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주지하듯 ‘기독교 변증사(辯證史)’는 기독교 포교를 위한 공격적 방도로서가 아닌, 이교도들의 박해에 대한 소극적인 자기 방어에서 시작됐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변증가는 아테네 감독 콰드라투스(Quadratus, 2세기 초)였는데, 그의 최초 변증은 124년- 129년경 박해에서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한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 황제에게 보낸 탄원서였습니다.

교부 터툴리안(테르툴리아누스, Tertullianus, 160-220)은 기독교사에서 최초로 삼위일체(Trinit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변증서(護敎書: Apologeticum, 197)>까지 썼을 만큼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락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거부하여 ‘예루살렘(Jerusalem)과 아테네(Athenae, Athens)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철학과 신학의 불용성(不容性, non-inclusiveness)’을 주장하며, 오직 성경에 근거한 방어적인 변증만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은 인간 이성이나 철학적 변증에 의해 알려질 수 없으며,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인간 이성에 신뢰를 두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이 터툴리안의 과격함(?)을 예수님과 사도 바울에게서도 동일하게 봅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 1:2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

그러나 오늘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 내용과 방식을 보면, 인간의 지혜, 이성에 대한 기독교적 전통과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오히려 강단은 인간 지혜, 지식의 경연장처럼 전락되고, 2천년 전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가 그랬듯이(마 8:20) 하나님의 지혜인 성령이 강단에서 머리 둘 곳 없게 만들었습니다.

◈피조물들에 의해 증거될 수 없는 하나님

주지하듯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라는 말씀은 피조만물이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을 핑계치 못하도록 하여, 불택자들을 심판하려는 빌미입니다.

인간의 이성, 지혜로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것은 움큼으로 5대양을 측량하고, 줄자로 6대주를 측량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욥 37:2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 145:3)”.

예수님 자신은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에서 이를 더욱 확증받습니다(요 2:25). 삼위 하나님은 오직 그의 자증(自證, one's own evidence)에 의해서만 피조물들에게 알려집니다.

인간의 타락 전, 아니 태초부터 하나님은 2위이신 성자 말씀(λόγος, 요 1:1)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말씀인 성자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것은(요 1:1) 그가 하나님과 일체(一體)되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광대하시기에, 성자 말씀의 계시로만 알려집니다. 그가 없이는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이 제대로 피조물에게 알려질 수 없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14) 후에는 신성을 입은 그의 육신(골 2:9)의 형상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요 12:45; 14:9). 그리고 2위이신 성자 말씀에 의해 하나님이 증거된다는 것은 3위 하나님의 자증(自證)으로만 하나님이 알려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요 6:45; 5: 32, 마 16:17)와 성령(요 15:26)에 의해, 성부 하나님은 성자(요 14:9)와 성령에 의해, 성령 하나님은 성자 말씀에 의해 증거됩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3위 하나님의 자증에 의존됩니다.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자만 성자 그리스도께로 갈 수 있으며(요 6:45), 오직 성부와(마 16:17) 성령으로만(고전 12:3)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에 의해 3위 하나님의 자증이 일어남


3위 하나님의 자증(自證)은 삼위 하나님 경륜의 결정체인 복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롬 5:15; 14:15, 벧전 3:18), 그리스도 안에 계시면서 성자의 구속을 성취하신 성부(요 5:19; 14:10).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성령의(롬 8:11) 종합적인 경륜이 복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3위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3위 하나님이 계시됩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이 전파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증거가 일어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이 증거됩니다.

이는 ‘3위 하나님의 자증’이 온전히 ‘복음 선포’에 의존돼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무한자 하나님을 유한자 인간이 증거할 수 없다’는 전제와 ‘복음전파 없이는 하나님이 증거될 수 없다’는 두 전제가 충돌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이 두 전제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고안한 경륜이 전도자의 역할을 ‘증거자(the testifier)’가 아닌 ‘전파자(the proclaimer)’로 한정지은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전도’와 ‘하나님의 자증’의 역학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전도자는 분수를 넘어 증거자(testifier)가 되므로 ‘하나님의 자증’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도자가 증거자(the testifier)가 될 때, 사도 바울의 말대로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게 만들어(고전 1:17), 3위 하나님의 자증을 훼방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한 바이기도 합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전도자는 자기 분수를 지켜 ‘증거자(the testifier)’의 지위를 성령께 내어드리고 자신은 세례 요한처럼(요 1:23), 겸손히 ‘전파자(the proclaimer)’의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초기 전도에서는 이것을 몰라 증거자가 되려는 월권을 행했고, 그 결과 실패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한 말은, 단지 그가 전도의 내용을 ‘십자가 복음’으로 한정짓는다는 것뿐 아니라, 성령만을 증거자로 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곧 성령 하나님의 자증으로만 하나님이 증거되게 하려고 ‘십자가 복음’만을 증거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3위 하나님의 자증으로만 알려지는 십자가 복음은, 인간의 지혜나 철학을 쓸모 없게 만듭니다.

또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는 말씀 역시, 설교나 전도를 신비적인 비의한 방법으로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복음’만 전한다는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이 두 말씀들은 모두, 오직 3위 ‘하나님의 자증’에 의해서만 하나님이 증거 되도록 하겠다는 뜻인 동시에, 성령이 증거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십자가 복음’만 전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이는 3위 하나님의 자증에 기대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시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증’에 기대어 전도하는 복음 전파자(the proclaimer)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지혜’로 전도하는 증거자(the testifier)입니까?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