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자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일컬어진 것은(요 13:8; 현대인, KJV) 하나님이 그를 택자를 대신해 벌 받을 대속자로 세운 때문이다.

이는 단지 그에게 죄책을 면제시켜 주고 그의 게으름을 용인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삯 사망(롬 6:23)을 하나님께 내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죄인이 죽음으로 인정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죄삯으로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은 죽은 시체에 사형을 집행하도록 한 조선 시대의 ‘부관참시(剖棺斬屍)’와 같다. 죄인의 생명은 무가치하다. 따라서 그의 죽음도 당연히 무가치하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생명의 탄생이 아닌 죽음의 탄생이고, 그가 사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생명이 없는 그에겐 지불할 죄삯 죽음이 없다. 죽음은 오직 생명 있는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신 것은(요 3:16, 요일 4:9-10)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죄삯 사망을 지불할 수 있는 자격자이기 때문이다.

정결한 짐승만을 속죄물로 드리는 구약 예법(레 22:19)은 장차 점없고 흠없는 어린양 그리스도가 속죄 제물이 될 것임을(벧전 1:19) 예표했다.

2천년 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세상에 오신 것은 오직 죄인을 대신해 죽기 위해서였다. 동방박사들이 시체 방부제로 쓰이는 유황, 몰약을 아기 예수께 드려 경배한 것은(마 2:11) 죽음을 위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이다.

◈죽음에서 오는 생명


그리스도가 죄삯 사망을 대속(代贖, substitution)하신 것은 택자의 죄값을 속량하여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는 말을 피상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그 말을 대개 ‘사망에서 사망 나오고 생명에서 생명 나온다'는 동근동출(同根同出)의 의미로만 파악한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에서만 생명이 나온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죄인의 세계는 '생명이 생명을 준다'는 원리보다는 '죽음이 생명을 갖다 준다'는 원리가 더 적합하다.

죄인의 세계는 죽음 없인 생명을 논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생명’이라는 말은 그가 ‘참 죽음’이라는 뜻이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참 죽음’이 오신 것이다. 그가 ‘참 죽음’으로 오셨기에 그가 죄인에게 ‘생명’일 수가 있었다(요 1:4).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죽음’이 되므로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요 6:48)으로 왔다’는 것은 그의 생명이 죽음으로 왔다는 뜻이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므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죄인들에게 먹혀짐으로 죄인이 생명을 얻도록 했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 값이 되니,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죽음’을 위하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셨다. 이처럼 죄인들의 세상에서는 ‘생명’과 ‘죽음’이 같은 것이 된다.

따라서 인간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무관심한 채 생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모순이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산 예수’에게만 몰입하는 이들은 죽음에서 생명이 오는 ‘신법(divine law)’을 모르는 자들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사람들이 이끌린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매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바꾸어 말하면,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려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며,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에 매료되는 자 역시 기독교인이 아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멸망의 시금석이다. 구원 얻을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생명의 향취이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반면에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그것이 사망의 향취이며 미련하게 보일 뿐이다(고전 1:18; 고후 2:16).

많은 찬송시들이 십자가의 향취를 노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 주님 입으신 그 옷은 참 아름다와라 그 향기 내맘에 사무쳐 내 기쁨 되도다. 내 주는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때 나 눈물 흘리네(찬 87장).”

그리스도의 죽음,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생명과 구원을 말하는 것은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이다. 오늘도 강단에서 십자가 없이 생명을 세일(sale)하는 설교자가 얼마나 많은가?

◈신법(divine law)인 사망과 생명


세상의 죄 개념이 ‘윤리나 공공의 선에 대한 위배’로 정의됐다면, 기독교의 죄관은 하나님의 법 곧 ‘신법(divine law)’을 거스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전혀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죄가 되고, 세상에서 가장 큰 죄로 여겨지는 것도 기독교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이는 말 그대로 하나님 중심의 신법적(divine lawful) 죄 개념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 중심적인 신법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체결한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선악과(選惡果) 언약에서 명백히 드러났으며, 사망이라는 말이 여기에 최초로 등장한다.

만일 이 최초 원시 언약에서 사망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아마 인류에게 사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아담이 그 언약을 범했을 때 언약대로 사망이 그에게 왔다.

이는 선악과(창 2:17)에 사람이 먹으면 죽는 독이 들어서가 아니고, 율법을 어긴 댓가로 온 법적인 결과였다(엡 2:1). 생물학적인 사망은 법적 사망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 사망의 법적인 효력은 아담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아담의 모든 후손 곧 온 인류에게까지 미쳤다. 이는 아담의 언약이 온 인류를 대신한 대표언약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 원리는 세상 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법 개념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 아담의 대표(대리)성 원리는 생물학적인 유전 법칙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고, 오직 법적인 차원에서만 이해가능하다(실제로 정통 신학자들은 죄의 유전을 생물학적인 유전원리로 설명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는 법적인 인과 관계는 생물학적이고 유전적인 인과 관계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 좋은 실례가 ‘양자됨(養子, adoption)’이다.

법에 의거한 ‘양자됨’이 생물학적이고 유전적인 관계와는 상관없이 남남(他人) 사이에서 법적으로 생성된 관계이듯이, 머리(대표)에 의한 ‘죄와 의(義)의 전가’는 오직 법적인 차원에서 성립된다.

또한 ‘죄는 인간이 범하고 죄벌은 그리스도’가 받게 하신 대속(代贖, substitution)의 경륜은 '죄를 지은 자가 벌을 받는다'는 세상법을 뛰어 넘은 초월적 신법(divine law)이다.

이 대속은 짐승 제사를 통해 백성들의 죄를 사함 받게 하신 구약 제사법에서 이미 나타났으며, 이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밝히 드러났다.

또 기독교에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을 지옥 갈 죄로 규정한 것 역시 신법의 극치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죄관(罪觀)으로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초월적 죄 개념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8-9).”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사죄, 칭의 역시 모두 신법적(divine lawful) 행위이다. 바울과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이후로, 개신교회가 숱한 반대자들을 극복하고 ‘칭의’를 법정적 선언(judicial declaration)으로 채택해 온 것은 하나님의 신법에 충실해 온 결과이다.

전혀 하나도 의롭지 않은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롬 3:28)’ 이 교리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핵심이고(롬 4:7-8), 교회를 세우고 지탱하게 하는 생명의 교리이다.

우리가 오늘도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도리를 생명처럼 파수(把守)하는 것은 공격자들의 비난처럼, 편의성을 쫓은 임의적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신법(divine law)에 복종하기 위함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