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요즘 기독교 안팎에서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라는 화두가 넘쳐나며,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외침들이 자자하다.

그 동안 실용 학문만 우대받던 분위기 속에서, 소위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인문학이 이제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되는가보다 라는 생각과 함께, 한국 사회가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기독교 입장에서 꼭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언뜻 들으면 ‘성경만 아는 꽉 막힌 사람이 되지 말자’는 것처럼 들리고, 다른 한편 인문주의에 학을 떼게 한 중세적 경험이 떠올라 ‘웬 인문학?’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느 저명한 노(老) 기독교 철학자는 방송이나 글에서 늘상 “기독교는 무식한 종교가 아니다”고 목청을 돋운다. 어거스틴(Augustine, 354- 430), 안셀무스(Anselm, 1033- 1109)가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만 알려진다”는 ‘신앙인식론(The Epistemology of Belief)’을 말했다고 그들이 결코 무식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지식을 섭렵한 최고의 지성인이었으면서 지식을 무(無)로 돌렸지, 무식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 진의를 헤아리지 못하는 바 아니나, ‘한국 기독교는 무식하다’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울과 칼빈의 ‘어리석은 자의 기독교(마 11:25, 고전 3:18)’라는 명제와 배치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또한 그 말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무지의 지(無知─知, Bewusstsein des Nichtwissens)’를 연상시켜, 모든 지식을 통달하고 인간 지식의 무용성(無用性)을 안 후에야 ‘신앙인식론’을 가질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선천적인 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통달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처럼 들린다. 선천적인 소경이 ‘자기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눈을 떴을 때뿐’이다.

사도 바울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전 1:21)‘는 것과 ’미련한 자에게 알려지는 하나님(고전 3:18)’을 깨달은 것은 그가 모든 지식을 통달한 후가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조우한(행 9:1-7) 후이다.

그 직전까지 그는 여전히 ‘자기 의, 지식’의 탐닉에 빠져 있었다. 그의 하나님 조우는 지식 탐구의 연속선상에서 온 것이 아닌, 예기치 못하게 ‘훅’ 온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고전 1:27)”는 말씀 역시 미련한 자에게 알려진 하나님을 통해, 지식을 통달하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지혜자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당대의 인문학 지성인 헬레니즘(Hellenism)으로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을 야만인들이 알 수 있었다(롬 1:14-16, 골 3:11)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혹 헬라주의자들(Hellenists) 중 하나님을 알게 된 경우도(행 17:12) 그들이 모든 지식을 무로 돌린 후가 아니고, 여전히 인간 지혜로 신을 찾고 있던 오리무중 속에서 홀연히 그렇게 됐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자신들의 인문학적 지식의 유무와 무관했다.

우리가 교회 안팎의 인문학 강조에 대해 경계심을 발하는 것은 중세의 유산인, 이성의 뒷받침을 받지 않는 맹목적 신앙으로서의 ‘신앙주의(fideism)’에로의 회귀를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는 세속적인 일체의 지식을 버린 무지의 상태에서 도달되는, ‘직관(intuition, Nicolaus Cusanus는 직관을 인식의 최고단계로 간주했다)’에 의해서만 신이 인식 된다는 ‘무지의 지(docta ignorantia, Nicolaus Cusanus1401- 1464)’를 장려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는 인문학을 강조하는 기독인들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다. 인간을 잘 이해하여 복음을 효과적으로 설명하자는 것이고, 초월적인 신학을 인문학적 메커니즘(Mechanism)으로 풀어내고, 시대의 사유 양식으로 표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는 그런 시도를 하다 생긴 좌절의 경험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적인 인식 체계로 삼위일체 이해에 실패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삼위일체를 받아들인 기독교 안에서조차 삼신론(tritheism), 양태론(modalism)에 빠졌다. 헬레니즘으로 ‘말씀(λόγος, 요 1:1)’을 설명하려다 그리스도의 인격성이 부정됐고, 플라톤(Plato)적 이원론(dualisme)에 물든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했다(마 22:23).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영혼불멸’ 교리를 철학적 논증이 불가능한 것으로 암묵적 합의를 도출한 것도 인문학적 좌절을 겪은 한참 후의 일이다.

반면 인문학적 영감으로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펴내고, 그것의 방법론을 제공받은 성공적인 경험도 우리는 갖고 있다. 종교개혁이 성공을 가져온 요인 중 하나는 그것이 인문학적 방법을 차용했으면서도 인문학에 매몰되지 않았던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혁자들이 ‘치고 빠지기 식’ 전법을 잘 구사한 요인이 작용했다. 그들은 인문학을 신학의 지렛대로 사용한 후 지렛대를 빼는데 신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후 1-2세기를 거치면서 루터(Martin Luther)의 후예들이 다시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로 회귀한 것이나, 일부 칼빈주의자들이 주지주의(intellectualism)로 흐른 것은 인문주의 누룩의 점성(黏性)이 얼마나 찐득한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단지 ‘인간 지혜’의 ‘헛됨’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의 ‘해악 됨’까지 말했던 이유를 다시 주목하게 된다(빌 3:7-8).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를 헛되게 할까’ 말의 지혜(rhetoric)에 의존하지 않았던(고전 1:17) 그의 태도 속에서, 그가 ‘인간 지혜’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수사학자(the rhetoricist)요 말쟁이(the babbler, 행 17:18)였던 사도 바울이 투박하고 어눌한(contemptible, 고후 10:10) 전도자로 바뀐 것 역시 그의 달변이 십자가 복음을 손상시킬까 해서였다.
그는 초월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을 뿐더러,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이성을 음녀라고 지칭한 루터가 연상된다.

만일 인문학적 매커니즘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결코 성령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성령을 복음의 유일한 교사로 말한 것은(요일 2:27) 인간의 언어와 사유의 한계를 인정한 때문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 2:27).”

바울이 ‘하나님이 인간 되어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했다’는 복음은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한 것(고전 2:9-10)이라고 한 것은, 초월적인 복음은 인간 지혜의 산물이 아닐 뿐더러, 인간 지혜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사에는 바울의 경험을 공유한 인문학자들이 많다.

터툴리안(Tertullianus), 칼빈(John Calvin), 루터(Martin Luther)를 비롯해,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였던 파스칼(Pascal, Blaise), 가톨릭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은 하나같이 ‘하나님은 인문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고 고백했다.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령으로 말미암아 찐득한 인문학의 누룩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작금의 기독교 내의 인문학 강조에 우려를 표하는 것은 신학함에서 인문학 차용 자체를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유 체계는 물론, 학문적 접근 방법을 비롯해 독문(讀文), 저술(著述) 모두 인문학의 도움 없인 불가능하다.

훌륭한 글일수록 인문학적이다. 스콜라주의를 알든 모르든, 우리는 다 인문학에 빚지고 있다. 필자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인문학에 의존하고 있다.

다만 용의주도(用意周到)함 없이 무분별하게 인문학을 차용하다 인문학 자체에 매몰되어, 정작 그것이 가리키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놓치거나 흐리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즈음 인문학자(人文學者) 였던 사도 바울의 다음의 말이 떠오른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바울이 그랬듯 다른 것보다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와 ‘성령’에 더 주목했으면 좋겠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