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그런 어려운 시대에도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은 높아서 웬만큼 사는 집안의 아이들은 서당에 나가 천자문과 사서삼경 등을 공부했다. 잘 사는 집에서는 사랑방에 독선생을 들여 개인교습을 하기도 했다.

억이네도 양반 가문에 아버지가 벼슬까지 지낸 집안이었으나, 원래 청빈하던 아버지가 안 계시니 독선생은 고사하고 서당에도 못 다닐 형편이었다. 그래도 억은 동무들처럼 공부가 하고 싶어서 서당 문 앞을 서성거리며 글 읽는 소리를 귀동냥했다. 안에서 훈장님께 직접 글을 배우는 아이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그런 아들의 마음을 눈치챈 어머니의 심정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밤낮 없이 남의 집 바느질품을 팔았으나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뿐 아들을 서당에 보낼 처지는 되지 못했다. 못된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각다귀처럼 설쳐댔기 때문이기도 했다.

억은 서당에 다니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으나 어머니 앞에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서당 얘기만 살짝이라도 비치면 어머니가 무척 괴로워하리라는 걸 뻔히 알았던 것이다.

그런 어린 아들의 마음을 어머니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이런 궁이 저런 궁리를 하던 끝에 결국 이 진사댁의 독선생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사랑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한 채 문밖에 서서 겨우 말을 꺼냈다.

“어르신, 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오?”

독선생이 방문을 열고 물었다.

“제 아들 녀석이 너무 배우고 싶어하는데 형편이 안 되어서… 방법이 없을까 해서요.”

“흐음, 딱하긴 한데… 나는 집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독선생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진사님께 가서 직접 한번 간청이라도 해보시오.”

독선생은 젊은 여인이 실망하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어머니는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고 안채로 들어가 이 진사를 뵈었다.

“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이렇게 염치없게 들렀습니다. 아들 녀석이 공부하고 싶어하는데 학비가 없어서 그러니… 댁의 아드님이 공부하는 옆에서 동냥글이나마 배우게 해주시면 제가 집안일이라도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이 진사는 호박처럼 둥근 얼굴을 갑자기 이리 찌푸리고 저리 찌푸리고 하면서 억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마치 일부러 바짝 애가 타도록 시간을 끄는 모양이었다.

억이 어머니는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속이 마구 탔다. 한 마디에 아들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이 진사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하도록 하시오.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토록 어렵게 부탁을 하시오. 그러면 내가 더 미안스럽지요. 허허허.”

그제야 억이 어머니는 머리를 들었다. 이 진사는 또 호박처럼 둥근 얼굴을 갑자기 이리 찌푸리고 저리 찌푸리고 하면서 이번엔 짓궂은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그는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닌데 좀 심술기가 있었다. 이번처럼 사람을 바짝 긴장시켰다가 갑자기 풀어 주면서 자기의 우월감과 권위를 느끼고 내심 즐기는 것이 그의 버릇이자 특기였다.

“진사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억이 어머니는 인사를 하고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집으로 걸어갔다. 아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한 듯했다.

이튿날부터 억은 이 진사댁에 가서 글공부를 시작했다. 이 진사의 아들은 억이보다 키가 크고 뚱뚱했는데 아버지를 닮아선지 공부 시간에도 장난이 심했다.

사탕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아먹기도 하고, 책에 여자 얼굴을 그려놓곤 킥킥거리다가 억의 옆구리를 슬슬 찔러 구경하라고 눈짓하기도 했다.

독선생은 뭐라고 나무라지도 못했다. 또 그래봤자 별 소용도 없었다. 독선생은 그 녀석이 하는 대로 하라고 놔두고는 억을 가르치는 데다 마음을 썼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억은 총명하고 이해력이 남달랐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셋을 깨쳤던 것이다. 그런데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를 하니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아, 옛사람들이 말한 대로 좋은 제자를 기르는 스승의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독선생은 때때로 자기 무릎을 치며 입속으로 가만히 감탄을 했다.

