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yggve N. D. Mettinger(트리그비 메팅거)는 스웨덴 룬드대학교 고대언어 및 구약 교수이다. 그의 책 <부활의 수수께끼: 고대 근동에서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들(The Riddle of Resurrection: ‘Dying and Rising Gods’ in the Ancient Near East)>은 고대 몇몇 남성 신들, 바알, 멜카르트, 아도니스, 에쉬문, 오시리스, 두무지 등이 실제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다룬다. 본서는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추가로 짧은 에필로그를 담고 있다.

1장은 거의 책의 1/5을 할애하여, 전체적인 연구사를 다룬다. 1장 제목 그대로, 제임스 프레이저 경(1906년 <황금가지>)의 연구부터 조나단 스미스의 연구(1987년의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사전(Encyclopedia of Religion) 항목 중 ‘dying and rising gods’)에 대한 추적이다.

제임스 프레이저 경은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이 있다는 것이고, 조나단 스미스는 이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며 몇몇 신은 심지어 기독교 저자들의 오독 내지 그 이후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각각의 입장은 학자들마다 점점 더 거센 논란으로 들어간다.

조나단 스미스의 연구는 힘을 얻어, 마크 스미스와 H. -P. 뮐러에게로 계승된다. 예를 들어 뮐러 역시 조나단 스미스와 비슷하게, 비기독교 고대에는 결코 기독교의 부활절과 유사한 것조차 알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많은 비교 종교학자들과 성서 연구자들도 역시 그러한 입장에 현재 서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프레이저는 아도니스를 죽음을 겪는 신으로 보았고, 또한 그를 탐무즈와 동일시했다. 아도니스 축제는 알렉산드리아와 비블로스에서 있었다. 두 지역의 아도니스 축제에서 아도니스를 위한 애도의 날뿐 아니라, 부활을 기념하는 날도 있었다.

그래서 프레이저는 심지어 기독교의 부활 축제가 아도니스 부활 축제와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프레이저의 입장과 유사하게 W. Baudissin이라는 학자는, <아도니스와 에쉬문: 부활신에 대한 믿음과 치료신에 대한 믿음의 역사에 대한 연구(Adonis und Esmun: Eine Untersuchung zur Geschichte des Glaubens an Auferstehungsgotter und an Heilgotter)>라는 책을 통해,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부활신에서 사람들을 구원/치료하는 신으로의 발전에 대해서 조사했다.

여기서 그는 첫째를 아도니스, 둘째를 에쉬문으로 보았다. 따라서 두 학자는 모두 아도니스를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신의 운명은 분명히 계절 주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저자인 메팅거는 이러한 논지를 따라, 논란이 되는 탐무즈, 아도니스, 바알이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인지에 대한 연구사를 더 살펴나간다.

두무지/탐무즈의 경우, 중요한 연구가 바로 짐머만(Zimmerman)의 것이다. 짐머만의 영향으로 많은 학자들은 마르둑의 죽음과 부활을 인정했고, 때로는 마르둑과 탐무즈가 동일하게 죽음을 겪는 신의 모습을 띈다고 주장했다.

또 고대 근동 예술 속에서 탐무즈를 연구한 무르트가트(Moortgat)는 수많은 수메르와 바벨론의 조각물들에서 탐무즈를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을 포괄하는 비의적 신비 의식에 대한 상징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다.

하지만 후속 연구들은 그러한 두무지/탐무즈의 부활에 대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아도니스의 경우 네 명의 주요 연구자가 있는데, 각각 드 보(de Vaux), 람브레히츠(Lambrechts), 바그너(Wagner), 빌(Will)이다.

드 보는 아도니스의 축제에 관해 알렉산드리아 밖에서는 신뢰할 만한 증명이 없고, 2-3세기 이전에는 지켜지지 않았으며, 그것은 심지어 오시리스 제의로부터 후대에 차용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람브레히츠도 유사하게 주장했다.

