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한국개혁신학회 회장인 김재성 박사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한국신학자 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 본지는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의 논문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2회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대변하는 가장 결정적인 개념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이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 뒤에 오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사람이었고, 우리와 같은 인간 본성을 가졌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였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순종하는 사람이 견뎌내야 할 인내와 신의를 배반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순종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통을 참고 이겨내면서 항상 성령과 함께 하셨고, 죽기까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순종하였다. 빌립보서 2장에 담긴 기독론에서 핵심사항이자, 신약 성경 전체에서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온전한 순종이다. 첫 사람 아담과 대조되는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의 특징은 순종에 달려 있었다. 첫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실패한 것을 마지막 아담이 성취했다(고전 15:45).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다(롬 5:19).

3.1. 대속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

둘째 아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결정적으로 설명하는 용어가 순종이다. 특히 로마서 5장 11절에서 19절까지, 가장 선명하게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이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순종은 그 특징이 인류를 "대리하는 순종"을(vicarious obedience) 하신 것이다.21)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셔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7-9).

둘째 아담으로서 오신 분으로 죄가 없는 분이시며, 대리자로서 순종을 감당하였다. 물론 엄청난 희생과 인내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일반 사람들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은 대속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속죄제물을 대속의 제물로 바쳐온 유대인들의 제사가 마지막 날에는 단 한분 중보자가 스스로 결단하여서 단번에 성취하셨다(히 7:27, 요 10:17-18).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시다. 창세기 2장 17절에, 죄에 대한 보응은 죽음이라고 선언되었으며,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따라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서 죄인과 같이 되셨다(고후 5:21).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함축하는 바는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죄인처럼 취급을 당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의 죄악이 그분에게 전가되어졌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고전 15:3).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5번과 16번에서 낮아지셔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저주받으심을 요약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들의 빚을 갚아주셔야만 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들이 죽음에 이르더라도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빚이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고자 그리스도는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방법으로 죽음의 형벌을 감당하였다. 돌트 신경 2장 3항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죄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도 유일한 희생이며 만족이요, 무한대한 가치와 존귀함이 있으며, 모든 세상의 죄악들을 대속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것이다"고 고백하였다.

"죽기까지 순종하심"은 엄청난 사태가 닥쳐옴을 의미한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 사망이 다스리는 곳에서 삼일동안이나 그리스도께서 남겨진 것이다.22)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가장 깊은 처절함과 비통함과 치욕을 당하시고자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신 것이다. 죽음과 지옥의 모욕, 수난의 가장 비참함을 다 경험하시고, 부활과 승천으로 승리하신 구세주가 되셨다(벧전 3:19,22).

3.2.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거절을 당하고 짓밟히는 모욕을 참아야만 했고, 마침내 목숨을 잃어야만 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버려졌으며, 죽임을 당했다 (행 2:23, 5:30).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하고 의로운 분"(행 3:14)이지만. 장차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계셨다 (막 10:33-34).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전혀 죄가 없는 분이다 (히 4:15).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이러한 일을 마치기까지 전 생애 동안에 그리스도는 왕이 아니라 순종하는 종으로 성취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을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선포했다(요 10:17-18). 그분은 순교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중보자의 피와 눈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다"(막10:45).

메첸 박사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 동안 벌어진 일은 죄의 값을 지불하려는 것이었다.그의 생애의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영광스럽게 준수하는 일부분들로 구성되어졌고, 그로 인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가져다 줄 수 있었다"고 풀이했다. 그리스도 자신이 만물의 주님이시므로 전혀 그렇게 순종할 것을 요구할 수 없다.23)

앞에서 설명한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생애를 분석해 보자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다소 신학용어상의 오해가 있으므로, 어떻게 해서 이런 개념이 쓰이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현대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라는 개념이 훨씬 더 비중 있게 사용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희생, 즉 순종하심으로 이뤄낸 대속제물 되심에 근거한다.

개혁신학자들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게 되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전생애 동안에 모든 율법을 지켜낸 것은 순종의 내용들이 두 가지로 구별해 보고자 했다. 하나는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이요,24) 다른 하나는 "수동적 순종" (passive obedience, 혹은 "교훈적 순종" preceptive obedience)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에 근거하여, 워필드 박사는 이런 "능동적 순종" 통해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믿는 성도들에게 전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생애를 "능동적 순종"이라고 불렀다.

