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안교회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요한복음 14:1~7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장]은 고별설교라고 합니다. [요13장]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달리시는 때까지 3일의 기간에 관한 내용이 매우 길게 나와 있습니다. 그만큼 그 3일에 일어난 일과 주신 말씀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별설교라는 것은 최후의 만찬 즉, 저녁식사 하실때 주신 긴 말씀인데 그걸 우리는 하나 하나 되새겨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오늘 말씀은 [요14장] 앞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자면 이 상황을 다시금 상기시켜서 봐야합니다. 유다는 어둠속으로 사라졌고 십자가는 결정된 것입니다. 그 순간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선언을 하시고 이제 그 길을 스스로 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하신 주님 안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지금 십자가가 내 앞에 다가와 있을지라도 그 길의 끝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이 길의 끝은 영광입니다. 이걸 미리 정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8장에 성도의 견인(堅忍, perserverance) 가르침이 있습니다. '견인(堅忍)'이란 뜻은 끝까지 인내로서 우리를 붙드셔서 제일 좋은 세계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롬8:29-30] 구절입니다. 간단히 줄여서 우리는 '예지 예정' 이라고 말합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안에 약함과 부족함 다 아시고 부르셨는데 부르실때 이미 정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장 최고로 좋은 미래를 정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고 영광스런 자리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믿고 사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 아무리 안좋은 일 있어도 결론은 최고의 결과를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는 지금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이 곧 다가온 것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붙잡혀서 심각한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아시고도 내가 '영광'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세계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린 어떤 믿음을 갖고 삽니까. 조금의 어려움이 와도 쉽게 절망하고 쉽게 낙심하고 때론 불평하고 원망하는 등 하나님을 안믿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역사의 큰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 믿음, 예지예정의 신앙을 갖고 산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절대적인 믿음의 바탕위에 주시는 고별설교입니다. 그런 유언입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안에 근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죽음의 길을 가시게 되었고 그걸 결심하셨으니 분위기가 정말 비장한 것입니다. 제자들 안에 있는 근심은 어떤 근심일까요. 사도 바울은 두가지 종류의 근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고후7:10]. 세상 근심이 있고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앞에 것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뒤엣 것은 우릴 회개시켜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근심이 있습니까. 그 근심은 어떤 근심입니까.

예수님이 전해주신 말씀중에 '산상수훈[마5-7장]'을 보십시오. 제일 먼저 제자들을 모아놓고 입을 열어 가르쳐 주신 말씀[마5:2]입니다. 그 중 [마6장]을 보면 '염려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염려하지 말라. 새들도 들의 꽃들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느냐? 너희 안에 정말 쓸데없는 근심 염려가 너무도 많다. 그것은 안믿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 아니냐?" 우리 안의 근심을 보면 하나님 믿지 못해서 갖는 근심이 대부분입니다. 지독한 불신앙이 우리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근심이라는 것은 물론 우리 안에 참 인간적인 것이고 약함인 것이지만 이것을 나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선적으로 살면 안됩니다. 우리 안의 정직한 모습은, 늘 먹을 것 입을 것 마실것 걱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약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 약함 속에서도 성령의 은혜를 구하고 더욱 주님의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사는 것. 이걸 바울은 '약함 속에 강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들의 복음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안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분명히 있으셨습니다. '할 수 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얼마나 인간적인 모습입니까. 얼마나 우리와 같으셨습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주신 힘으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셨습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지금 제자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위로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위로입니다. 가장 위로를 받으셔야 할 분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참혹한 죽임을 당할 분이 그걸 넘어서서 근심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이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는 당신이 받으실 끔찍한 고통보다도 그런 자신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근심할 제자들이 더 큰 것입니다. 이 마음입니다. 이 사랑입니다. 이것 가지고 주님은 일평생 사신 것입니다. 그렇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주시는 위로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얘들아 걱정마 천국에 가면 집들이 많아. 거긴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야" 이런 얘기입니다. 이 말씀이 너무도 슬프면서도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믿는 자들의 죽음은 무엇인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좋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초상집에서 찬송을 부릅니다. 예배도 '천국환송예배'를 드립니다. 기쁘게 보내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세계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이 가지는 많은 세계관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도 다릅니다. 종교마다 세계관이 다릅니다. 그것에 따라 삶도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느 경제신문의 칼럼을 봤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잘 죽기 위해서다'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안믿는 사람이 쓴 건데 거의 성경적 세계관을 얘기하는 글이었습니다. 내용에는, 죽음이 끝이라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왜? 착한 사람이 고난 속에 살다가 죽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잘먹고 잘살아가기도 하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꼭 죽음 이후의 삶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철학자 심리학자 작가 등등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죽음은 사라지는게 아니라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배운 것으로 다음 세계를 선택한다' 그리고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때 삶을 가치롭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치로운 삶의 내용은 무엇이냐면, 다른 사람을 위해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100세가까이 사신 철학교수님의 고백이 '결국 자신을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지고 남을 위해 살았던 것만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는 사람은 이런 것을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고별의 말씀 속에, 우리 믿는 자들이 가지는 세계관 인생관은 무엇인가요. 이것이 우리 삶에 압도적으로 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미래의 영원한 세계로 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이 현실의 삶을 지배하는, 그런 우리 삶이 되어야합니다.

