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비 예수, 제자도를 말하다
랍비 예수, 제자도를 말하다

로이스 티어베르그, 앤 스팽글러 | 손현선 역 | 국제제자훈련원 | 352쪽 | 16,000원

제자가 된다는 것이 뭘까?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제자라는 말을 성경공부나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 등으로 한정시킨다.

그러나 히브리적 제자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가르침은 지적인 부분도 무시하지 않지만, 진정한 가르침은 삶 그 자체이다.

랍비는 제자를 가르칠 때 책상에 앉아 공부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제자를 초대한다. 제자는 랍비의 전 삶을 배우게 된다. 제자들은 유대적 문화와 삶의 맥락 속에서 성경적 제자도를 찾아 나선다.

랍비에게 배운다는 것을 ‘발치에 앉다(sit at his feet)’라고 말한다(16쪽).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이 관용구는 제자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제자는 성경뿐 아니라 랍비의 삶을 통해 본문을 공부하길 원했다. 삶이야말로 토라를 삶으로 살아내는 법을 배울 현장이었다(45쪽)”.

제자가 된다는 말은 스승의 삶의 맥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진정한 공부는 삶이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은 곧 삶(51쪽)’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언어, 손짓, 식사 습관, 독서, 여행, 잠꼬대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

‘랍비가 일상생활 속에서 반응하고 살아가는 방식까지 아우르는 행동으로부터(69쪽)’ 배우는 것이 제자의 학습법이다.

안게 사빈이라는 도예가가 일본에서 6개월 동안 도제교육을 받은 이야기는 참 배움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고작 그곳에서 한 일은 집안일을 돕고 단순 잡무를 거들었다.

그는 시간 낭비였다고 후회했지만, 돌아와 새 작품을 만들었을 때 탄성을 지른다. 그는 전혀 배우지 않았다고 했지만 ‘부지불식간에 새로운 작업 방식을 터득(70쪽)’한 것이다.

예수님은 랍비로 오셨다. 랍비는 스승이며 가르치는 자이다. 공부는 이론과 실천이 어우러질 때 진정한 배움이 일어난다.

학습(學習)이란 한자어를 뜯어보면 배울 학(學)과 익힐 습(習)이 합해져 있다. ‘학’이 이론적인 배움이라면 ‘습’은 말 그대로 연습(演習 또는 練習)이다. ‘습’이란 한자어는 새의 날개에서 왔다고 한다. 어린 새가 날기 위해 매일 날갯짓을 하는 것이 습(習)인 것이다.

작금의 배움의 이해는 종종 학(學)에 머물고,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히브리적 배움에서 학(學)은 습(習)을 목적으로 한다.

때문에 유대의 랍비들은 공부를 ‘가장 높은 형태의 예배’로 생각할 뿐 아니라, ‘성경을 공부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가르친다(35쪽)’. 즉 배움은 삶으로 나아가야 하고, 배웠다면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삶이 없는 예배는 거짓인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학교로 데려가지 않았다. 단지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는 무슨 말인가? 예수님처럼 살아가라는 말 아닐까?

제자들은 적어도 3년 이상을 예수님을 따랐다. 함께 길을 걷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동거동락했다. 제자로의 부르심은 삶으로의 부름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77쪽)’이다.

배움은 스승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에는 ‘하베르를 만들라’는 전통이 있다. 문자적으로 하베르는 친구, 동반자를 뜻하지만 배움에 있어 하베르는 ‘함께 공부하는 친구’이다.

최근 유행하는 유대식 학습법인 ‘하브루타’의 방식이 이곳에서 왔다. 유대인들은 적지 않은 시간 토라를 놓고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토론한다.

한 사람이 본문을 해석하면, 앞의 친구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동의도 일어나고, 보충과 설명도 한다. 그러나 생각이 달라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교정하며 다듬어 가는 과정을 겪는다.

중요한 핵심은 ‘함께’이다. 유대인들에게 공동체가 없는 배움은 생각할 수도 없다. 공동체는 곧 삶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그린 성화(렘브란트).
구약 성경을 들여다보면 익숙한 절기들을 만난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 다양한 절기가 매년마다 이어진다. 절기는 ‘기념’하는 것이다.

주기적인 절기들은 과거의 하나님의 일하심을 망각하지 않도록 기억을 잡는 장치이다. 일종의 반복 학습인 셈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기억의 공동체’이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넌 다음 길갈에 열두 돌을 세운다. 그 돌들은 ‘기억 장치물’이다. 후대의 자손들이 왜 이곳에 열두 돌이 있느냐고 물으면 부모는 ‘하나님께서 우리는 마른땅으로 건너게 한 것을 기념하여 열두 돌을 세웠다’라고 답해야 한다(여호수아 4장).

기억의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4)”.

우리는 종종 습관을 악하게 본다. 타성에 젖어 기도하는 행위나 매주 드리는 예배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습관이 나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것이 나쁘다. 매주 드리는 예배가 회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 피상적인 믿음이 나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매일 성화되어야 한다. 성화는 예배와 기도, 진리에 대한 지식 등을 통해 가능하다. 매일 규칙적인 성경 읽기와 기도 습관, 회개기도와 다짐의 결단 등은 절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유월절과 같은 구약의 절기들은 ‘1세기 일상에 중요한 리듬을 형성하며 한 해에 윤곽선을 부여하고 유대민족을 그들의 성스러운 역사와 이어주는 고리(157쪽)’ 역할을 한다고 조언한다.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소망까지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애굽 종살이에서 건짐 받은 것을 기억하여 과거를 기리고 추수 때 양식을 제공하신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며 현재를 축하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절기들은 미래적인 차원도 있었다. 장차 임할 더 좋은 것에 대한 암시가 이 고대 축제들을 뚫고 지나갔다(158쪽)”.

예수님은 랍비로 오셨다. 제자들을 삶으로 초대했고, 유대적 전통을 통해 그들을 가르치셨다. 가르침은 삶을 공유하고, ‘함께’ 대화하며 생각을 공유했다. 민족적 절기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제자들과 함께 일상 속에서 재현하셨다.

주님은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새롭게 해석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이곳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유대인으로서의 예수님, 랍비로서의 예수님을 전제하지만 초월한다.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셨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는 자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다.

주님은 ‘제자 삼으라’ 명령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모든 삶을 개방하고 제자를 양성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명령이다.

내 안에 숨겨진 악과 타인이 알지 못하는 모난 성격과 행동들이 탄로날 것 같다. 겉으로 거룩한 척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유대적 절기와 다양한 삶의 습관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삶으로 재현하는 방식들’이다. 제자도는 그러한 삶을 우직하게 따라 삶으로 재현하는 작업이다.

이 책은 묻는다. 현대교회는 진정 제자를 삼고 있는가? 흥미로운 읽을거리는 읽는 재미를 더해주지만, 제자도에 대한 묵직한 물음은 진정한 제자 삼음에 대한 도전을 준다.

성경을 다시 읽어보자. 주님은 피상적 관계에 머물며 지식적 앎에 만족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천천히 그리고 깊게’ 성경을 읽으라고 촉구하신다. 왜? 진정한 제자도의 원리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