고난당하시고 마지막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수동적 순종"이라고 구별했다. 헬라어와 라틴어에서 고난 당하다는 단어를 영어로는 수동적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수동적"이라는 형용사는 라틴어에서 "파티오르(patior)에서 파생되었다. 원래 이 단어는 '고난을 당하다'라는 동사형에서 나왔다.25)

아직 이런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두 가지 순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를 돕고자 한다. 개혁신학자들이 사용한 "능동적 순종"은 인간의 몸을 입고 살아가신 전 생애 기간 동안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켜냈음을 의미한다.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의 생애가 마지막에 이르게 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최종적인 복종이다.

이처럼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옮겨주시옵소서"라고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진통을 겪으셨기에,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라고 규정했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라 함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끌려가듯이 해서 결국에는 마지못해서 복종한다는 뜻이 아니라, "고난과 수난을 당하면서도" 처참한 처지에 던져지기까지 복종하다는 뜻이다. 혹자는 "희생당하는" 순종이라는 점을 구별해서 표현하고자 사용된 단어다

특히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전가 받는다는 것은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의 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행위언약"이라는 신학용어 역시 논쟁을 낳고 있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정확하게 규정해 놓았으므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강조한 메첸 박사는 "그리스도가 단지 우리를 위해서 죄의 형벌을 대신해서 지불하였을 뿐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특히 아담이 행위언약 아래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고 지켜야만 할 것을 하지 않았듯이 그러한 상태에서 우리가 해야만 할 사항들을 전혀 성취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완벽한 순종에 근거하여 얻는 영생을 우리가 얻을 수 없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죄 값을 지불함에서 있어서나, 율법을 지키는 면에서 있어서나 우리의 대표자이며, 자신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완벽한 순종을 함으로써 보상을 받게 해 주셨다."26) 메첸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없다면, 그 어떤 희망도 없다"고 토로했다.

신학자들이 개발해 낸 신학 용어들은 시대적인 정황이 반영되어 있어서,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 미국 개혁신학자 레이몬드 교수는 조금이라도 "수동적"이라는 용어가 빚어낼 오해를 염려했다. 현대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신학적 표현에 대해서 즉흥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레이몬드 교수는 그리스도가 결코 하기 싫어하거나 억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 즉 수동적으로 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원하고 전적으로 염원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교훈적 순종" 혹은 "명령적 순종"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하였다.27)

이런 두 가지 순종을 구별하게 되는 신학 용어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적어도 이 용어들의 출현이 불가피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신학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하나는 중세시대 말기까지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피 흘리심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다. 성도에게 주시는 칭의론을 정립하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전제가 되어 야만 하기에, 속죄론과의 관련성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독교의 속죄론은 훨씬 오래전부터 중요시 되어졌었고, 여러 형태로 개발되어왔다: 1) 오리겐이 개발한 사탄에게 값을 지불한다는 속전설, 2) 안셈의 배상설, 3) 이레니우스의 재발생설 5) 아벨라르드와 리츌의 도덕감화설, 6) 휴고 그로티우스의 통치설, 7)동방교회와 루터가 주장한 승리자로서 그리스도 등 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대속적 형벌설"과 "의로움의 전가 교리"를 새롭게 강조하였고,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자 두 측면을 나누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얻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우리 믿는 성도들이 전가 받는다는 것이 대속적 형벌이라는 속죄론의 핵심사항으로 루터파와 개혁신학자들이 공유한 부분이다. 기본 개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율법에 대해서 온전한 순종을 요구 하신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모두를 이루심으로써, 율법 앞에서 완전한 의로움을 성취하셨고, 그를 신뢰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만드셨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60항목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마치 전혀 죄를 범하지 않은 자들처럼 인정을 하시었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믿음을 가진 자들의 것으로 전가한다는 점이 칭의와 성화의 긍정적 요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교리의 발달사를 살펴보자면, 또 다른 정황을 발견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서 발견하게 된 것인데, 성자 예수님의 죽음과 희생을 단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다. 속죄론에서 새롭게 대두된 신학이론 중에하나가, 중세시대에 대세를 이뤘고 여전히 그런 경향이 있는 바, 성부 하나님을 위주로 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해석하려는 경향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희생을 조망하면, 성부가 고난을 당했다는 소위 "성부 수난설"(patripassianism)이 나오게 되는데, 이것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28) 이런 경향이 확장되면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고, 여기에다가 유사하게 바르트는 "신 성부 애통설"(Neo-theopaschitism)을 선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성부 하나님의 순종이나 희생을 언급한 곳은 없다.

