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두 명의 안내자는 사람을 일찍 그리고 늦게 부른다. 나그네가 길을 걸을 때 그가 올바른 길을 걷는지 확인하기 위해 앞과 뒤를 돌아보듯, 나그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길을 걷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앞과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후회와 회개다. 후회는 일찍 뒤에서 부르고 회개는 앞에서 늦게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후회가 사람을 부를 때, 후회는 언제나 늦다. 죄의 고백 가운데 하나님을 구함으로써 다시 길을 찾는 부름은 언제나 11시다(마 20:6).

당신이 젊었든 늙었든, 많이 범죄했든 조금 범죄했든, 법을 많이 위반했든 많은 일을 방치했든, 죄책감은 이 모든 것들을 11시의 부름으로 만들어 버린다. 후회가 마음의 내적인 동요를 날카롭게 하는 바, 지금 11시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11시는 성경의 비유에서 인용한 말이기는 하나, 이 세상에서 시간적인 의미에서는 늙은 나이가 11시이고 죽음의 순간은 11시의 마지막 순간이다.

게으른 젊은이는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긴 인생에 대하여 말한다.
나태한 늙은이는 오랫동안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회개와 후회는 사람 속에 있는 영원에 속해 있다.

회개가 죄책감을 이해할 때마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11시에 있다고 이해한다. 인간적인 나태가 잘 알고 있는 저 시간은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말할 때 올 것이다.

그러나 저 시간을 개인적으로 나태한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늙은 사람조차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다고 믿으니까. 나태한 젊은이는 11시에 가깝다는 것은 나이 차이가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바보가 되니까.

보라, 두 안내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고 얼마나 필요한가!

승리를 향해 계속 전진하기를 바라는 가볍게 무장한 젊은이의 소원이든,
인생을 싸우며 나가고 싶어 하는 남자다운 결심이든,
그들은 둘 다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긴 시간’을 생각한다.

한 평생의 시간에 기대하고 있거나, 적어도 분투하기 위한 계획에서 몇 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낭비되는 이유이며, 너무나 쉽게 모든 일이 착각으로 끝나는 이유이다.

그러나 회개와 후회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시간 다루는 법을 안다. 후회가 걱정을 일깨울 때, 깨우는 것은 언제나 11시다. 후회는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왜냐하면 후회는 11시에 있으니까.

후회는 인생의 긴 시간이 있다는 잘못된 개념으로 속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회는 11에 있으니까. 사람은 청춘의 시기이든, 어른의 바쁜 시간이든, 노인의 최후의 순간이든, 사람은 11시에 인생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이해한다.

그 날에 어느 다른 시간에 회개한다면, 그 사람은 일시적으로 회개할 뿐이다. 진정성이 없다. 그는 오히려 보잘것없는 죄책감에 대한 피상적이고 잘못된 개념으로 자기 자신을 굳게 지킨다.

그는 인생의 길이에 대한 기만적이고 분주한 개념으로 자기 자신을 굳게 지킨다. 그런 사람의 후회는 진정한 자기 성찰이 없다. 진정성이 없고 삶이 가볍고 경솔하다.

오, 11시여,
당신이 현존할 때,
모든 것이 얼마나 바뀌는가.
한 밤중의 시간처럼 모든 것은 얼마나 고요한가.
죽음의 시간처럼 모든 것은 얼마나 진지한가.
무덤 사이에 있는 것처럼 얼마나 고독한가.
영원 속에 있는 것처럼 얼마나 엄숙한가.

오, 이 노동의 고된 시간이여(노동을 쉴 때라도),
결산을 해야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고소한 사람이 없다.
모든 사람 각각의 이름이 불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부른 사람이 없다.
무익한 모든 말이 영원의 변화 속에 반복되어야 할 때다!(마12:36-37)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오, 이 얼마나 값비싼 흥정인가!
그때, 그 11시에,
무책임한 사람, 바쁜 사람, 게으른 사람, 자랑스럽게 분투하는 사람, 성공한 사람, 성급한 열정을 가진 사람, 대중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의 눈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해,
후회가 그렇게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다니!

오, 11시여,
당신이 남아 있어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가!
죽음이 평생 동안 계속된다 해도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있겠는가!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