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관 노마드 카페
▲인문·소설 신간 위주로 꽂혀있는 한 북카페 책꽂이. ⓒ크리스천투데이 DB
교인들은 목사님과 소통이 안 된다고 단정한다

“이런 이야기는 목사님과 진지하게 대화를 해야 되지 않아?”

“아냐, 해 봐야 뾰족한 수가 없어, 지금까지 해봤는데 소용이 없었잖아!”

“그냥 우리끼리 의견만 모아서 일을 되도록 만들자, 단지, 아셔야 되니까 말씀만은 드리자.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받아들일지 여부는 목사님의 소관이야?”

난상토론의 결말은 결국 자기들끼리만 의견을 통일하기로 한다. 목사님께는 토론 내용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친다.

교인들이 목사님과 대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목사님과 대화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성도들의 생각은 인간적이라며 받아들이지 않고, 무조건 신학적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의 이야기들을 카페에서 글을 쓰며 가끔 듣는다.

설교자가 인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

연세대 명예교수인 김형석 교수는 그의 책 《교회 밖 하나님 나라》에서 고인이 된 박경리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말한다.

김 교수의 팔촌 누님은 교회 권사였다. 그녀의 이웃 중 한 명이 박경리 작가였다. 둘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박경리 작가가 교회를 다녔으면 해서 교회를 가자고 몇 번 권했다. 권하니 교회를 출석했다. 그녀는 몇 번 출석한 후 안 나가겠다고 했다.

그 이유로는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 오늘날 인간이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는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기 때문이다.”

앞의 예나 박경리 작가의 이야기처럼, 공통점은 목사와 교인이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교인들의 목사에 대한 이야기는 부정적이다.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과거의 필자가 떠오른다. 필자도 소통이 되지 않는 목사들 중 한 명이었다. 교인들에게 듣던 말 중 하나가 “목사님 우리가 중지를 모은 것입니다. 목사님 기도하시면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였다.

그러면 필자는 교인들의 입장은 전혀 헤아리지 않은 채, 성경을 근거로 답변을 했었다. 이후부터는 교인들이 자기들 생각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목사들은 성도들의 심정과 상황이 자기 신학에 비추어 다를 경우 칼처럼 자른다. 목사가 가진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기 때문이다.

목사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 있지만, 우리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그들의 삶을 헤아려주시는 방법을 사용하셨던 것이다.

예수는 인문학자이셨다. 인문학자이셨기에 인간의 마음과 입장, 그리고 상황을 받아들이셨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 예수께 몰려들었다.

인문학은 소통학이다

인문학은 불통의 상황을 소통의 상황으로 만들어낸다. 작금 한국교회의 여러 잡음들은 세상, 그리고 교인과 소통하지 않기에 발생한 것이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문제나 그 처리 과정, 그리고 명성교회 세습 문제 등은 교회의 ‘인문학 부재’가 어느 정도 심각하지를 대변한다.

설교자는 세상, 그리고 교인과 활발하게 소통해야 한다. 국민들은 대통령이 소통하지 않자 촛불을 들지 않았나.

문제는 설교자가 교인과 세상을 소통의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더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설교가 아니다. 진리를 외쳤는데 진리가 벽에 부딪혀 튕겨져 나왔다면, 진리가 진리 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인문학을 공부한 뒤 소통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위 목사들에게도 소통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목사가 소통이 달인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하나님과 소통의 달인이어야 함은 물론, 교인과도 소통의 달인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소통하려면 신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과 소통하려면 인문학을 알아야 한다. 목사들을 10여년 가르쳐 본 경험에 의하면, 설교자들의 문제는 인문학의 문제, 즉 소통의 문제임을 깨닫는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인문학을 인본주의라고 단정해 버린 뒤 멀리한다. 그럴 경우 소통의 부재는 더욱 심화될 뿐이다.

설교자는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설교자는 교인과 소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소통을 잘 하도록 도움을 주는 인문학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인본주의란 무엇인가?

설교자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인문학을 알기 전에, 먼저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tarianism)가 뭔지 알아야 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가치를 주된 관심사로 삼는 사상이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인간성(humanity)만이 존귀하다고 믿는 실증주의적 인간성 숭배 사상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이런 이유로 인본주의는 인문학과는 상극이다. 둘은 완전히 다른 사상 체계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영국의 시인 던바(William Dunbar)의 고백처럼 행동하는 존재다.