귄터 바그너도, 아도니스의 부활 개념은 혼합주의, 특별히 기독교와의 경쟁 및 오시리스 제의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으로 매우 늦은 후대의 것(즉 기독교 이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빌도 다른 저자들처럼 아도니스의 부활은, 오로지 후대 기독교인들의 저술(오리게네스와 키릴로스)에게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즉 본래 그렇지 않은 아도니스 축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오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바로 조나단 스미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대다수 학자들은(Atallah, Detienne, Burkert, Ribichini 등) 특별히 아도니스를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으로 보지 않는다.

바알의 경우, 중요한 연구는, T. H. Gaster, W. H. Schmidt, J. C. de Moor, Gibson, A. Waterson, John Day 등의 것이 있다. 이들은 모두 각각의 훌륭한 연구를 해냈지만, 바알 신화 해석에서는 너무도 입장이 다르다.

바알이 분명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바알의 죽음은 일종의 눈속임이라는 것, 혹자는 눈속임이라 하기에는 우가릿 자료 해석의 문제가 있다는 것, 심지어 죽음을 겪는 신이 아니라 사라지는 신(마치 Telepinu처럼)이라는 등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장 최근에 마크 스미스는, 〈The Death of ‘Dying and Rising Gods’ in the Biblical World〉라는 에세이를 통해, 위의 신들이 모두가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에 맞지 않다는 논증을 해냈다.

이러한 연구사를 거쳐, 저자인 메팅거는 논란이 되는 신들의 제의와 신화를 조사하여, 실제로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그전에 앞서 메팅거는 몇 가지 개념을 정리해야 함을 당부한다.

첫째, 다루는 것이 ‘신’이어야 한다는 점(심지어 이전에는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둘째, ‘죽음을 겪는다는 것(dying)’과 살아난다는 것의 의미는 포괄적이라는 점.

셋째, 신의 운명이 계절 순환과 반드시 연결될 필요는 없다는 점.

넷째, 신의 운명과 관련된 축제가 반드시 연결될 필요는 없다는 점.

특히 둘째 사안과 관련해, 죽음을 겪는다는 것은 현실적이거나 기독교적인 의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음부강하(descensus)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육체’의 상태도 부활에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 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도 숙지시킨다.

또 서쪽 셈족, 메소포타미아 종교들과는 다소 달리, 헬라 세계에는 삶과 죽음의 영역이 매우 날카롭게 구별되어 있었다.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의 범주가 헬라 문화와 다르게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가 덜한 맥락에 더 자연스럽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고대 근동의 신들이 헬라 종교의 상징 세계에 통합돼 주요한 변화를 겪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저자의 조사에서 명쾌하게 드러나게 된다.

한편 저자가 중요하게 상기시키는 것은,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결코 종교 의식들의 의미가 본질적이지 않다는 것, 즉 어떤 규정적인 하나의 ‘맞는’ 의미가 있지 않다는 것이며, 이는 단연코 본질주의자들의 오류라는 것이다.

또 결코 신화와 종교의식이 동시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경고한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언어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메팅거는 실례로 마사이족의 제사에 관한 그들의 믿음을 든다. 어느 마사이족이 말했다.

“우리는 신이 하늘에 거하심을 혹은 존재하심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께 제사를 지낼 때 우유를 위로, 하늘로 뿌리기 때문입니다.”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신화, 종교 의식의 세계다!

기본적으로 신화는 내러티브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루는 것은 초자연적인 무엇이다. 신화는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을 할 수도 있고, 당시 사회 무엇(왕권 등)의 정당화 기능을 할 수도 있으며, 현상에 대한 설명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을 명쾌하게 구별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신화의 기능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저자가 우리에게 정직하게 밝히는 것은, 이러한 신화나 종교 의식에 관한 의미를 찾는 해석들 중 무엇이 맞는지 검토해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범주에 드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상당히 제한적인 연구만 가능할 뿐이다.

바알

바알은 폭풍의 신 혹은 날씨의 신이다. 이 바알을 다루는 신화적 문서와 제의 문서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최근의 것이다(Keilschrift Texte aus Ugarit, KTU를 통해 우가릿 문헌을 볼 수 있다). 저 두 텍스트는 서로 다른 부류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바알과 모트를 다루는 텍스트부터 살펴보자. 바알과 모트간의 대결 텍스트는 사실 큰 손상이 있다. 약 40행간이나 손상되어 있다.

