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다. 대상이나 그 때의 정황에 따라 어법(語法)을 달리했다. 사소한 것들부터 구원, 영생, 율법, 믿음 같은 기독교의 본질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내용은 다양하다.

물론 내용의 본질은 동일했지만, 때론 강조, 역설(paradox), 은유(metaphor, 隱喩)가 너무 극적(極的)이어서, 동일 주제가 장면에 따라 완전히 상반되게 나타났다.

따라서 성경 독자는 그의 말씀들을 읽을 때, 전후 정황(情況)을 간과한 채 그것들을 직설화(直說化),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표적인 예가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충만해 스스로를 영생 얻기에 충분하다고 여기는 ‘부자 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응대(應對)이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정황적 고려 없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늘날 ‘행위구원자들’의 오해가 일어날 수 있다.

자신의 율법적 의를 예수님께 추인(追認) 받기라도 하려는 듯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하는 부자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런 그의 율법적 구원관을 동의라도 해 주려는 듯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십계명)을 지키라(마 19:17)’고 하셨다.

그러자 청년은 기고만장하여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절)’라며 되받아쳤고, 예수님은 다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며, 고단위의 의를 요구했다.

예수님과 부자의 대화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행을 행할 때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는 것처럼 들리며, 이는 예수님이 ‘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요 3:16)’고 한 말씀과 배치된다.

그리고 이 말씀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는 말씀 등과 연계시킬 때 그 의미는 거의 고착화된다.

그러나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9:21-22)‘ 고 한 마지막 결말에서 예수님이 그 청년과 나누었던 대화의 진의(眞意)가 비로소 드러난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의 이면(裏面)에는 ‘율법적 의로 영생을 얻겠다고?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라는 복안이 깔려 있다.

청년이 제시된 율법에 자신감을 피력하면 예수님은 더 높은 난이도의 계명을 제시했고, 마지막에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최고 난이도(最高 難易度)의 계명을 요구했다. 청년은 결국 거기서 두 손 들고 투항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알리려는 것은 청년의 율법적 의를 추인(追認)해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율법의 요구는 끝간 데 없으니, 행위적 의로 영생 얻을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 ‘율법에 흠이 없다(빌 3:6)’고 자타가 인정하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지목하며, “그들 보다 너희의 의가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는 예수님의 말씀 역시 그렇다.

언뜻 들으면 ‘당대 최고의 의인(?)들이었던 바리새인 의(義) 이상의 율법적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율법적 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義) 곧, ‘믿음의 의’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의가 인정받지 못한 것은 그것이 율법의 기준에 조금 모자란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요구한 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가 하나님께 가납(嘉納)될 수 없다는 증거는 그들을 향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못 들어가게 막는 자들이요(마 23:13)’, ‘독사의 자식들(마 12:34)’이라고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확인된다.

동시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 벌벌 떨고 있는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한다(요 8:11)’고 해 준 것이나, 동족의 흡혈마(吸血魔)라고 질시받던 삭개오를 향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고 해 준 것.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2:43)’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에 대해 이중 잣대를 보인 것이 아니다.

이처럼 ‘행위’와 ‘믿음’의 상반된 강조는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자들의 주장처럼, 소위 ‘율법시대’인 구약에서 ‘믿음 시대’인 신약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인 초대교회에는 ‘이신행득구(以信行得救)’의 혼합방식이 더 적절했기에 ‘행위’와 ‘믿음’이 함께 제시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율법 시대’라고 규정한 구약시대마저도 ‘믿음의 법’으로 경륜됐다. 믿음은 신구약을 불문한 영원불변의 구원도리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율법’과 ‘믿음’을 바꾸어 들고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개개인의 영적 상태와 그때그때의 정황에 따라 강조, 역설(paradox, 逆說), 비유(比喩), 은유(metaphor, 隱喩)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충만하여 행위적 의를 고집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자기 의’가 박살나지 않으면 믿음의 의를 가질 수 없기에(갈 3:24), 율법의 정죄를 위한 ‘완전한 율법적 의’가 그들에게 요구됐다.

인간은 자기 의가 훼파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들은 끝내 자기 의에 매몰되어 믿음의 의를 거부했다).

이와 상반되게, 이미 율법(롬 2:14-15)의 정죄를 받아 죄의식으로 주눅 들어 있었던 죄인들은 율법으로 데려갈 필요가 없었기에 그들에게는 사죄의 은혜만이 선포됐다.

이런 상호 모순돼 보이는 가르침들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때 둘을 조화시키려고 ‘이신행득구(以信行得救)’ 같은 교리를 창안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행위구원론자들은 그들의 성경 오독(誤讀)으로(마 22:29) 인해, ‘율법적 완전’의 요구가 사람들을 절망시켜 그리스도께로 인도받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갈 3:24)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능가하는 율법적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왜곡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성경 오독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뜨려지는(마 15:14) 결과를 낳았다.

그럼 왜 이런 왜곡이 생겨날까? 그것은 심오한 신학 지식의 결핍 때문이라기보다는 직설(直說), 역설(逆說), 풍자(諷刺), 은유(隱喩)를 읽어내지 못하는 난독증(難讀症)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난독증은 문장을 읽어내는 어문력(語文力)의 부재 때문이 아니고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다. 더 근원적으로는 그들에 대한 천국의 불허로 그들로 깨달아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한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0-15)”.

바리새인들은 성경과 고도의 학자적 소양을 겸비하여, 충분한 성경해석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또 그들은 성경에 대한 애정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커서 성경 상고에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경에서 그것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치 못했다(요 5:39). 이는 순전히 그들의 난독증 때문이다.

이에 비해 성경 지식도 학적 소양도 일천했던 가나안 여인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 개같은 너희 이방인에게로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마 15:24, 26)”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바리새인 같은 난독증 없이 은유(metaphor, 隱喩)로 즉각(卽覺)했다.

만일 그녀가 예수님의 말씀을 직설법적으로만 파악했다면, 그 말은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만의 메시아이고 개와 같은 이방인들의 구주가 될 수 없다(마 15:26) 는 차별적 언사로 들렸을 것이다.

나아가 ‘그리스도 마져도 사람차별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그로 인해 어쩌면 실족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은유(隱喩)’로 읽어냈기에,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8)”라고 응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가 자신을 차별하여 배제시키려는 의도가 아닌, 자신의 믿음을 떠 보기위해 던진 미끼라는 것도 파악했다.

그리고 죄로 타락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수 없는 개와 같은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런 비참한 인간에게 자비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도 간파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여인이나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읽을 때, 바리새인들처럼 난독증(難讀症)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셨다.

이는 우리의 대단한 어문력(語文力)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의 은혜를 입어 마음의 완고함의 수건이 벗겨졌기 때문이다(고후 3:14).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