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원 교수가 강의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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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원 교수는 “위그노(Hoguenots)라는 이름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플란더 지역에서 성경공부를 위해 비밀리에 집에서 회합하던 자들을 ‘Huis Genooten’, 즉 ‘집 친구들(House fellows)’로 불렀다는 설이 가장 일반적”이라며 “이 말은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 개혁파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됐고, 개혁파 그룹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1572년 개신교도들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진 성 바돌로매 성일 전날까지 프랑스 국민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왕성했다”고 소개했다.
서 교수는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의 영향이 급속도로 기울고 유럽 전역으로 망명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성 바돌로매 성일의 대학살이 기폭제였다”며 “1545년 처음으로 칼빈주의 마을이 Meaux에 세워지고, 프랑스 전역과 인근에 무려 1백만명의 개신교도들이 존재했다. 1561년 프랑스 개신교 교회는 2,500여곳에 달했고, 목사들 대다수는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자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성 바돌로매 축일에 파리에서만 1만명 살해돼
1598년 ‘낭트 칙령’ 선포됐으나… 박해 지속돼
이어 ‘위그노의 역사’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발로와 왕가 출신 9번째 왕 프랑수아 1세가 1547년, 그 후 앙리 2세가 1559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프랑수아 2세가 1560년 16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10세의 어린 동생 찰스 9세가 왕위에 올라 섭정이 요구됐다. 이때부터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충돌이 이어졌다는 것.
섭정 후보는 법적으로 위그노 지도자인 앙뚜완 드 부르봉(Antoine de Bourboon)가가 맡아야 했으나, 선왕들의 모친인 메디치가의 까트린(Catherine de Medici)이 나섰다. 그녀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로서 교황과 스페인 왕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개신교주의 전염병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 사실을 안 위그노들이 파리로 진군해 오자, 겁이 난 그녀는 1561년 위그노들과 비밀 평화조약을 맺고 그들에게 모든 마을에서 종교의 자유를 선사하고 4개 도시를 안전구역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의회가 반발해 양측간 긴장과 충돌이 지속됐다.
까트린 메디치는 부르봉가의 젊은 앙리가 발로와 왕가에 큰 위협이 될 것을 알고 자신의 딸 마흐게히트 드 발로와와 결혼을 시키려 했다. 날짜가 정해지고 위그노 귀족들이 파리에 왔는데, 결혼 전날 신랑의 모친이 갑작스레 사망했고, 위그노들은 그녀가 독살됐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현재는 유명 관광지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아름다운 곳이나 한 때는 위그노들이 신앙을 위해 갇혀 수모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1545년-1750년 동안 순교 당하지 않은 3,500명의 개신교인들이 갇혀 있다 노예선으로 끌려 갔던 이프(If) 섬의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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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1572년 8월 23일 새벽 2시, 교회 종들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대량학살이 자행됐다. 이날에 파리에서만 1만여명의 위그노들이 살해당했고, 교황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특별 기념 메달을 만들었다고 한다.
찰스 9세는 젊은 나이에 죽고 왕권은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에게 돌아갔다. 그는 위그노였으나, 파리에서 그의 즉위를 거부하자 3년 후 개신교도 됨을 포기한다. 그렇게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남았지만, 그는 수상으로 탁월한 위그노를 임명하고 위그노들에게 양심과 예배의 자유를 허락한다. 그것이 1598년 ‘낭트 칙령’이었다.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에 의하여 위그노에 주어졌던 종교적 관용은, 1681년 루이 14세가 위그노들을 강제 징집하는 드라고나드(dragonnade) 정책에 의하여 완전히 취하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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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선택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예배하기를 갈망
칼빈주의,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 적극 참여하길 원해
서창원 교수는 “위그노들이 그토록 많은 학살과 박해, 재산 몰수, 수감과 노예 생활, 가족 간 생이별 등 무수한 고난의 현실을 굴하지 않고 견뎌냈던 힘은 무엇일까. 물론 그들의 신앙이었다”며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갈망이 있었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그리고 그들의 신앙적 행위의 모든 기초는 그들이 붙든 칼빈주의 신학에 있었다”며 “위그노들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과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은 삶의 태도에서 발견된다”고 말했다.
그는 “칼빈은 성도들이 수도원적으로 경건하게 살기보다는,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적극 참여하며 사는 자가 되기를 권장했다”며 “그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사업이나 정치나, 반드시 순례자로 살아야 함을 가르쳤다”고 전했다.
또 “가난을 거룩한 현상으로 본 로마가톨릭 교회는 안정된 농촌 사회에 적합했고, 근검절약과 산업행위를 기본 덕목으로, 가난을 범죄로 여긴 개신교는 경쟁 사회에 적합했다”며 “칼빈주의자들은 사업과 동료들과의 사회관계 형성에 있어서도 매우 정직하고 고결하게 임했고, 그들에 의한 경제 발전은 정치적 변화도 촉진시켰다”고 평가했다.
▲주요 참석자들의 기념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포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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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포럼 측은 내년까지 2년간 ‘장로교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슬로건 아래 왈도파(Waldenses)로부터 시작돼 위그노(Hoguenots)로 이어진 프랑스 개혁주의 장로교의 역사와 교리를 연구할 예정이다. 오는 가을 세미나에서는 16세기 마르틴 루터보다 400년 가까이 앞서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부르짖었던 12세기 왈도파에 대한 강연이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