천자문을 열흘만에 떼고 사서삼경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유학의 알맹이가 들어 있는 책으로서, 사람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를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억은 총명한데다 마음이 본래 해맑고 올곧았으므로 그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잘 이해하고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햇솜처럼 쏙쏙 빨아들였다.

날이 갈수록 그의 생각은 밝아지고,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은 깊고도 넓어졌다.

이웃 사람들은 억의 어머니를 무척 부러워했다.

“어쩜 글 읽는 소리가 저리도 낭랑할까. 저 소리만 듣고 있어도 기분이 맑아진다니까.”

“어디 그뿐인가. 억이 그애의 눈빛을 보라구. 마치 샛별처럼 초롱초롱 빛난다니까. 앞으로 큰일을 하게 될 거야.”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억이 잘하고 있어도 좀처럼 드러내놓고 칭찬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한 마디쯤 칭찬해 줄 만도 한데 오히려 냉정했다.

“사내가 작은 성취에 자만해서는 아니되느니라.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겠다는 희망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야만 한단다.”

“네, 어머니.”

“그 희망은 자기 혼자 잘 살겠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기만의 욕심을 탐하는 것은 소인배나 할 짓이다. 지금 이 나라는 풍전등화와도 같은 꼴이다. 너 자신을 버리고 이 민족과 백성들을 살리는 큰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이 어미의 희망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만을 쫒아다니는 삶은 짐승이나 벌레도 다 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죽어서 개나 돼지로 다시 태어나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벌레 중에는 누에나 지렁이처럼 스스로도 모르는 채 이 세상에 도움되게 사는 미물도 있지 않더냐. 지렁이를 징그럽다고 침 뱉고 밟아 죽이지만, 하루 종일 땅을 파서 기름지게 하니 어떤 인간보다 더 낫다고 하지 않겠느냐?”

억은 어머니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는 겉으로는 엄한 척하지만 속깊은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있었다. 다 자기가 잘되기를 바라기에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원래 열두 남매를 낳았었으나 전염병인 천연두로 다 잃고 외아들 억과 두 딸을 겨우 건졌을 뿐이었다. 귀한 자식일수록 더욱 엄하게 길러야 나중에 옳게 된다고 믿었기에 그랬으리라.

그런 어머니의 심중을 헤아렸기에 억은 자라서도 어머니의 뜻을 함부로 거역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깊은 속에서 우러나온 슬기가 자신의 좁은 식견보다 항상 옳다는 사실을 체험했으므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뵙고 의논했다.

억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양혜덕이라는 이름의 처녀와 혼인식을 올렸다.

그 당시엔 일찍 결혼하는 게 풍습이기도 했지만, 누이들이 둘 다 시집간 뒤로 어머니 홀로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기란 퍽 적적한 일이었던 것이다.

신부는 경기도 양평의 명문가 따님으로서 온화한 성품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런 귀한 집안에서 가난한 집에 딸을 준 건 중매쟁이 할미의 감칠맛나는 입심도 한몫 했겠지만 사실상 억의 사람됨이나 당당한 풍채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소란스럽던 혼인의 날도 서서히 저물고 드디어 첫날밤의 아름다운 시간이 되었다. 창호지에 살며시 구멍을 내고 몰래 들여다보던 짓궂은 사람들도 물러갔다.

억은 신부의 족두리를 벗겨 주고 나서 그녀의 하얀 손을 잡아 보았다. 신부는 수줍어하며 손을 빼려 했다. 억은 손을 더 세게 꼭 쥐었다.

“아, 아파요.”

“그대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이 다 환해졌다오.”

신부는 수그리고 있던 이마를 살짝 들었다. 억은 말했다.

“아내는 안해가 변해서 된 말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그 뜻을 알고 있소?”

“집안의 해, 마음 안의 해….”

그녀는 다소곳이 말하곤 말끝을 흐렸다.

“그렇소. 이제부터 그대는 이 집안의 해라오. 그리고 내 마음속의 해님이라오.”

신부는 살짝 미소지었다. 억은 그 모습이 너무 예쁘다는 듯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