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오래 전 같은 교회에서 남선교회 회원으로 함께 봉사하며 친근하게 지냈던 분을 오랜만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서리집사로 열심히 섬겼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교회로 가셨던 분입니다. 거기서 장로님이 되셨는데, 그 분의 자녀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도 했습니다. 그 후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사무실에 한 번 놀러오라고 해서, 그 날 바로 그 분의 사무실을 찾아간 것입니다.

저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에, 저는 그 분이 혹시 유사 종교에 빠지신 분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잠시나마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했기에 그 분의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오랜만에 과거 이야기로 깊어가나 싶더니만, 느닷없이 성경 구절을 외우며 저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계속해서 따지며 묻는 말에, 저는 ‘저 분이 이단 사이비구나’ 확신하며 그 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그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주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하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셨을 때 고아와 과부, 그리고 병든 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억눌림을 당하며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신 그 모습들을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애쓰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 아닙니까? 그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구원은 성경 지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보고 듣고 믿는 데서 오는 것 아닙니까?

대답하기 어렵고 곤란한 성경구절을 외워서, 좀 나약하다고 생각되는 성도들에게 물은 다음, 마치 성경 속에 담겨 있는 말씀을 다 아는 것처럼 혼란스럽게 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자신의 단체로 끌어들이려는 수법 아닙니까? 그리고 왜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 골라서 유혹을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말씀드린 후, 그 사무실을 빠져 나왔습니다. 성경 지식이 부족한 성도들의 경우, 그런 분들의 질문과 언변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다음에는 자기 교회 목사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그리하겠다고 약속을 한 후 그 분의 사무실을 빠져나왔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성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이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초대하는 거룩한 곳이기도 합니다.

사이비 이단들의 성경 지식만으로 초대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며 어떠한 믿음으로 부르고 계시는지를 깨닫고, 그것에 화답하는 우리의 삶이 바로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부르심에 즉각 따르는 것이 순종이라 하겠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 그 분의 지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믿음의 권속자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오만함과 교만함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그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주님께서 나타나셨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다. 하나님의 성소를 박해했기 때문’이라고 고린도 공동체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자신을 부르시며 찾아오신 예수님에게, 베드로는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엄청난 물고기가 잡히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회개를 합니다.

구해줘

이렇듯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이들을 당신의 사람으로 지금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대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과의 만남, 주님과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소명은,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살아내신 하나님 나라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갑(甲)이 되어야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늘의 현실 앞에서도, 우리 주님께서는 보잘 것 없지만 세상의 깨어있는 을(乙)들을 당신의 도구로, 사람 낚는 어부로,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을 어렵게 생각하며, 예수님의 부르심에도 가까이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양, 교만의 극치를 부립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가벼이 여기는 데서, 교만의 온도는 더욱 올라가고 있습니다.

물 위로 걸어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배’에서 물 위로 걷던 베드로였지만, 결국 세상의 거친 파도와 풍랑, 두려움 때문에 다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부르시는 다정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절대적 권위와 세상에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아가페 사랑이 있음을,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부모가 자식들을 부르는 것과 매한가지일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재롱을 피울 때, 아마 모든 부모들이 매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도, 이와 같이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찾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많은 학문과 지식, 권위나 권력, 그리고 명예와 부, 상석 등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가 낮고 천할지라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를 위해 땀이 피범벅 되도록 기도하셨던 그 주님을 생각합시다.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기도를 묵상합시다.

그 주님의 마음을 읽고, 그 뜻을 따라 날마다 믿음의 재롱을 피우는 하나님의 귀한 종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