중요한 부분만 말하자면, 바알은 모트의 초대를 받아 지하 세계로 내려가고 모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그리고 바알은 암소를 타고 자손을 낳는다. 그리고 40행간 정도가 소실되어서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바알의 죽음이 엘에게 알려진다. 또한 이를 들은 아낫과 샵슈는 바알의 시체를 수습한다. 샵슈의 도움으로 아낫은 바알의 시체를 사판 산에 묻는다. 그리고 바알의 후계자를 찾는 일이 엘과 아티랏을 통해 이루어져 아타르가 선택된다.

아낫은 모트를 찾아가 바알을 해방시켜 달라고 하지만, 모트에게서 바알이 삼켜졌다는 것을 듣자, 아낫은 모트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문헌에 의하면,

그녀는 칼로 그를 자르고
키로 그를 키질하고
불로 그를 불태우고
맷돌로 그를 갈아서
땅에 뿌렸다

어쨌든 엘은 바알이 살아나는 꿈을 꾸고, 결국 바알은 다시 되돌아 온다.

바알은 분명 죽음을 겪었다. 그의 죽음의 상징으로 텍스트는 가뭄을 말하고, 그의 되살아남의 상징으로 가을비를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이 저 빈 내용을 채우기 위해 내세우는 주장이 바로, 바알의 대속물이 바알을 대신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증거는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문맥은, 특히 이어지는 내용은 바알 자신이 모트의 영역으로 갔고(죽었고) 다시 되살아 났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모트 스스로가 아낫에게 자신이 바알을 삼켰음을 말한다.

고대 근동 종교에서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것은 명백히 죽음에 대한 은유다. 그리고 신들도 바알의 죽음을 인지하고 슬퍼했다.

바알은 죽었다. 엘의 꿈과 가을비는 바알이 더 이상 죽음 가운데 있지 않고 살았으며 존재함을 의미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왕실 장례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바알의 죽음은 가뭄과 관련되어 있다.

즉 이 신화의 목적은 가뭄의 끝을, 더 넓게는 계절 순환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바알 축제의 헌주 의식(libation rite)이 또한 이를 보증한다.

한편 바알의 이러한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으로써의 성격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특별히 조나단 스미스, 마크 스미스, 헤어 등)은, 바알을 죽음을 겪는 신이 아니라 단지 사라지는 신의 범주에 넣으려고 한다.

하스 같은 학자는 두 범주를 동시에 사용하여 바알을 묘사한다. (“Er gehort somit zu den verschwindenden oder sterbenden und wieder auferstehenden Kulturpflanzengottem des Typos Dumuzi, Attis, Tammuz und Adonis.”)

이 ‘사라지는 신’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히타이트의 텔레피누 왕이다. 하지만 두 신화 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알은 모트의 지하세계로 초청을 받지만(죽지만), 텔레피누는 스스로 분노하여 어디론가 사라질 뿐이고, 지하세계로 내려간다는 말도 없다. 그리고 두 신화 간의 어떤 실제적인 접촉이 있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바알-모트 신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알을 대신해 어떤 무엇이 죽었다고 할 수도 없고, 바알이 죽음을 겪는 신이 아니라 사라지는 신이라고 보기에는 개연성이 낮다는 점이다. 따라서 바알은 죽음을 겪고 부활한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멜카르트-헤라클레스

두로의 멜카르트는 바알의 자손 중 하나이며, 비블로스의 아도니스와 쌍을 이룬다. 이 멜카르트는 죽음을 겪고 부활한 신으로 숭앙되었는가?

헤로도토스는 두로를 여행한 기록을 남겼으나 멜카르트의 부활 축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헬라의 작가들은, 페니키아의 신들을 언급할 때, ‘두로의 헤라클레스’를 말한다.