개혁신학자들은 성자의 피흘림과 죽음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결과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성자의 능동적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의로움을 전가 받아서, 비록 죄인이지만 전혀 죄가 없다고 간주된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위로와 기쁨이 된다. 성자의 능동적 순종은 일반 성도들이 아무리 철저하고 완벽하게 살아가더라도 여전히 부족한 상태에 놓여서 항상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상황을 해결하는 답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직도 점진적 성화의 과정에 있으면서, 아무리 노력을 다하여도 도저히 온전케 될 수 없음을 탄식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야말로 완벽한 복음이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칭의(justification)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가져다주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정적으로 의인이라고 선언하는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을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같이 동일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이다.29)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성도의 칭의에 있어서 중요한 근거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롭다고 여기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십자가의 순종이 하나님의 모든 법을 지키는 최종적인 완성이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전생애 동안에 율법에 정한 기준을 모두 다 충족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과 완벽한 생애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우리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두 용어를 가지고서 설명할 때에, 예수님의 순종을 기계적으로 딱 두 쪽으로 분리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사야서 53장에 고난당하는 종을 근거로 하여, 존 머레이 교수(1898-1975)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은 능동적 순종이고, 고난당하신 것은 수동적 순종이라고 재규정했다. 두 가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것이고, 죄에 맞서서 거룩하게 되도록 노력한 것이다.

머레이 교수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 차츰 점진적으로 성취된 것(progressiveness)이라고 성경적으로 입증하였다(히 5:8). 어린 시절부터 점차 성장해 가면서 완전하게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성인의 순종을 보여줬다(빌 2:8). 예수님은 점차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서 성장했다(눅 2:52).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보다 더 강조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머레이의 순종에 대한 설명은 더 나아간다:

순종은 추상적으로나 혹은 기술상으로 생각되어져서는 안 된다. 완전한 인격체의 모든 자원들이 총동원되어지는 것이 순종이다. 그의 인격 속에 순종이 자리한다. 순종은 그분의 완전한 구현이다. ... 우리는 그 순종의 혜택을 받는 자들이 되었다. 그분과의 연합을 통해서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은 구원론의 중심 진리가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연합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확증하는 것이다.30)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전가되어져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능동적 의로움"(active righteousness)과 "수동적 의로움"(passive righteousness)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31) 칭의론을 정립하여 개신교회의 구원론을 세운 루터에게서 이처럼 "능동적" "수동적"인 측면들로 구별해보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다. 루터 시대의 특징은 로마 가톨릭의 유사펠라기언주의를 물리치고, 성경적 칭의론을 세워야만 구원론의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는데 있었다. 그는 칭의와 성화와의 관련성을 확실히 해결하고자 두 용어를 채택한 것이다.

먼저 "수동적 의로움"이란 믿음으로 성도를 의롭다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인데, 외부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의로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인하여 무조건적으로 죄의 용서를 통해서 수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수동적 의로움에서 능동적 의로움이 주어지는데, 인간들과 피조물을 돌보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명령 에 대해서 순종함과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시키는 다양한 행위들을 통해서 얻어지는 의로움을 의미한다. 결국 루터는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에게 의를 전가한다"고 하는 혁명적인 공헌을 남겼다.32)

칼빈은, 기본적으로 루터의 칭의교리에 공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근거는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라고 강조했다.33) 칼빈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표성에 담긴 것들을 대조하면서 특히 원죄의 오염과 부패에 철저하게 파헤쳤다.34) 트렌트 선언에서 로마 가톨릭은 원죄라는 그저 약화된 것일 뿐이지, 본성의 부패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박하였다.35)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전가되는 것으로 구성됨을 밝혀놓았다.

