함에도,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못했던 아들 예수의 삶 또한 고독한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 마리아가 만세의 복을 받는 여자가 되기 위한 길임을 예수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0. 그런데 여러분, 주목해야 할 단어는 “여자여”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하와(생명)라고 이름을 칭하기 전 단지 ‘여자’로 불리웠던 그 여인에게 죄로 인한 심판을 하시면서, 동시에 그 죄인된 여자의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 뒤에 여자의 이름이 하와, 즉 생명이 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3장 이후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이 땅에 죽음을 가져온 사탄과의 싸움에서, 십자가를 통해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한 “여자여”라는 말은,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여자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생명의 이름 하와가 된 것처럼,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 역시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이제 죽고 사라질 비천한 인생이 아니라, 만세에 복이 있는 존재요 본질적 고통과 아픔이 사라졌음을 선언하는 어머니를 향한 사랑 고백입니다.

9.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요한아, 너희 어머님이다.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심으로, 두 가정을 하나의 가정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제는 육의 가정이 아니라 영의 가정,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놀라운 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놀라운 이 비밀을 깨달음으로써, 많은 자녀들이 있음에도 아들 예수의 말에 순종하고 요한의 집에 거주합니다.

요한 역시 자기 어머니 모시기도 힘든 마당에 예수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 모시듯 평생을 모시면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유무상통의 참된 가정과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는 예언 역시 이루어졌습니다.

10. 마리아가 창세기 3장의 여자와 다르지 않듯, 이 땅 모든 여성은 창세기 3장의 여성과도, 2천년 전 마리아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여자와 같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과 헌신으로 비수로 마음이 넝마같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십자가 옆에 있는 수많은 마리아들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요 위로임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요한의 가정이나 예수님의 가정이 다르지 않음 역시 깨닫게 됩니다.

류한승
▲‘꼬마 목사’ 류한승 목사와 어머니. ⓒ교회 제공
11.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하며 마치려 합니다. 목회를 한다는 것은 때로 가정을 육신적인 면에서 상당부분 등져야 함을 느끼곤 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제가 목회를 하면서 남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아보인다 할지라도, 제 가장 연약한 부위가 어디인지는 어머님만 아십니다.

달꿈예술학교가 생기기 전부터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나 교회에서의 일반 목회를 구분하지 않던 제가, 목사로서 아침부터 밤까지 수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들인 저를 보면 12살 된 예수를 대하던 애타는 마음만 가득한 것은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평생 사시던 집을 학교 건물과 기타 용도로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로 사용할수 있게 하심으로 수시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 아들과는 대화할 시간조차 없는 것은 물론이고, 손님들이 많을 때는 조용히 집에 계시며 아래로 내려오지도 못하십니다.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라고는 그저 밥이라도 손수 차려준 밥상으로 한끼 먹기 바라는 마음이십니다. 그러다 또 쓰러질까 두려운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사람들 틈에 있는 저의 사역에 방해될까 말 한 마디 못하고 조용히 쉬라고 문자를 보내시는 분이 어머니이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제 생명을 살려주셨음을 알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생명을 갉아 먹으면서까지 아들을 사역 가운데
던지고 싶지 않은 이유 또한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토록 낳고 싶어하셨던 아들을 낳은지 불과 4년만에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부르짖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대체 왜 이런 일을 제가 당해야 합니까?”

꽃과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지금의 어머니는, 젊은 날 사고 후 한 순간도 병상을 떠나는 일 없이 눈물로 그 자리를 지키셔야 했음을 저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휑한 광야 같은 마음을 알면서도 5살 꼬마 목사일 때나 지금이나, 부모님 마음에 비수 같은 말을 할 때가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이 같은 상황이 저만의 것이 아님도 종종 발견합니다.

다른 사역자와 함께 차를 타고 집에 가서 저녁이 넘어서면, 부모님으로부터 오는 전화 소리를 듣습니다. 대부분의 대화 내용은 비슷합니다.

“너 언제 오니. 왜 안 오니?” “밥은 언제 먹을래?”

교회 사역을 할 때나 학교 사역을 하면서 섬기시는 분들이 동역해나갈 때, 저는 직접 듣지는 못해도 그 분들의 가족들의 원망 어린 호소가 가끔 마음에 들립니다. “왜 그렇게 힘들게 하니?” “얼른 와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

부모님의 전화에 “먼저 식사하세요”, “저 늦어요”, “그냥 있어요”라고 무뚝뚝한 대답을 해야하는 사역자나, 아무 말 없이 “이따가 가요”라고 말하는 동역자들의 모습 속에서, 저는 오히려 가족들을 향한 무한한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고는 합니다.

묵묵히 견디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동역자들의 고독한 모습이 저와 전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그 가족들이 느껴야 할 공허함또한 제 부모님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였습니다. 여인의 아픔은 마리아 한 사람의 아픔이 아닌, 창세기 3장 우리 한 어머니의 마음이요 아픔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눈물은 우리의 눈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 예배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마음 한 구석 예수님에 대한 구멍난 상처가 있다면, 십자가 앞에선 마리아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남은 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어머니,아버지, 아들, 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으심으로 전혀 다른 두 가정을 하나되게 만들어주셨듯, 우리 역시 서로와 서로 영적 가족이 되어 위로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찬 바람이 분다고 훈풍이 부는 곳으로 나무가 옮기지 않듯, 오히려 그 때 자기를 비우며 메마른 가지가 될 때, 그 순간 나무는 봄을 머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어떤 고통도 인내하면 꽃피우는 나무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자기 육신을 허물며 새로운 영적 가족으로 초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