물론 헬라의 헤라클레스와 두로의 멜카르트의 접촉에 대한 직접적인 고전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멜카르트에 대하여 아는 것은 많지 않음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우선 다루어야 하는 것은 ‘장작더미’에서 불타 죽은 신의 개념이 페니키아 본토에서 중요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헤라클레스와 멜카르트 양측에 해당하는 내용이며, 따라서 둘 다 ‘죽음을 경험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부활을 한 신이기도 한가? 이를 위해 ‘신을 깨우는 자(mqm, ’lm, 혹은 egersis)’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요세푸스의 고대사(Antiquitates)를 보면, 두로의 기록을 페니키아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에베소의 메난더를 인용한 두로 왕 히람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거기 보면, 두로 왕이 헤라클레스와 아스타르테/이슈타르를 위해 옛 신전을 허물고 새 신전(들)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뒤이어, 이렇게 표현한다.

“Prōtos te tou Herakleous egersin epoiēsato en tō Peritiō mēni.”

이 부분은 “그리고 그는 페리티우스의 달에 헤라클레스의 깨어남을(egersin) 처음으로 축하했다”로 번역할 수 있다.

요세푸스가 말하는 것은 두로의 헬라클레스 즉 멜카르트이고, 따라서 간접적으로 그의 부활에 대해 언급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암만 석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신의 에게르신’은 부활과 연관되어 있었다.

셈어에서 ‘신을 깨우는 자(mqm, ’lm)’는 다양하게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이것의 해석 가능성은 다양하다. 예를 들면 종교 의식에서 신의 부활을 가져오는 자를 의미할 수 있다.

히브리어 qwm(쿰)은 또한 잠에서 일으킴 혹은 죽음에서 일으킴, 둘 다 관련이 있다(사 26:14, 19, 호 6:2, 시 88:11, 욥 14:12 등. 벤시라 48:5 참고).

멜카르트 신화들에 의하면, 그는 괴물에 의해 죽임당하거나 장작더미에 불타 죽었다. 그의 부활 축하 의식에 대한 증거로는 요세푸스의 간접 증언뿐 아니라, 그의 별명에 대한 초기 셈어, 심지어 페니키아와 카르타고의 기타 자료에서도 얻을 수가 있다.

또한 네 개의 그림이 그려진 시돈의 꽃병을 보면(현재는 소실되었고, 소실되기 전 스케치만 남아있다), 비록 순서를 확신할 수는 없어도, 장작더미에 불타 죽었으나 다시 되살아나는 멜카르트를 확인할 수 있다(The Riddle of Resurrection 100쪽 그림 참조).

또한 프리지아에서 발견된 페니키아 석비에도, ‘신의 장례의 한 날에(bym qbr ’lm)’라는 표현이 있다. 남성 명사 형태이므로 여신은 아닐 것이다.

이 발견 지역은 주로 페니키아의 멜카르트 제의 유물이 많이 있으며, ‘krr 달’이라는 종교력이 언급돼 있고, 이 석비에서는 아스타르테도 언급된다.

기원전 4세기의 에우독소스는 페니키아인들이 메추라기를 두로의 헤라클레스에게 바쳤다고 한다. 또한 그에 의하면, 두로의 헤라클레스는 티폰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올라우스가 헤라클레스를 소생시켰다. 위의 꽃병 그림에서 볼 수 있듯(D), 소생한 신은 새를 들고 있다.

멜카르트는 분명 죽임을 당한(티폰에 죽임을 당했든, 장작더미에서 불타서든) 신이다. 그리고 멜카르트는 다시 생명을 얻었다. 이는 어원학적인 증거나 사료적인 증거로 추론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멜카르트의 불에 의한 죽음과 부활은, 당대 사회 속에서 소각(incineration)이 중요했음을 암시할 것이다.

부활 도상
▲헨드릭 테르브루그헨(Hendrick ter Brugghen), 1622.
아도니스

아도니스는 복잡한 존재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헬라의 아도니스와 레반트의 아도니스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헬라의 아도니스에 관해 우리는 그가 신이 아니라 해야하겠으나, 레반트의 아도니스에 관해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 아도니스의 부활은 기독교 시대 이후의 자료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 차례로, 헬라, 이집트, 레반트의 순으로 살펴보자.

