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
가수 이선희 씨를 만나는 날을 앞두고 수일 전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교인들 집에 방문해서 기도를 해주는데도 그녀의 노래가 스쳐갔다. 책상에 앉아 설교 준비를 해도 그분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잠을 자려다가도 환영이 떠올랐다. '이게 현실일까, 꿈일까, 진짜 만날 수 있을까. 주선한 분이 갑자기 장난이었다고 이야기하거나, 이선희 씨가 급작스런 스케줄로 인해 못 나오시면 어쩌나.'

주선한 분에게 전화가 오면 혹시나 약속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듣게 될까 봐 전화 받는 것조차 꺼려지기도 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약속 전날 전화를 준 주선자는 다음 날 약속이 확실하다는 이야기로 나를 안심시켰다. 그 전화를 받고 어찌 잠을 이룰 수 있겠는가. 잠을 청하였지만 마음에는 <J에게>가 왔다가 <그중에 그대를 만나>가 왔다가 <아 옛날이여>가 왔다가 또 <인연>이 왔다가 사라지며 밤새 뒤척이게 했다.

며칠 전부터 내가 이선희 씨를 만난다고 하면서 들떠 있으니까 주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다. "목사님, 교계를 대표하는 분이 연예인 한 명가지고 쩔쩔 매십니까? 목사님도 공인인데 가수 한 명 만나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아이처럼 설레 하십니까?" 다행히도 주변에 있는 문학목사, 음악목사들이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었다. 무엇보다 나의 문학성과 예술성을 이해해주는 집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드디어 약속 날 아침이 밝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머리를 쓰다듬고 세수를 했는지 모른다. 출발할 때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나 이선희 씨가 마지못해 억지로 나온 모습을 보이시면 서둘러 모임을 마무리 짓고 일어서는 게 예의겠지.' 내가 봐도 영락없이 초등학교 선생님께 인사하러 가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들뜬 이유는 무엇일까. 20대의 푸르고 푸른 청춘의 나날, 시골벽촌에서 맨주먹으로 교회를 개척하던 때 버스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J에게>가 아직도 가슴에 들판의 꽃향기 같은 선율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긴장과 설렘 속에서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실제로 이선희 씨가 나와 있었다. 순간, 울컥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식사 기도를 하면서도,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얼마나 긴장했으면 마주 보지도 못하고 측면에 앉아서 식사를 했을 정도다.

벌써 그분을 만난 지가 몇 달이 되었는데 지금도 그때의 설렘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예술혼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나보다 더 이선희 씨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콘서트에 가면 줄 지어 다니며 열광하는 팬들이 있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그분을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 행동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런 순수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 때가 있다. 때론 순수함 때문에 목회하면서 손해도 많이 보고 심지어 사기를 당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한다.

그녀에게 정말 큰 빚을 진 마음이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음악 예술인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듯, 나 역시 목회자로서 사람들의 영혼을 더 행복하게 하고 영혼의 순수 시대를 열어 가리라고! 뿐만 아니라 시를 쓰고 이따금씩 작곡을 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고 행복한 정서를 부여하기 위해 한 줌의 시와 노래의 꽃씨를 뿌리리라 마음먹었다.
아, 20대 청춘의 시절, 시내버스에서 만났던 J와 중년의 목사가 된 내 영혼의 또 다른 J가 해후를 한 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가. 삭막한 세상 속에서 우리 가슴 깊이 동경하고 흠모하며 그리워할 수 있는 J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순금처럼 빛나는 순수 시대를 꿈꾼다.

* 샘터 4월호 '소강석 목사의 행복 이정표'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