“사람아, 너의 창조자를 기쁘게 해드리고, 즐겁게 지내라.”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다. 그 다음에 인간끼리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는 존재다. 하지만 인본주의는 인간을 신적 위치에 올려놓는다.

천지를 분간하기 쉽지 않은 10대 청소년들은 자기는 무적, 즉 ‘슈퍼 히어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청소년을 슈퍼 히어로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그저 배움을 한없이 해야 될 미완성의 인간일 뿐이다. 이런 미완성된 인간을, 인본주의자들은 완전하고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인본주의는 그 중심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둔다. 관심도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최고이며, 진리는 인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도 각 개인이 결정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본주의는 잘못된 사상이다.

‘인문학’은 인본주의가 아니다

‘인문학’은 인본주의가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이 어떤 사람인가?’를 비롯해 인간의 특성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설교자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설교를 듣는 사람, 즉 소통의 주체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즉 “인간이란 누구인가?”,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 “인간에게 어떤 주제가 필요한가?”를 알고자 하는 학문이다.

세상은 인문학 열풍 한가운데 있다. 이는 설교자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 이유를 강력하게 말한다. 한양대학교 교수인 정민은 그의 책 《체수 유병집》에서 작금의 인문학 열풍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옛날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지금이 납득되지 않아서다.”

설교자가 인문학을 해야 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설교자가 인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설교를 통해 교인을 납득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 설교자가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설교가 피상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박경리 작가는 목사의 설교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했다. 설교가 피상적으로 흐르는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설교자들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지라도 성경만 언급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런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고 토로한다.

결국 설교를 들었지만, 성도들의 삶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부담만 가중된다. 설교가 삶에 적용되려면, 설교에 구체성을 띠게 하는 인문학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인문학이 인본주의가 아니듯, 신학과 인문학은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 인문학은 도리어 설교를 맛깔스럽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설교에서 신학과 인문학은 하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인문학에 깊은 조예를 가져야 한다.

인문학이란?

인문학(humanities)은 소위 ‘문사철’로 알려져 있다. 문학, 역사, 철학, 언어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즉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을 ‘후마니타스(Humanitas: 인간다움)’라고 한다.

《인문학을 하나님께》의 저자인 한재욱 목사는 설교자가 인문학을 해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인문학은 명답이고, 성경은 정답이다.”

인문학은 설교자가 교인에게 정답을 찾도록 하기 위해 제시하는 명답이다. 설교는 명답을 찾아서 정답을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삶의 원리 찾기이자 삶의 기초 튼튼히 하기’이다. 다산 정약용의 말처럼 문심혜두(文心慧竇)다. ‘문심’은 글 속에 새겨진 지혜, ‘혜두’는 슬기 구멍이다.

글을 하나 하나 배워 익힐 때마다 지혜의 곳간이 차고 슬기 구멍이 열려야 한다. 인문학을 하면 할수록 자기만의 삶의 원리가 터득된다.

필자는 독서를 시작한지 3년쯤에, 책 1,200권을 읽었다. 그랬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알 수 없었는데, 어느 순간에 어떤 글이 잘 쓴 글인지, 그리고 설교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가 깨달아졌다. 이것이 인문학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신학을 하면 할수록 인간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알고 싶은 인간을 들여다보려면 인문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인문학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진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세상에서 정답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문학과 배치되지 않는다. 서로 선순환을 만들도록 도움을 준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자신을 알기 위해 인문학을 해야 한다

신학은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한다. 인문학은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한다.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 준다.

설교자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교인과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인간을 이해한 설교자는 좀 더 효율적으로 교인을 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그것은 인문학을 통해 공감의 능력이 키워져 청중이 하나님의 말씀에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을 자세히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을 자세히 알기 위해, 인문학을 해야 한다.

설교자의 착각 중 하나가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이다. 필자도 그러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나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 나였다.

설교자들을 만나면 100%가 자신이 설교를 잘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 경험상 90% 이상은 설교를 잘 못한다. 이런 현상은 자신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독서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지력(知力)이 없는지 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안다. 책을 쓰면 쓸수록, 자신의 책이 형편없는지 안다. 일반 책과 기독교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기독교 저자의 글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안다.

인문학 독서를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게 된다. 설교를 어느 정도 못하는지도 깨닫는다. 그래서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지 절감한다.

이처럼 설교자는 인문학을 통해 자신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가 자신을 알 때 비로소 설교자다운 설교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이 세상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어쩌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을 모르니 설교자로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 결과 세상은 교회를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의 근원은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자녁에는 축제로/좋은땅》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