헬라에는 아도니스를 기리는 아도니아라는 축제가 있다. 가장 이른 증언이 기원전 600년 경의 것이다. 이 축제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지붕 위에서 여자들이 아도니스를 위한 애가를 부르고, 춤을 추며, 화로다 라고 외치며, 아도니스를 위하여 가슴을 친다. 오비디우스도 비슷한 언급을 한다.

그리고 로마 역사가들도 아도니스 축제를 불길한 징조로 묘사한다. 7월 말 이루어지는 이러한 아도니아는 아도니스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도니아에는 아도니스의 부활에 대한 그 어떤 암시도 없다.

헬라 신화 속의 아도니스는 어떠할까? 신화 속에는 두 가지 유형의 그에 대한 죽음이 있다. 하나는 사냥을 하던 아도니스가 멧돼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인이었던 아도니스를 아프로디테가 하데스-플루톤의 연인인 페르세포네에게 맡겼는데, 페르세포네가 아도니스를 돌려주기를 거부하자, 제우스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년 중 일부는 페르세포네와, 또 남은 일부 기간은 아프로디테와 있게 한 것이다.

이를 신화학에서는 바이로케이션(bilocation,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 즉 헬라 신화나 제의에서 우리는 아도니스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부활은 확신할 수 없다.

아도니스 제의가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 종교 의식과 결합을 했다는 것이다. 이틀에 걸친 아도니스 제의는, 첫째 날은 아도니스의 결혼을 축하하고 둘째 날은 아도니스의 죽음을 기린다.

하지만 Gustave Glotz는 파이윰의 Pap. Petrie 3. 142에서 확장된 이집트 아도니스 축제를 확인한다. 즉 셋째 날, diektērion의 날이고, 아마도 아도니스의 부활의 날일 것이라는 주장이다(M. Stol이 Glotz의 주장을 확장한다).

최근 연구들은, 헬라 아도니스의 고대 근동(레바논)적 배경에 초점을 맞춘다. 몇 가지 논거들을 살펴보자.

‘아도니스’라는 이름은 셈어의 n’mn로 보이며, 이는 일반적인 셈어의 신명 ’dn(주)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우가릿 문헌에서 ’dn은 얌, 엘, 그리고 왕들에게 적용된다. 헬라어의 -is(-이스)는 명사 형태를 위한 것일수도 있고 서쪽 셈어의 1인칭 단수 대명사 접미어(나의)를 반영할 수도 있다.

서쪽 셈어에서 ’dny(아도나이)는 ‘나의 주님’이다. 아도니스의 부모도 그러하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아도니스는 포이닉스와 알페시보이아의 아들이다. 아폴로도루스에 의하면 아도니스는 앗시리아의 왕 티아스와 그의 딸 스미르나의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자이다.

아도니스 의식은 특이하게도 ‘지붕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헬라 종교에서는 상당히 낯선 것이지만, 가나안 종교에서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으나 인생 후반을 카이사레아에서 보낸, 기독교 저자 오리게네스는 헬라인들이 아도니스라 부르는 신이 유대인들과 시리아인들이 탐무즈 신이라고 하며, 마치 아도니스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 것처럼 즐기는 축제가 있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라는 또 다른 기독교 저자도 역시 카이사레아에서 삶의 많은 부분을 보냈는데, 그도 역시 에스겔 주석에서 히브리어와 시리아어로는 탐무즈라 하는 존재는 바로 아도니스이며, 6월에 그가 부활했다는 식의 축제가 있다고 말한다(아마 6월은 7월을 착각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몇몇 종교학자들의 오해처럼, 오리게네스와 히에로니무스가 이교도들이 기독교 축제를 따라했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2세기) 루키아노스(아마도 실제 루키아노스의 것은 아닐 것이다)의 〈De Dea Syria(시리아의 여신에 관하여)〉라는 글에, “다음 날, 그들은 아도니스가 살았다고 외쳤고 그를 밖으로 보냈다”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무덤에서 밖으로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시리스 제의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한다.

