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 항거 유관순 이야기 로마
▲왼쪽부터 《그린북》, 《로마》, 《항거: 유관순 이야기》 영화 포스터. 정치적 올바름의 이념을 반영하며 사회와 역사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들로 볼 수 있다.

영화와 사회고발: 사회와 역사의 불의와 그에 대한 저항의 생생한 재현

왼쪽부터 《그린북》, 《로마》, 《항거: 유관순 이야기》 영화 포스터. 정치적 올바름의 이념을 반영하며 사회와 역사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들로 볼 수 있다.

지난주 개최된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영화 《그린북》(Green Book)이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린북》은 1960년대 초 케네디 전 대통령 임기 당시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 실태를 고발한 작품이다.

이 《그린북》과 작품상을 두고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던 작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로마》(Roma)였다. 《로마》는 1970년대 초 멕시코시티 로마 거리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일하는 가정부를 둘러싼 사회의 불안정하고 부조리한 정황, 특히 포악한 남성성에 고통받는 여성들의 일생을 그려냈다. 이 영화는 작품상을 수상하지 못한 대신 감독상, 외국어작품상, 촬영상 등을 수상했다.

그 외 강세를 보인 작품으로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눈길을 끈다. 소수민족 이민자 출신으로 서구 대중문화계의 초대형 스타가 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 분)의 삶을 묘사한 이 작품은 남우주연상과 음향편집상, 음향효과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강세를 보인 세 작품은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사회비판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그린북》은 실존인물인 재즈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와 그의 친구인 토니 립(비고 모텐슨 분)의 실제 이야기를 다뤘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서전적 시각으로 묘사했다. 《보헤미안 랩소디》 역시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전한다.

위 사실들은 대중문화계 및 언론계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의 이상을 추종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한다.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편견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약자와 소수자의 고뇌와 비통함에 공감하는 영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린북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그린북》. 흑인 인종차별 문제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국내에서 제작된 작품들도 큰 틀로 보자면 이런 동향을 점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아카데미 수상작들에 비해 작품성, 연출력, 그리고 서사의 개연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이긴 하지만, 적어도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들이 다수 개봉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런 작품들이 제국주의와 성차별의 폭력을 생생하게 재현해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이런 동향이 과도했던 탓인지, 진중한 역사적-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들에 피로감을 느낀 관객들이 가벼운 분위기의 코미디 영화로 도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달 영화 《극한직업》이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흥행성적을 거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만큼 《극한직업》이 웃음을 선사하려는 목적에 충실했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지금, 3∙1절 100주년 기념일을 전후한 시기, 국내 영화계에는 진중한 사회적-역사적 주제를 다루는 실화기반 영화들이 다시 강세를 보이고 있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와 《자전차왕 엄복동》이 며칠 전 개봉했고, 《1919 유관순》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3∙1절 100주년을 맞아 성사된 유관순 열사의 추가 서훈(기존 3등급에서 1등급 서훈으로 등급 상승) 이슈와도 맞물려 세간의 주목을 집중시켰다.

독립을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친 열사의 건국훈장 등급이 일부 친일 행위자들보다 낮다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논란이 됐고,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진보 계열 정치권 인사들이 이에 즉각 반응해 열사의 서훈 등급을 1등급으로 격상시켰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서사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녀가 천안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체포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과 옥고에 시달리던 시기를 묘사한다.

3년형을 선고받은 유관순 열사는 영친왕의 결혼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됐으나, 석방을 불과 며칠 앞두고 고문 중(혹은 고문의 영향으로)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이 시기, 극심한 고문 중에도 만세를 외치며 제국주의의 폭력에 ‘항거’하던 그녀의 모습을 과장없는 무거운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진중하고 무거운 영상의 톤이 오히려 그녀의 처절한 항거에 비장함을 더하고 있다.

서사의 치밀함이나 연출력을 떠나, 유관순 열사의 옥중 고난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아무 느낌 없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다분히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 세태가 팽배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이화학당의 개화된 ‘신여성’으로서 국가적 수준의 폭력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저항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항거: 유관순 이야기》 역시 최근 국제 영화계의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이상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인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
▲3∙1절 100주년 기념일을 맞이해 개봉한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한 장면.
◈영화와 사회정의: 인류인가 민족인가? 신앙의 관점으로 보는 사회정의

이처럼 최근 미국과 한국 영화계는 공히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이상을 반영하는 작품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작품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영화 속에 차별 철폐를 통한 정의구현이라는 메시지를 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감독들 사이에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국가주의가 신앙처럼 굳어져 버린 중국 영화계를 제외하고, 글로벌 영화시장에 참여하는 대다수 국가의 영화인들이 이런 조류에 동참하는 분위기가 확연하게 감지된다.