유명한 드라마 제목 중에 '해를 품은 달'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왕을 사랑한 한 여인의 이야기인데, 성경을 묵상하는 우리는 그 말이 매우 깊은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해를 품은 달. 우리 삶은 영원을 품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가볍게 다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 말씀 속에 "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이 땅보다 더 좋은 세계로 가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득해서 주님은 일생을 그렇게 사신 것입니다.

..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지금 죽음을 앞두신 주님을 보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는 위로는 무엇인가요.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얘들아 너무 걱정하지 말아. 내가 먼저 좋은데 가는거고, 너희 있을 곳을 가서 준비하러 가는 것이란다. 나중에 너희가 오면 내가 마중 나올 거야" 주님은 죽음까지도 제자들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우리를 위한 길을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깊은 것입니까.

또한 '너희를 위한 거처를 예비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요. 우리를 위한 길을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뒤에 도마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에도 나오는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 길을 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죽는 것을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길'이라는 제목의 대중가요도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같이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그냥 묵묵히 걸어간다' 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방황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런 방황은 없습니까. 지금 고별의 설교를 잘 깨달으면 그런 방황은 끝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도 그 길을 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의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또 그렇게 살아서 결국 어디로 가는 것인지 이 고별설교 중에 분명히 다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2절의 말씀 속에는, '우리가 주님 예비하신 곳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천국은 중요한 것이 죄가 없는 곳입니다. 죄인들이 거하는 곳이 아닙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어떻게 깨끗해 질 수 있습니까. [롬3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또 [롬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먼저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가르침입니다. 칭의라고 합니다. 또 의롭다 함을 받고 나서도 끊임없이 날마다 우리 죄를 씻어가야합니다. 이것은 성화라고 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결론도 그것입니다. [계22장] 자기 죄를 열심히 씻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고 했습니다[계22:14].

사순절에 우리가 붙들어야할 소중한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1)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면서 또 2) 그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 죄를 열심히 씻어나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날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살다가 천국의 집에 갈 수 있도록, 지금 주님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그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그 말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이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그 은혜를 알아서 우리 죄를 씻고 아름다운 세계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죄를 소멸하는 능력이 우리안에 더 크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도 큰 것임을 우리가 알면 알수록 우린 더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아직 도마는 주님의 말씀을 못 깨달은 것입니다. 뒤에 빌립도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도마와 빌립에 대해서 우리가 의심이 많고 믿음이 없는 자라고 부정적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그러나 그보다 그들은 더 알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알아도 다 알았다 생각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성경공부를 할 때 제일 힘든 사람은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요9:41] 예수님 말씀에 '네가 안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즉, 내가 안다고 할 때 내 문제를 더 모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린 늘 진리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말씀의 깊고 깊은 세계를 더 알고자 하고 늘 질문하고 배우려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깊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도마가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세요? 우리가 잘 모르니 가르쳐주세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유명한 말씀이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어떤 성인도 '내 가르침을 배우라'고 했지 '내가 길이요 진리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신 삶 그 모든 것이 길이요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통해서만 아버지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갈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기독교는 그 길 밖에 없다고 말합니까? 왜 그렇게 배타적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설명, 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왜 예수만이 유일한 길입니까?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인데, 그 죄의 문제를 이땅에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누구만이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그분의 삶과 죽음. 그 핵심이 대속(代贖)입니다. 영어로 Redemption 입니다. '이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만이 그 대속의 사랑의 능력으로만이 우리가 죄로부터 깨끗해질 수 있고 자유해질 수 있고 저 아름다운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로마서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우린 그 구원의 핵심 진리를 늘 꼼꼼히 반복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읍시다.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아멘. 본문 뒤의 내용은 더 깊은 대화로 이어지는 것인데,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할 소중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구구절절이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중요하고 다 소중하지만, 6절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6절을 중심으로 다른 구절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 그 물음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던져보고 해답을 얻으면서, 이 분명한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천국 소망가지고 주님 내어 주신 길을 따라가는, 또 이 구원의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