분명한 것은 아도니스 제의 참여자들은 아도니스의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도 선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저자들이나 De Dea Syria는 모두 기독교 시대의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이전 시대에 이미 아도니스가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증거가 있을까?

비블로스의 남신을 언급하는 아르마나 서신 84(비블로스의 립 하다가 보낸 편지)이 논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서신에 언급되는 남신이 아도니스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84:31-35의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May my lord send men to take the possessions of dDA.MU-ia to the king, my lord, lest that dog take the possessions of your God.”

‘dDA.MU-ia’는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는 탐무즈(담무)와 연결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블로스의 여인(the Lady of Biblos)’과 연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왕이 보낸 편지를 살펴볼 때, ‘살아계신 신’이라는 표현이 여성형(여신)이 아니라 남성형으로 되어 있으며, 비블로스의 여인을, ddamuia라고 표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담무라는 신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이미 잘 알려진 신이다.

따라서 이것을 비블로스의 여인이 아니라 담무(탐무즈)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Corine Bonnet는 비블로스의 바알에 대해 연구를 진행했다. 그녀는 기원전 10세기 경, b’lgbl이라는 표현이 예히밀크 비문(Yehimilk inscription) 사용되었음에 주목했다.

b'lšmm wb’lglb wmphrt ’lgbl qdšm
(바알 샤멘, 비블로스의 바알, 비블로스의 거룩한 신들의 회의)

그렇다면, b’lgbl과 ’dn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비블로스의 사람들의 이름을 조사해 보면, ‘바알’을 이름에 많이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b’lgbl는 남신이고, ’dn은 신의 별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비블로스의 기록은 dDA.MU-ia이라는 표기로 비블로스의 신을 언급하는가? 담무와 두무지는 본래 다른 신이 었으나, 기원전 1천년기 수메르 찬양(balag)에서는 하나로 합쳐서 등장한다.

시리아-팔레스타인에서 알려진 담무는 신명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비블로스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자료에서 담무는 나무와 식물의 수액을 대표하는 식물의 신이다. 그는 지하 세계로 사라지지만, 다시 되돌아오는지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바로 담무를, 닝기쉬지다(Ningishzida)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기찌다(닝기쉬지다)는 탐무즈와 함께 아다파 신화에서 천상의 안누의 문에 서 있다. Edzard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한다.

“따라서 닝기쉬지다는 두무지와 지하세계에서 일시적으로만 머무르는 신의 특성을 공유한다.”

분명히 담무는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되돌아왔는지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담무는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닝기쉬지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담무라는 신명은 죽음을 겪는 신을 가리키지만(아르마나 서신 84:33), 동일한 신에게 ‘살아있는 신(남성형)’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이다(아르마나 서신 129:51).

당연히 ‘살아있는 신’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해석에 열려있다. 또 아돈(이스)/아도니스, 담무, 두무지 간의 밀접한 관계는 특별히 비블로스가 아도니스가 혼합주의적으로 발전한 유적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우리는 아도니스와 관련해, 헬라 아도니스와 레반트 아도니스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도니스의 죽음과 부활 신화가 기독교의 모티브의 적용의 결과라는 주장은 거부할 수 있다.

에쉬문-아스클레피오스

시돈의 에쉬문은 두로의 멜카르트와 유사한 신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쉬문도 멜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기원전 약 5세기 신플라톤철학자인 다마스키오스는 에쉬문의 자기 거세와 소생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는 에쉬문을 페니키아 본토의 신으로 본다. 에쉬문은 청년 신으로, 여신 아스트로네(페니키아-카르타고에서는 아스타르테로 알려진)과 관계가 있다. 에쉬문과 아스타르테는 시돈의 커플 신으로 알려져 있다(기원전 약 5세기).

뇌트셔(Nötscher)의 연구에 의하면, 에쉬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절단됐을 뿐이다. 그래서 뇌트셔는 단지 절단과 회복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자기 절단과 신들의 어머니인 여신 모티브는 퀴벨레-아티스 제의로부터 온 것이다.