초기 정통신학자들 중에서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60번 문항과 그들의 여러 저술에서도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가 담겨있다. 이어서 16세기 후반의 개혁주의 신학자들, 요한 볼레비아누스, 아만두스 폴라누스, 윌리엄 퍼킨스, 로버트 롤록, 더들리 펜너, 코케이우스, 삐에르 두뮬랭, 토마스 보스톤, 보에티우스, 죤 번연, 새뮤얼 러터포드 등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가르쳤다.36)

그러나 17세기로 넘어가면서 개혁주의 정통신학으로부터 일부 이탈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변질시켰고, 피스카토르, 파레우스, 모아즈 아미로 (Amyraut), 루버르투스, 죤 굳윈, 백스터 등이 능동적 순종의 교리에 대해서 거부하였다. 극단적인 교파들 (Remonstrants, Amyraldians, Socinians)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다면, 그의 죽으심은 인간의 종교적 참여의 의미를 삭제하는 것이라고 하여서 완전한 순종의 교리를 거부했다.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피스카토르(1546-1625)는 능동적 순종이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동적 순종만이라고 주장하여 논쟁이 일어났다.37)

1603년 가프의 총회에서는 피스카토르의 주장을 거부하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라이덴, 제네바, 하이델베르크, 바젤, 헤르본의 대학교들에게 더 이상 혼란스러운 주장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했다. 소무르 아카데미의 신학자 플라카에우스가 샤렌톤 총회(1644-45)에서 죄의 전가 교리를 거부하면서 논쟁이 일어났다.3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3항과 대교리문답서 70번 문항에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능동적 순종을 강조했다.39) 청교도들과 대륙의 개혁파에서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가져온 의로움에 의해서 성도들에게 칭의가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4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후에도, 존 오웬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만이 우리의 위로의 근거임을 역설하였다. 보에티우스 (1589-1676)는 그리스도의 순종사역은 자발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순종하였다고 강조했다.「사보이 신앙고백서」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의 근거임을 선언했다.41) 스코틀랜드 청교도들과 일부 침례교회에서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전가된다는 교리를 선포했다.42)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이 두 가지 측면들이 모두 다 믿는 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로움의 전가가 주어지게 되는 확고한 근거가 성립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자들이기에, 의인이라고 선언 하신다 (고후 5:2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전 생애를 걸쳐서 완벽한 순종을 성취했고, 마지막으로 최후의 대속적인 피흘림과 죽음으로 순종하였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전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인들을 구출하고자 순종하신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생애는 자신의 대속적 피흘림을 위해서 필수적이었다. 구약시대에 바쳐진 희생제물은 흠이 없어야만 했듯이(출 12:5), 전혀 흠도 없고 결함이 없는 어린 양이 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벧전 1:9). 셋째, 우리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죽으심과 부활에까지도 확장되어져 있다.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죽으실 때에, 우리 성도들도 죄에 대해서는 죽어야만 했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생활을 누리고 있으므로, 성도들도 영생을 누리며 지속되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3.3. 순종은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구속사역

둘째 아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죄의 사면과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전가를 가져다주는 칭의론의 핵심교리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전가되어졌음을 고백한다. 죤 머레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다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순종이야말로 그저 하나의 성경적 교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집약하는 "큰 구조"(a category)라고 주장했다.43)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순종의 사역이라고 보았고, 그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그 순종이 지적하고자하는 개념은 전체적으로 광범위하게 널리 확산되어 있어서 전체를 통괄하는 원리임을 충분히 입증하도록 너무나 자주 언급되어졌다.44)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모두 다 자발적이며, 능동적이다. 그가 순종하고자 할 때에, 심각한 고난을 당하셨다. 아담의 불순종과 대조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서 연구한 신약학자 롱네커는 "순종"(upakoe )과 "순종적인"(upekoos)라는 헬라어 단어와 용례를 추적했다. 그는 이런 단어들은 믿음을 이해하게 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뒷받침하였다.45)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품으라고 촉구하였는데, 윌리엄 베랜드는 "능동적인 순종"으로 풀이한다.46) 예수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서 맡겨진 사역과 직분을 수행하신 것이다 (딤전 2:5). 히브리서 9:15과 12:4에서는 "새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였다.

신약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애 동안에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 완벽하게 성취하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였음을 기술했다. 바울 사도는 반복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순종하셨다고 강조했다(고후 5:21).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주셨고 (딛 2:14),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엡 5:2, 살전 5:10).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다(갈 3:13).

