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창세기 12장을 요약해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며, 그의 후손인 메시야로 인해 만민이 구원받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아브라함의 소명은 구속주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아브라함도 다른 사람들 못지않은 험한 시험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왔지만, 거할 곳이 마땅하지 않은데다 설상가상으로 기근까지 심해 결국 남쪽으로 옮겨갔다가 애굽까지 이동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지 않은, 순전히 자기 생각대로 움직인 결과로, 아내인 사라가 애굽 왕의 후궁이 될 뻔한 큰 위기를 자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큰 위기에서 구해주십니다.

히스기야 왕과 다윗 왕 역시, 하나님께 의탁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경험대로 일을 처리하다 큰 낭패를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에게는 연단을 통해 반드시 구해주셔서 승리하시는 분임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는 종에게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게 하십니다. 훗날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긴 인내와 처절한 고통과 아픔을 체험케 하셔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만찬에서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때는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창 9:1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재림할 것을 약속하시며, 알곡과 쭉정이, 염소와 양을 걸러내실 것을 말씀하시며,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며 승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 적이 있습니다. 기도하시는 중 홀연히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신비스러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예수님의 모습만 보아도 엄청난 놀라움인데,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까지 보게 되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의 기쁨 아니었을까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대화를 보고 오해합니다. 초막 셋을 짓자고 아부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리라 하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억압에서 벗어난 해방을 위한 탈출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탈출’은 곧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새 땅에서 새 백성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출발’은 과거 삶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하는 ‘탈출’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이 아니라 천국을 향한 새로운 ‘출발’인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 땅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그 백성들을 인도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을 이끌고 이 세상의 죄와 악, 그 때문에 빚어지는 어두움의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시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출발‘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출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처럼, 우리의 모습도 하얗게 빛나며 영원복락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미 ‘출발’한 신앙인들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처럼 늘 깨어 기도하며, 예수님의 공생애를 본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이미 시작된 ‘천국을 향한 출발’이 결국 천국에 도달하여 영원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신앙 생활을 잘할 것을 우리 신앙인들에게 일러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시고 언약하셨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 채 세상 즐거움에 취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인지 분별조차 하기가 힘들 정도로 나날이 거짓의 날개를 펴며, 마치 자신들이 교회에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활개를 치면서,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아 왠지 마음이 씁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은혜의 시대를 맞아, 마치 주님의 재림이 더디며 자신들이 세상 살 동안에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명예와 권력, 그리고 탐욕과 정욕으로 물들어 가는 현실 앞에, 어느 시 어느 때에 임할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없는 종교인들 같기도 합니다.

진실은 사라지고 거짓의 굴레를 쓴 채 탈춤을 추며 날개를 달아 종횡무진 활개를 치며, 마치 자신들이 옳은 신앙인들 같은 위선과 마치 사이비 종교인들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무대에 협조하지 않는 양들을 밀어내며, 온갖 쇼와 추태를 연출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성도들은 그들에게 현혹되어, 마치 저들의 하는 짓이 옳은 일인 양 분별력 없이 그들의 놀이에 동참하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이처럼 기독교 안에는 악의 활발한 행동으로 공정성과 정의, 그리고 질서가 무너져, 세상보다 못한 이리의 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보내온 글에 의하면, 서울 한 신학대학 교수님이 “악이 설치는 것은 선이 침묵하기 때문”이라고 했답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 됩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하셨습니다. 반드시 재림의 약속이 지켜져 교회 안 악의 세력들이 멸망당할 그 때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비록 힘겨운 고난의 역사를 맛보며 괴로워하고 있는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하심을 뜨겁게 믿으며, 약속하신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임을 기쁘게 기다리며 오늘의 겪는 수모와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이겨 나가야 하겠습니다.

길거리를 가다 보면, 곳곳의 하늘을 향한 십자가의 모습들을 쉽게 발견합니다. 과연 저 십자가들이 주님의 영광스런 십자가들인지 때로는 의문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의 분쟁 속에서 떨어져 나온 교회들이 많아, 고달픈 눈으로 그저 바라만 볼 뿐입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해 성도들이 차고 넘칠 때 부목사님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고 세운다면, 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분쟁 가운데 개척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정말 기뻐하실까요?

하지만 핍박과 박해를 이기지 못할 경우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고요히 맡기고, 새롭게 ‘출발’하는 거룩한 지혜로 새로운 복음의 기지를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특히 새언약 선교회로 시작하는 부산 어느 성도들은, 교회로부터 심한 핍박과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언약을 믿고 의지하며, 새로운 출발과 시작으로 교회를 세우며, 이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무겁게 감당하는 주님의 귀한 종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