이런 유행이 단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수그러들지, 아니면 향후 영화계의 변함없는 트렌드로 자리잡을지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다만 현재 전세계 미디어 업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대자본 콘텐츠 제작사들, 스트리밍 업체들이 현재의 분위기를 지속하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만큼, 적어도 향후 몇 년 동안은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이념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개봉될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그린북》, 《로마》와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비교해 살펴보면 영화 속 정치적 올바름의 이념 가운데서도 지역별, 국가별 편차가 확연하게 구별된다. 차별과 불의에 대한 항거의 가치를 높이 산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이런 가치판단이 지시하는 귀결점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로마
▲여성차별과 더불어 빈부격차, 인종문제를 골고루 다룬 영화 《로마》. 작품성 측면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린북》의 경우 흑백 인종차별의 극복을 주제로 다룬다. 어찌 보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제를 담은 작품이 평단과 대중의 관심을 여전하게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미국인들이 오늘날에도 인종 차별의 부당함을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린북》은 인종차별 철폐 노력의 지향점을 인류애적 화해의 성취로 설정하고 있다. 차별은 악이므로, 단지 미워할 뿐 아니라 선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돼 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을 확고한 기반으로 삼고 있는 미국의 문화적 배경 때문으로 풀이된다. 성서는 육체적 조건이나 문화적 조건에 상관없이 각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하나의 영혼이라고 가르친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죄악에 속한다.

실제로 18세기 말과 19세기 전반부, 미국에서 노예제를 둘러싼 사회적 투쟁이 극에 달했을 때 노예제 철폐를 앞장서 주장한 기독교인 사회운동가들(윌리엄 윌버포스, 찰스 피니, 해리엇 비처 스토 등)이 내세운 중심논리였다.

《로마》에서도 이런 측면이 엿보인다. 영화 《로마》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고픈 바람을 담은 작품이다.

이 영화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두 명의 구시대적 남성들(안토니오와 페르민)은 정의롭고 평등한 화해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고 떠나간다.

이제 이들을 대신해 영화의 장면들을 주관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억압과 경제적 신분격차를 허문 두 명의 해방된 여성들(클레오와 소피아)과 소피아의 네 자녀들(그 가운데 셋은 아들, 즉 후대의 남성들이다)이다. 이들은 영화 말미에서, 특히 바닷가 여행 장면에서 사회적 차별과 남녀차별을 극복한 화해의 공동체로 자리매김한다.

이처럼 올해 서구권에서 정치적 올바름 운동 이념을 앞세워 호평을 받은 영화들은 인류적 차원의 정의와 화해를 부르짖으며 참된 인간성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서사를 전한다.

반면 한국은 유관순 열사의 민족주의적인 신앙과 정의를 주된 주제로 삼는다. 일면으로는 국가 및 민족들 간 정의롭고 호혜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탈식민주의의 이념을 전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영화가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항거 실태가 보여주는 참혹함과 그로부터 전해지는 숭고함이다. 그리고 이렇게 참혹함과 숭고함이 교차하는 느낌은 민족 간 증오심을 고취시키는데, 이 증오의 대상은 당연하게도 일본 제국주의이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의 민족주의적 신앙, 그리고 불의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진중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는 주로 투쟁만 존재할 뿐, 화해의 미래는 예견되지 않는다. 이는 여전히 민족과 국가의 틀에 갇혀있는 한국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사고를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같은 정치적 올바름의 이념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동일하게 차별 철폐와 페미니즘을 강조하더라도, 그 문화적 배경이 무엇이냐에 따라 각 작품이 지향하는 귀결점은 크게 달라진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면 마치 《그린북》이나 《로마》는 우월한 작품이고, 《항거: 유관순 이야기》는 열등한 작품처럼 비춰지지만 사실 양측에는 각각의 장단점이 존재한다.

우선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영화 속 정치적 올바름의 이상은 화해를 꿈꾸고 미래지향적 전망을 제시하려는 측면에서는 강점을 보이나, 그 화해의 지평을 과도하게 넓게 설정해서 일부 그리스도교적 윤리마저 철폐해 버리려는 급진성을 보인다.

가령 《그린북》에 등장하는 돈 셜리의 동성애 장면은 인종차별과 동성애 거부를 동일한 양태의 사회적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기존 서구의 기독교적 성윤리를 거부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반면 한국의 《항거: 유관순 이야기》와 같은 작품은 비교적 선악의 구분이 뚜렷한 제국주의와 민족관계 측면의 윤리를 내세우는 까닭에, 영화 속에 동성애 문제와 같이 그 선악 구분이 아직 모호한 이슈가 관여될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한민족은 선이고, 일제는 악이라는 이원론이 워낙 확고한 까닭에 한민족과 일본민족 간 화해와 공존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은 거의 배제되다시피하다는 문제점을 보인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 운동이 보이는 배타성, 즉 스스로 세운 정의 기준에 불합치하는 행태에 대해 교조적일 정도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배타성이 한국의 민족주의 사상과 얽히며 발생하게 된 문제로 보인다.

결국 이편이든 저편이든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각 편의 장점과 약점을 헤아리며 감상해야 할 과제를 던져준다. 그리고 이는 애초 정치적 올바름 운동의 이념이, 오늘날 스스로 그 정의로움을 한껏 과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과 윤리에는 여러 모로 불합치하는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음에 대한 증거로 볼 수 있다.

결국 향후 몇 년간 개봉될 영화들 대부분은 이를 감상하는 기독교인 모두에게 이전보다 더 “깨어 있어야” 할 부담을 안겨줄 공산이 클 것으로 예견된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