하지만 아티스는 본래 결코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신의 유형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신화 자료에는 아티스의 부활에 대하여 거의 침묵하지만, 제의에 관해서는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

어떤 두 남자가 대화하며 꿈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다마스키오스의 글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누군가 꿈을 꾸었는데, 자신이 아티스가 되어 힐라리아라 불리는 축제를 통해 숭배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꿈이 나를 하데스로부터 도망치도록 계시됐다”고 덧붙인다.

하데스로 내려가는 의식을 카타바시스(catabasis)라 한다. 이 카타바시스에 이어 회복 혹은 상승을 의미하는 힐라리아라는 축제가 이어진다. 확실한 것은 다마스키오스 시대에 이미 아티스는 죽었다가 그로부터 되돌아오는 존재로 믿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티스 숭배로부터 에쉬문의 소생이 유추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암시는 없을까? 소위 ‘에쉬문의 무덤(Qabr Šmūn, The Tomb of Eshmun)’이라 불리는 에쉬문 제의 장소가 있다. 장소의 이름부터 이미 에쉬문이 죽음을 겪는 신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에쉬문은 치료의 신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에쉬문(그리고 멜카르트)은 음식과 옷과 ‘부을 기름’을 가진 존재로 여기진다. 실제로 어원적으로 따졌을 때, 에쉬문(’šmn)이라는 이름에서 알레프를 떼면 기름(šmn)이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에서 기름은 치료약이었다.

런던 의학 파피루스(London Medical Papyrus, 이 텍스트는 아마 기원전 14-12세기 경의 것) 28번 텍스트에는 명백하게 에쉬문([’]-š-m-n)이 있고, 추정상 시돈에서 에쉬문의 배우자로 여겨지는 아스타르테(’-s-t-t-r)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33번에 보면 ‘나의 치료자(r-p-y)’라 불리는 신이 있다. 이 맥락에서 에쉬문은 치료자로 등장한다.

종합적으로 볼 때, 에쉬문은 본래 치유하는 신이었을 것이고(아스클레피오스 이전부터 어원적으로나 자료에 따라), 아티스 제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티스는 분명히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하는 신이지만, 에쉬문도 페니키아 본토에서 그렇게 숭배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오시리스

아비도스에는 ‘위대한 행렬(Great Procession)’이라는 축제가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여름 중순)에 열린다.

아비도스는 일찍이 이집트의 왕들이 묻히는 장소였고, 오시리스는 죽은 왕처럼 기념되었다. 이어지는 축제는 코이아크 달(거의 12월)에 열렸다. 코이아크 달 18-30일(혹은 후기에는 12-30일)에 이 축제가 열렸다.

24-30일에 장례 행사가 있고, 30일째 오시리스의 부활 상징인 제드(Djed) 기둥(심지어 제드 기둥은 오시리스처럼 의인화된다)을 세우며 막을 내린다.

오시리스는 본래 옥수수의 신이다. Dramtic Ramesseum Papyrus에 보면 “오시리스를 치라, 그 신을 빻으라: 보리”라는 표현이 있으며,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 보면, 오시리스는 곡물의 신 네페르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소위 ‘옥수수 미라(혹은 오시리스 침대)’라는 유물의 발견도 중요하다. 이 옥수수 미라는 흙과 씨앗으로 만든 오시리스 모형인데, 즉 죽은 자=오시리스=싹트는 옥수수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시리스는 부활하는 신인가? 모든 오시리스 세레머니를 관찰하는 학자들은, 특별히 Gardiner라는 학자는 오시리스는 죽음을 겪는 신(dying god)이 아니라 죽은 신(dead god)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지하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대 개념으로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다. 오시리스는 오히려 지하 세계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부활한다. 오시리스는 죽은 신이 아니라 죽은 자의 신이 된 것이다.

두무지/탐무즈

두무지/탐무즈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기원이 어찌되었건 신으로 숭배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무지는 비극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여름 중순의 축제에는 그를 위해 울고 애곡한다.

