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5장 강해
요절: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14절)”

욥 오요한
오늘 말씀은 엘리후의 마지막 변론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욥의 고난은 욥을 겸손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하나님의 의를 주장하다, 욥을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엘리후는 욥을 깊이 이해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욥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씀의 은혜는 있었으나 인생의 연륜이 부족하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과 함께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을 배웁니다.

1. 의롭게 산 것이 유익이 없다는 욥

1-4절을 보면 엘리후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욥이 합당하냐고 묻습니다. 하나님보다 욥이 의롭다는 것을 공의롭게 여기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로워도,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계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아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게 살아도 고난을 당하자, 의가 소용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범죄하여도 나에게 손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이런 욥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한대로 복을 주십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먼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보고, 역사 속에서 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까지 확대시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공의롭게 사는 것이 분명히 유익입니다.

2. 인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엘리후

5-8절을 보면 엘리후는 욥에게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구름을 보라고 합니다. 높은 궁창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공의를 불신하는 욥에게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초월성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생각할 때,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범죄하여도 하나님께는 영향이 없다고 말합니다. 욥이 범죄하여도 지구는 동일하게 돌고, 구름은 그대로 움직입니다.

욥이 의로워도 하나님께 유익을 드릴 것이 없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이미 범죄했지만 하나님의 성품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고 위대한 분이시기에, 인간의 그 어떤 악행으로도 그분의 성품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로움에 무관심하시거나 인간의 죄악에 대해 방관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의롭게 살았다고 하나님께 유익을 드렸으므로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렸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드린 것에 불과합니다.

다만 악이나 선행은 사람에게 해가 되고 악이 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자신이 불평하는 것의 정당성을 제시해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시기에,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의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자신의 기대에 어긋났다고 해서 불평하는 일은 더욱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3. 밤에 노래를 주시는 하나님을 알라는 엘리바스

9-11절을 보면 엘리후는 다시 주제를 바꿔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불의가 있습니다. 연약한 자는 학대를 많이 받아 부르짖습니다. 군주들의 힘에 눌려 소리칩니다.

학대받는 상황에서 고난받는 자들이 도움을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돌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의한 분이라고 원망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대답은 다릅니다. 엘리후는 그들이 밤에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근심이 사무치는 밤중에 노래를 주심으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밤에 노래를 주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도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고 찬양해야 합니다.

엘리후는 사람들이 땅의 짐승들이나 하늘의 새보다도 우리를 더 지혜롭게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땅의 짐승들 이상으로 사랑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짐승들이 자기들의 고통을 부르짖는 것을 통해 인간들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힘을 얻어, 도리어 노래를 부름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 과연 욥은 헛되게 부르짖고 있는 것인가?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말하는 그대일까보냐(12-14절)”.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악인은 교만으로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고난받는 거기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부르짖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대답지 않습니다.

엘리후는,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부르짖음에 대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들의 부르짖음이 헛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헛된 부르짖음은 듣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후가 욥의 부르짖음 일체를 단순히 헛된 것으로 단정한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엘리후는 압박받는 자들이 자기들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태도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지 않고, 아예 관심조차 두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판단을 호소하며 기다리는 욥의 태도가 거짓되다고 공박합니다.

욥은 괴로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진심을 토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왜 욥이 하나님을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왜 엘리바스는 잘못 판단하였을까요?

그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에 기초하여, 욥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섣부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는 것은 욥이 죄악 되어서가 아닙니다. 욥의 인내를 테스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정금처럼 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뵐 수 없고 하나님이 판단하심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때까지 욥을 신뢰하며 연단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이런 기도를 보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할 위선적인 호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욥이 악인이라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욥도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엘리후가 이런 실수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신 후에 응답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도 천천히 응답하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엘리사벳의 기도를 천천히 응답하였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식견이 부족하였습니다.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인내가 소용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더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랑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의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며 복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멘!

5. 하나님이 더 벌을 주지 아니였다는 엘리후

15절을 보면 엘리후는 하나님이 욥에게 벌을 주지 않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욥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욥의 분노에 대하여 벌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욥은 그의 입을 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하나님에 대한 교만의 죄에 대해 징벌을 하지 않으셔서, 욥이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말이 엘리후에게는 헛되고 어리석은 말로 여겨졌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결백을 주장한다고 지적합니다. 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무지한 자의 소행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내린 징벌 외에 남은 징벌을 내리지 않아서, 욥은 더욱더 하나님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심판한 것이 부족하여 악한 욥에게 더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불난 데 기름을 붓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신뢰를 몰랐습니다. 이로써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이 끝이 맺고 있습니다.

오요한
▲오요한 목사.
6. 결론: 성령 충만함과 함께 이해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엘리후를 통하여, 짧은 신앙 경륜이 가져오는 문제를 봅니다. 그는 성령 충만하여 바른 말을 하였습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교만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욥이 죄인이라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다양한 신앙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인생 체험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과 함께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요한 목사(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로마서 강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