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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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13:31-35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견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거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인 바, 새로운 계명으로서 사랑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은 새로운 계명을 당부했습니다. 부활절이 지난 가운데, 이 말씀을 배경으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존재의 다름을 수용하라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4절)”, 새로운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유언과 같은 당부를 하시며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계명의 차원에서 주님의 당부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계명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옛 계명은 구약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새로운 계명은 신약의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의 집약입니다.

이 사랑에서 우리는 존재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존재의 다름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초 선풍을 일으켰던 판타지 중에 이영도 씨의《드래곤 라자》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다름’ 이라고 합니다. 소설에서 작가는 인간 본성에서 가장 큰 문제를 “자기와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변하는 대신 상대방을 자기의 상식에 맞춰 변화시키려고 애쓰다가 결국에는 좌절하고 분노하면서, 급기야 폭력으로 이를 해결하려 합니다. 이는 우리가 타인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다름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라

34절을 다시 읽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여기서 사랑은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라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대 비교적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교하면서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면,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가 더 심합니다.

외국에 근무하는 30대 젊은이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4년간 20개국 넘는 나라 사람들과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동료들과 하루에도 4-5시간씩 토론하고, 어떨 때는 같이 식사하고 술 마시면서 일을 하는데, 너무 편하답니다.

그들 모두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존재의 경험, 경영적 판단을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의 창의성과 기술을 믿고 인정하지만, 그들의 성과는 모두 다르므로 그들의 연봉은 모두 다르고, 심지어는 크게 2배까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 중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비하하거나 능력이나 학벌에 의혹을 제기하지 않는답니다. 본인들의 능력을 더 발휘해 자신도 인정받고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할 뿐이랍니다.

그는 글의 말미에 한국인들처럼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어떻게든 끌어내려 자기에 맞추고자 하는 인성을 지닌 사람들은 못 봤다고 합니다. 그는 우리 같은 사람을 정말 만나려 해도 만나기가 힘들었다고 마무리해서, 조금은 씁쓸하였습니다.

이는 물론 개인적인 의견일 수 있지만, 우리가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음을 지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잘못된 행동을 용서하라

34절을 다시 읽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이는 잘못된 행동을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비난하고 모욕하기보다, 이해하고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듯, 타인을 용서한다는 것은 전에 받은 상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지난날에 상처를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제3자는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니까요.

유태인 6백만 학살을 독일의 히틀러나 나치들은 용서할 자격이 없고, 오로지 유태인의 후손만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용서하는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용서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흠과 티가 없이 고결하게 살았던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에게 가장 빛나는 하이라이트의 순간이 있다면, 그가 자기를 팔아넘겼던 형제들을 용서하는 장면이라고 해야 합니다.

요셉이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당한 끝에 승리하여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멀리 가나안에서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을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4. 정리

주님 유언의 당부는 사랑이었습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며, 교회는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반문해야 합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심판대에서,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서로 사랑했는지를 물으실지 모릅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서 저와 여러분은 사람을 사랑하여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우리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우리로 존재의 다름을 수용하게 하소서, 우리로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로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용서하게 하소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 유언의 당부를 받들어 지키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