하지만 그를 위한 제의와 신화 사이에는 명백한 긴장이 있다. 두무지 신화에는 여신의 음부강화와 바이로케이션이 있으며, 이것은 계절 순환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미 기원전 3천년기에, 두무지가 죽었다가 되돌아오는 신이라는 신화적 증거가 있다는 사실이다.

움마(Umma)라는 지역에서는 열두 번째 달(겨울의 끝무렵)에 두무지의 귀환을 축하하는 증거가 있다. Cohen은, 움마에서의 이 축제는 두무지가 자신의 여동생 게스티난나와 교대하여 지하세계로 내려간다는 신화적 믿음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며, 따라서 움마에서의 이 축제는 두무지의 귀환, 즉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 논한다.

한편 마리에서 발견된 편지는, 어느 한 얌하드 부족의 왕이 누군가에게 보낸 것으로, 유프라테스 지역, 북동쪽 시리아에서 쓰였다. Fleming의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As for me, look at me. Not yet [?] … I escaped from death, and from the midst of Ahuna [I escaped] ten times during uprising[s]. Why, now, [am I not] like Dumuzi? They kill him [idakkilsu], at the [time of] counting the year [muniit sattim]. [In the spring (?),] he always comes back [it-ta-na-a[r]] to the temple of Annunitum […](39-44줄).”

비록 비유지만, 두무지는 죽여도 언제나 돌아온다는 비유가 위에서 발견된다. 또한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두무지와 닝기쉬지다의 관계도 참고할만 하다(기원전 2천년기).

에필로그

저자인 메팅거는 이제 에필로그에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결론은, 다음 문장이다.

“고대 근동 종교들의 세계는 확실하게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들로 묘사되는 많은 신들을 알고 있었다(The world of ancient Near Eastern religions actually knew a number of deities that may be properly described as dying and rising gods, 217쪽).”

그리고 더 중요한 문장이 이어진다.

“더욱이 이것은 기독교 이전 시대가 도래하기도 전 훨씬 전의 경우이다(Moreover, this is the case long before the turn of the era, in pre-Christian times, 217쪽).”

“… 우리는 기독교 시대 훨씬 이전부터 죽고 귀환하는 다른 신들이 있음을 보았다: 두무지, 바알, 멜카르트. 오시리스도 특별한 경우지만 여기에 언급될 수도 있다. 에쉬문의 경우,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명쾌한 증거가 다마스키오스(5세기)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기독교 시대 이전에도 에쉬문이 그러한 특징들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가능성(증명할 수는 없으나)이 있다.

(… we have seen that there are other gods who both die and return long before the Christian era: Dumuzi, Baal, and Melqart. Osiris may also be mentioned here, though he is a special case. For Eshmun, the clear evidence for his death and resuscitation is from Damascius (fifth century C.E.). However, it is possible but not provable that already in pre-Christian times Eshmun had also developed these characteristics(218쪽).”

“레반트의 아도니스도 이미 철기 시대에,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이었다. … 전체적으로 볼 때, 나는, 정황증거가 레반트의 아도니스가 기독교 이전 시대에 이미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는 쪽으로 기운다

(Levantine Adon(is) was already in the Iron Age a dying and rising god...On the whole I am inclined to think that the circumstantial evidence favours the conclusion that Levantine Adon(is) was a dying and rising god already in pre-Christian times, 218쪽).”

메팅거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기독교의 예수의 부활을 전혀 다루지 않았지만,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연구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실상 아무런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가 일반적으로 신약학자들에 의해, 역사적인 인물이며, 빈무덤을 일종의 역사적 증거로 삼는다고 (아마도 그가 각주로 단 것으로 볼 때, 보컴의 논증에 의거하여) 추정한다.

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아무런 연구를 하지도 않았고, 특별한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 연구 범주, 즉 신에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기념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계절 순환과 상관없고, 또한 죄를 위한 죽음을 겪고 부활하는 예수와 상응하는 의미로 그러한 것을 경험하는 신은 없다.

우리는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성급히 이 문제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반대로 변증하기보다, 종교사 속에서 이처럼 다양한 신들의 묘사에 대해 정확하게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신들에 대해, 특별히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대해 보다 심도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진규선
목사, 서평가, 독일 유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