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인간들의 교만과 탐심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온통 미세먼지로 난리를 치르고 있습니다. 말씀 불순종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미세먼지로 자욱한 바깥 풍경을 보면서 느끼고 있습니다.

이 미세먼지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교회 안에까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비신앙인들도 상상하기 어려운 혐오스런 모습들을 생산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참으로 황당함을 느끼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가늠조차 어려워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릴 뿐입니다.

어느 교회는 양들을 면직·출교시킨 뒤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은 성도들은 다 나가라!’면서 온갖 추태와 권모술수를 부리고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성도들을 현혹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함께 도모하지 않는 양들을 내쫓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는 이곳이 하나님의 집인지, 사탄의 굴혈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2-1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신 후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그런데 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질책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든 세리이든 누구든, 만민이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전 지도자들은 상인들과 결탁해 성전 뜰을 속된 시장바닥처럼 전락시키고, 순례자들에게 폭리를 취함으로써 성전을 마치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2천년 전 그때와 작금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이 과연 다를까요?

어처구니없는 일은, 쇠사슬로 교회 출입구를 봉쇄해 가며 400-500명의 양들을 흩어놓고서, 수개월 동안 ‘잃은 양 찾기’를 해 포상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희한한 일이 버젓이 전개되는 현실 앞에, 기독교 역사에 이러한 교회가 또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잃은 양을 찾기보다, 차라리 지도자들의 잃어버린 양심을 우선순위로 찾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잃은 양을 찾겠다면서 가까이 있는 성도들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더니, 헌금을 많이 하던 멀리 있는 ‘양’ 만 찾고 있으니, 어찌 선한 목자들이라 할 수 있을까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 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 이니라(예레미야 23:1-2)!”

이는 충성스럽지 않고 불의한 목자들을 폐하고, 하나님의 의롭고 신실한 목자들을 새롭게 세우겠다고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양들을 위해 최선 다해 보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크신 진노가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있을 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 하냐(에스겔 34:2)”.

이 본문은 거짓 목자와 참 목자의 비유를 들면서,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만이 진정으로 살 길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목자 되신 그리스도만을 삶 속에 주관자로 모시고, 그 분께 절대 순종해야 할 것임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린 양과 목자에 대한 말씀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양들을 위해 어떤 좋은 꼴을 먹일까, 혹 사나운 포식자들에 의해 잡아먹히지 않을까, 추위와 더위를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하며 양들의 행복을 위해 깊이 골몰하며 기도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양들 하나 하나를 돈으로 생각하여, 헌금을 많이 내고 자신들의 사치놀음에 도움이 되는 양들에게만 눈길을 주고,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신음하는 양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교회 밖으로 내모는 현실 앞에, 여기가 바로 강도의 소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5:4)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태복음 9:36)”.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양들은 목자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없이 더더욱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목자는 양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충분히 공급해야 하고 사나운 포식자들이나 도둑으로부터 양을 지켜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덕천교회
▲쇠사슬이 채워진 부산 한 교회 입구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린 양들의 요구사항은 뒷전이며,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급급하여 양들을 돌보지 않고, 사납고 어두운 곳에 그대로 방치하며, 세상 즐거움에 사로잡혀 양들의 울부짖음에는 귀를 닫고 있습니다.

목자는 때때로 밤을 낮 삼아 양을 지켜야 하며, 심지어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양들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희생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목자는 맹수의 공격을 물리치거나 방어하기 위해 마땅히 지녀야 할 지팡이와 막대기, 물매 등을 필수적으로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양을 지키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올바른 사랑의 정신과 사명감으로 무장돼야 하지만, 이곳에서 초막 셋을 짓자고 하며 세상 향락과 태평 시대를 누리려는 안타까운 모습에 긴 한숨만이 흘러, 하나님께 고요히 부르짖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가 없으면 꼴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목자와 양의 관계 때문에 목자는 비유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혹은 백성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지도자의 폭정에 시달리는 양들을 일컬어, 찬송가에도 ‘어둔 죄악 길에서 목자 없는 양같이 모든 사람 길 찾아 헤맨다(523장)’는 찬송을, 그릇된 지도자들에게 불러주고 싶을 뿐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 지도자는 양을 치는 목자의 사명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이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양 역시 목자의 음성만 듣고도 무조건 따르고 순종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성서학자들은 ‘구원의 비유들’이라고 합니다. 이 본문은 잃은 양의 비유를 말하면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목자가 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세리, 죄인, 창기들을 멀리하는 것을 율법의 뜻을 이루는 일로 착각했던 당시의 모순을 지적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잃은 양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자신이 곧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임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의인 아흔 아홉보다 하나님 앞에 회개한 한 사람의 죄인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라 함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며, 은혜의 보좌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힘없고 불행하고 소외된 억눌린 양들을 보호해야 함에도, 돈 많고 힘 있는 권력자들과 한데 뭉쳐 당시 율법자들보다 못한, 양들을 내치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더더욱 암울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니,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잃은 양 찾기란 참으로 훌륭한 하늘의 소명이며,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일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진심 없는 행사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우리 옛말과 같이 그저 허울뿐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주님 앞에 모든 죄를 자복하고 돌아오는 참 목자와 참 지도자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교회 밖에서 절규하는 양들의 신음을 제대로 듣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화목한 교회로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