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안교회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요13: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13: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순절이 중반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는 소중한 기간, 오늘은 [요13장] 뒷부분을 보겠습니다.

본문의 자리는 최후의 만찬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마지막으로 12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자리. 그곳에서 잔과 떡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주님은 자신이 이땅에서 사신 삶의 의미, 죄인들을 위한 희생, 그 사랑의 의미를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진지하면서도 감동적은 자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2절에 유다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배반의 마음을 품은 제자를 돌이키기 위해서 끝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요13장]을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초점입니다. 발을 씻기시고 떡을 떼어주시고 하나 하나 주시는 말씀들이 유다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요한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내가 알고도 그에게 끊임없이 선대한다는 것. 그런 자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베푼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가룟 유다는 주님께 어떤 제자였습니까. 돈궤를 맡은 자라 했습니다. 예수 공동체의 재정을 맡은 사람. 우리는 생각해봐야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재정을 맡기나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그런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더 깊은 세계는, 돈을 맡는다는 것은 신앙이 제일 견고한 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12제자 중에서 유다가 제일 신앙이 견고하다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야 그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돈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런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본문의 장면은 어떤 순간입니까. 그런 유다가 돈에 시험든 것입니다. 돈 때문에 그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 참으로 무서운 것은, 돈 때문에 은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거룩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견고했던 신앙의 사람이 이렇게 추하게 변질된 것입니다. 이 유다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지금 돈 때문에 변한 유다일지라도 주님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를 잃어버리지 않으시려고 어떻게든 그를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끝까지'라는 말은,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갈 때까지 그를 붙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한 영혼을 사랑한다 할때 이렇게 사랑해야합니다. 왜?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유다는 그 모든 주님의 사랑의 권면들, 간절한 붙드심을 다 뿌리치고 그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팔러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다 보시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유다의 밀고(密告)로 붙잡히시고 끌려가셔서 고초당하시고 채찍맞으시고 골고다 오르시고 공중에 달려 참혹하게 죽으시게 되는. 이것만 남은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절망적인 상황은 없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주시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요13: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인자는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나간 직후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은 어떤 것입니까. 열심히 연구해서 노벨상을 탔을때 영광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운동해서 금메달을 탔을 때 영광이라고 합니다. 고생해서 큰 기업을 일으켰을 때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이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가요. 그렇게 믿고 사랑했던 제자가 배반하고 자신을 팔러가는데, 그래서 참혹한 죽음이 결정되었는데, 그 순간 '영광을 받았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참으로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주님은 비참한 죽음이 영광입니다. 십자가가 영광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영광이 될 수 있습니까.

그 죽음은 자기 죄로 말미암은 죽음이 아닙니다. 대신 죽으시는 희생입니다. 대속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평생 죄인들을 향한 그 사랑으로 사셨고 또 이제는 마지막까지 온전히 그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자리에 와 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또 하나님도 인자로 영광을 받으셨도다.

이런 말과 같습니다. "내가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나를 통하여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셨습니다. 당신의 죽음까지도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되기를. 이 거룩한 삶을 우리는 늘 생각해야합니다. 고인 물은 늘 썩기 마련입니다. 흐르는 물은 깨끗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자신이 받는 모든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어떤 경우에도 부패하지 않습니다. 변질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받았고, 받으셨도다" 과거형입니다. 죽음이 결정된 순간, 벌써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자리입니다. 자기 생명까지도 끊어지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참으로 허망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영광을 받았다'는 것은, 주님 안에 놀라운 믿음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이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한 모든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요12장]에 예수님은 헬라인들에게 아주 쉬운 비유로 이 세계를 말씀하셨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사랑으로 한 모든 것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죽음의 순간에 주님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죽음 이후에 열려질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안에서만 보여지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요13: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13: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

지금 주님이 놀라운 믿음으로 영광을 얘기하셨지만 그러나 너무도 슬픈 자리입니다. 이제 주님이 떠나실 때가 가까운 것입니다.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잠시'라는게 뭘까요. 이후에 [요14-17장]에 이르는 고별설교와 고별기도의 시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요18장]에 잡히시는 것입니다. 그 어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들은 죽기 전에 마지막 유언같은 말씀들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들입니까.

..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얘기하는 것입니까. 이 죽음의 길, 십자가 고통의 길을 주님은 홀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함께 하지 못했던, 한없이 외로운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을 볼때 5천명이 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때도 12제자들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주적인 대속의 십자가를 그렇게 홀로 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시는 또 귀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의 제자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입니까. 무엇으로 그것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이 땅에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저마다의 종교마다 그 종교를 신봉하는 자임을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머리에 터번을 쓴다. 어떤 종교는 팔찌나 팔에 밴드를 합니다. 또 어떤 종교는 머리를 깎아서, '아 저 종교를 믿는 사람이구나'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종교의 표지(標識, sign)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까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살면 그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아, 예수의 제자들이구나 예수의 사람들이구나'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사는 그것으로 안다는 것이 참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 말씀 기억할 때, 우리가 미워하고 분쟁하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면'이라고 했는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3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그 모범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이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랑한다' 라고 할때 그처럼 애매한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사랑할지 그 방법을 모릅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온통 사랑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고통이고 슬픔이고 눈물이고 때론 분노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사랑의 이야기들, 또 넘치는 구호들이 많은 것입니까.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제자들에게 사랑은 관념적이고 두루뭉술한 것이 아니고 매우 실체적인 것입니다. 왜? 사랑의 본체이신 주님과 그들은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또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계명, 새로운 법'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뭐가 새로운 것일까요. 예수님 이전에 구약 율법에도 '사랑하라'는 법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 뭐가 새로운 것입니까. 여태까지는 경(經)에 기록된 문자로만 읽혀지던 '사랑'이었는데 생각 속에만 머물러 있던 막연한 사랑이었는데 그 사랑이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너무도 분명히 보여지고 느껴지고 생명력있게 다가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8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생명의 성령의 법이, 법이 계명이 살아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습니다. 그 살아움직이는 법이 뭔가요. 그 위에 구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살아움직이는 법입니다. 용서가 우리를 진정 살리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새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의 허물을 찌르지 않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의 잘못을 내가 대신 지는 것 속죄, 대속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구체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 보면서 우리가 함께 깊이 생각하기 원하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절대 절망 속에서도 죽음의 자리에서도 생명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이에요. 이 믿음으로 주님은 십자가를 다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믿음 가지고 살면 주를 따라가는 삶에 어떤 고난이 와도 다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서로 사랑하라는 그 계명을 우리가 어떻게 지키고 살 것인가 라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남기신 유언이셨으니까요.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께서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의 잘못을 죄를 중심으로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또 그의 잘못을 내가 책임지고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의 짐을 대신 내가 져주는 것입니다. 갈6:2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형제중 누군가 문제를 일으켰으면 대신 수습해 주는 것입니다. 이웃 중 누군가 어렵다면 그 어려움을 나의 것으로 삼고 내가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몸소 보이신 사랑이셨습니다.

우리가 넓게 보지 않더라도, 지금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의 주님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제자들 안에 있는 분쟁의 문제, 영적침륜의 문제, 유다 안에 있는 배반의 죄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대신 지고 가시는 길이 아닙니까. 주님은 그렇게 세상 죄를 지시고[요1:29] 골고다에 오르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묵상하면서, 우리 또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길 바랍니다. 주님의 믿음의 본, 사랑의 본을 따라 살아서 십자가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