4. 실천적이며 목회적인 적용: 순종과 지식은 분리할 수 없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전생애가 하나님의 율법과 뜻에 대한 순종이었다고 한다면,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자의 생활원리도 동일한 원리가 작동해야만 한다. 그동안 이교도의 나라에서 살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하더라도,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의 범위와 내용이 극히 제한적이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시대의 영향 속에서 자라났기에,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자기중심적이 되었고,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기 쉽다. 또한 자신의 주장만을 정당화하려하고, 심지어 신학적인 안목과 전통마저도 자기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용하려는 경우가 너무나 많고, 때로는 자신의 잘못도 변명하려고 악용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천과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과 법도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지식"이라야만 한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과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 그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 신학과 순종에 관한 중요한 교훈들에 대해서는 존 프레임 박사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교리」에서 배울 수 있다.47)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통치, 권위, 임재에 대해서 종합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인데, 그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에 그치는 인식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분의 권위를 존중하고, 피조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4.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순종을 창출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기독신자는 지식만으로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나아간다. 여기에는 모두 여덟 가지가 제시되어져 있는데, 그 정점은 역시 사랑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을 더하라"(벧후 1:3, 5)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 지식으로 분별력을 갖게 되어서, 세상의 더러움에서 돌아선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0)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요 14:15, 21). 그것이 고난의 길이라 하더라도, 참된 신자는 감당하고자 나아간다. 이처럼 위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엄청난 축복을 확증해 주시면서, 동시에 이와 함께, 단계적으로 거쳐야할 인내, 고난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될수록,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피조물인 인간과의 이런 관계는 피할 수 없는 성화의 경험이다. 하나님 영광의 성경적 모습이 하나님 백성에게 옮겨지고, 하나님 영광의 성경적 모습이 하나님 백성에 임하고,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하는 하나님 백성의 성경적 모습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4.2. 순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한다

사람이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행위, 인간 행동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파악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요 7:17-20; 참조할 성경들, 엡 3:17-19; 딤후 2:25; 요일 3:16; 시 111:10; 잠 1;7; 15:33; 사 33: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피조물의 올바른 태도일진대,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바람(desire)을 동반하는 존경과 경외를 가진 그런 기본적 태도이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제 1항목과는 정반대의 요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경에서 지식과 순종 사이에 '순환적(circle)' 관계가 존재한다. 이 둘 가운데 어떤 것도 일시적으로나 인과적으로 다른 것에 앞서지 않는다. 지식과 순종은 분리할 수 없고 동시적이다. 각각은 서로를 풍성하게 한다(참조. 벧후 1:5f). 일부 개혁주의 '주지주의자들(intellectualists)', 예를 들면 미국 장로교회 철학자 고든 클락 박사는 이 명칭을 자신에게 적용했는데, 이런 순환성(circularity)을 공정하게 다루지 못했다.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는 "삶은 교리 위에 세워 진다." 역시 "교리는 삶 위에 세워진다"는 강조를 남겼다. 확실히 우리가 하나님에게 더 완전하게 순종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더 완전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강조점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은혜가 지식을 창출 한다는 요점과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초로 지식과 순종을 우리에게 동시에 주신다. 일단 지식과 순종이 주어지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점점 더 큰 완전함으로 지식과 순종을 제공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단을 사용하신다. 다른 말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식을 주시는 수단으로써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주시는 수단으로써 우리의 지식을 사용하신다.

4.3. 순종과 지식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성경에서 매우 자주 순종과 지식을 서로 동격으로 놓고 있다. 순종과 지식 사이에 상호 교차적인 순환성은 훨씬 더 확장되어져 있고, 확대되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지식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원하고 더 많은 은혜로 이어진다(출 33:13). 또한 더 많은 은혜는 더많은 지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은총과 호의를 베풀어주시기에 '일방적(unilateral)'인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을 창출해 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람의 지식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를 이해하거나 파악하거나 창출할 수는 없다. 호세아 6:5-6을 보면, 아담의 경우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결국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마저도 없어져 버렸음을 알 수 있다.

순종과 지식, 각기 서로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거의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다(예., 렘 22:16). 또한 가끔 지식은 뚜렷한 윤리적 범주의 일반 목록 안에 있는 용어로써 표현되기도 한다(예, 호 4:1f). 따라서 지식은 일종의 순종으로 제시된다(참조. 렘 31:31f.; 요 8:55(문맥 특별히 19, 32, 41에 주목하라).

