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남궁억은 영문법 시간을 이용해 몰래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쳤다. 총독부의 날카로운 감시의 눈이 배화학당에서도 점점 더 번득거렸기 때문이었다.

경성 거리에는 일찍 핀 벚꽃 잎이 져서 어지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배화학당 교실엔 학생들이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단정히 입고, 길게 땋은 머리에 붉은 댕기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얼마 후 훤칠한 키에 두루마기를 걸친 남궁 선생이 들어서자 학생들은 영문법 책 대신 등사판인 조선 역사 책을 꺼내 놓았다. 한 명은 창가에 붙어 서서 망을 보았다.

“역사는 거울입니다. 지난날의 잘잘못을 비추어 보아 오늘을 가다듬고 그리하여 내일을 진실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짐승에겐 역사가 없습니다. 어제도 모르고 내일도 모른 채주어진 순간을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만족할 뿐입니다. 아니, 만족이 아니고 굴종이겠지요.

역사를 바로 알면 오늘을 참답게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불의와 맞서 싸우게도 되고요.

우리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서 지난날의 잘못은 과감히 고치고 잘한 면은 받아들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매국노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일시적으로는 떵떵거리며 부귀영화를 누릴지 몰라도, 저 훗날 기록될 새 역사 속에서는 영원히 민족의 죄인으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남궁억 선생이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고 있을 때 망을 보던 학생이 책상을 다급히 두드렸다. 교실 안은 분주해졌다. 학생들은 책상 위에 펼쳐 놓았던 조선 역사책을 감추느라 다급했다. 그들은 즉시 책상 위에 영문법 책을 꺼내 놓았다.

그 순간 누군가의 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긴장감 속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노크도 없이 교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리고 양복 차림의 두 사나이가 들어섰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학무국장과 수행원이었다. 수업을 규칙대로 잘 진행하고 있는지 감독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학무국장의 매서운 두 눈이 금테 안경 뒤에서 번득거리며 교실 안을 슥 훑었다. 유인희라는 학생은 떨어진 책을 두 발을 써서 몰래 주워 올려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식은땀을 흘렸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불현듯 학무국장의 매서운 눈길이 그쪽으로 갔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닥치려는 순간이었다.

순간 남궁억 선생이 칠판에 써둔 영어 문장을 가리키면서 크게 말했다.

“김오재 학생, 일어나서 한번 읽어 봐요.”

그 학생은 영어를 아주 잘하는 터라 막힘없이 술술 읽어 나갔다. 그리고 일부러 큰 소리로 해석까지 했다.

학무국장의 눈길이 김오재 쪽으로 간 틈을 타서 유인희는 겨우 책을 집어올려 치마 속에 숨겼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창백한 얼굴에 진땀을 흘리고 있는 유인희를 발견한 감독관이 천천히 다가서더니 물었다.

“너 설마 무슨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네, 네….”

“흠, 수상쩍은 냄새가 나는걸. 책상 속에 든 책을 모두 꺼내 놓아 봐!”

유인희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꺼내었다. 그 순간에도 치마 속에 감춘 책이 떨어질까 봐 가슴이 콩닥거렸다.

학무국장은 의심을 풀지 않은 채 음흉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가슴은 왜 누르고 있지?”

유인희의 볼이 새빨개지자 학무국장은 웃음을 터뜨리며 사라졌다. 인희는 책상 위에 엎드려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억눌렸던 긴장감이 풀리자 설움이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나라 잃은 어린 마음을 적시는 서러움의 울음이었다.

“그만들 그치세요. 우리가 지금은 나라를 잃은 신세이지만 어찌 영원히 그렇겠는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참된 지식을 배우고 심신을 닦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학생들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는 남궁 선생의 눈시울도 젖어 있었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