고전 2:6,13-15에 보면, 이 세상에서 "온전한(mature)" 지혜라고 하는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통치자들의 지혜나 권세가 아니라, 윤리적-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음이 강조되어져 있다(참조, 엡 4:13; 빌 3:8-11; 살후 1:8 이하; 벧후 1:5; 2:20 이하).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순종은 단지 지식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지식을 이루는 구성적 요소가 된다. 순종이 없으면, 그 어떤 지식도 존재 하지 않으며, 또한 지식이 없이는 그 어떤 순종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운닝의 저서, 『기독교는 계시를 가지고 있는가?」에 보면, 실제로 지식이 담고 있는 개념적 의미가 왜곡되어져 있다. 그는 계시된 신지식의 존재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지식을 순종과 동일시한다.48) 그는 자신의 주장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가 제시한 유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단순히 학식을 증가시키라는 의미로서의 '지식'을 반대한 부분이다. 그는 우리가 가진 전통적 지식에의 숭배와 싸우는데 있어서 매우 유익한 지적을 했다.

순종과 지식은 분명히 다른 용어이다. 무작정 모든 성경본문에서 서로 바꿔버릴 수는 없다. 모든 문맥과 단락에서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동의어는 아니다. 두 단어는 분명히 다르다. 지식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 간에 존재하는 차별성과 구별성을 아는 것이고, 순종은 그 관계 안에서 우리 인간의 행동과 활동을 지정하는 단어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하여서 종종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다.

4.4. 순종은 지식의 기준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인가를 확인하려고 한다면, 간단하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문제를 내서 필기시험을 보면 된다. 그러나 더 확실한 방법은 그의 생활을 조사해 보는 것이다.

성경에서 규정하는 무신론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없다는 이론적인 입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태도와 자세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란 우리 인간의 부패 가운데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시 10:4ff.; 14:1-7, 53). 기독교 신앙이나 지식을 가졌느냐의 여부를 검증하는 길은 거룩한 생활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마 7:21ff.; 눅 8:21; 요 8:47; 14:15, 21, 23f.; 15:7, 10, 14; 17:6, 17; 요일 2:3-5; 4:7; 5:2f.; 요이 6f.; 계 12:17; 14:12). 거룩한 삶이 있으면, 기독교 신앙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검증하는 궁극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인간이 지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즉 우리가 그분에 대해 단지 이론으로 만들 수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의 생활 속에서 깊이 관여하시는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Yahweh)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고 선언하셨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독립성과 자존성을 가리키는 구절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이 판별해 낼 수 없다. 일찍이 쉐퍼(Francis Schaeffer)가 해설하였듯이,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면서, 존재하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련성(involvement)은 실질적인 관계이다. 우리의 이론적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의 관계이다. 불순종하는 것은 괘씸하게 도 만물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관여하고 있음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다. 따라서 불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과 무식함을 포함한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지식이 있음을 표현하는 길이다.

4.5. 지식 자체를 순종으로 추구해야 함이 분명하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만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가에 대해서 지침을 주었다. 참지식과 거짓 지식의 차이점을 식별하는 계명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고린도전서 1:2; 3:18-23; 8:1-3, 야고보서 3:13-18절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가 순종으로 신지식을 추구할 때 우리는 기독교 지식은 권위 아래에 있는 지식임과 지식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자율적이 아닌 성경에 지배를 받아야 하는 근본적인 핵심을 가정한다. 또한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의 진리(또한 어느 정도 성경의 내용)를 우리가 가진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지식이 다른 모든 지식을 위한 기준이 되고 다른 명제의 수용이나 거부를 지배한다면 이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어떤 명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우리가 다른 무엇을 아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는 그분을 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배해야 한다. 이것은 난점이다. 왜냐하면 결국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오류가 있으며 또한 때때로 교정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교정은 어떤 다른 종류의 지식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단지 성경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기초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맺는 말

인간의 본성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높은 지위와 권세, 육체적 쾌락과 물질적인 성공만이 최종 목표가 된다. 그러한 세속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한국교회도 역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길을 따라가게 될 때에는 최종 승리와 종말론적인 희망이 있다.

아담의 불순종을 따라가는 길은 패망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 살려는 성도에게는 영생과 생명과 기쁨이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희생과 순종을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고 허황된 것이라 비판하며 거부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다 아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순종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도록 성령의 선물로 믿음을 얻게 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확고하게 간직하면서, 순종과 복종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성도가 취하는 모습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