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를 의식화의 수단으로 만들지 말라

예수는 신비주의의 몰입 대상이 아니다


요즘 24시간 예수를 바라보고 동행하는 훈련을 강조하는 어느 교회가 있다. 분주하고 혼란한 시대에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매몰되지 않고 깨어 있게 하려는 충정이 엿보인다.

그러면서도 일견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동기와 목적이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성경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경륜이 도모될 수 없고 교회에 폐해를 낳기 때문이다.

일견, ‘예수를 바라보자는데 뭐가 잘못됐어? 믿음의 핵심을 붙들자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 보면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라보인다.

겉으로는 ‘예수’를 표방했지만, 의식을 대상(예수)에 몰입하는 방식은 수도원적 신비주의, 심리학적 의식화(conscientization)훈련을 연상시킨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기독교 심리학에서 텍스트처럼 여겨지는데, 이는 그것이 심리학에서 주목하는 무의식(subconsciousness)과 의식(consciousness)의 관계를 잘 묘사하기 때문이다.

책 내용 중, 그의 회심 전 방탕한 삶과 회심 후 삶의 이야기는 극적 반전미(反轉味)를 제공하며, 특히 회심 후 과거 방탕했던 행위가 꿈에서 재현되는 것을 두고 고민하는 내용은 독자들의 주목을 끈다.

"자신이 참으로 회심했다면 꿈에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데”라며, 회심의 진정성까지 의심하는 모습에서는 그의 진면목이 엿보인다.

의식과 무의식(잠재의식)에 대한 심리학적 규명이 있기 전이었기에, 무의식 속에 침잠 된 과거의 기억의 편린들이 의식(consciousness)의 방어가 해제되는 수면 시간에 꿈으로 표출된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꿈에서조차 방탕함을 허락지 않으려고 더욱 하나님께로 몰입에 천착했다. 하나님께로 몰입을 깨어있는 시간뿐 아니라 잠자는 시간까지 습관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후에 추종자들에 의해 ‘무의식에서까지 구원받아야 비로소 구원받은 것’이라는 주장을 생겨나게까지 했다.

이는 평생 그로 하여금 그것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던 플라톤(Plato) 신비주의(Mysticism)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사념(邪念)을 통제하고, 부정적 무의식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24시간 예수 바라보기’ 역시 신비주의의 몰입 혹은 심리주의의 의식화(conscientization)와 유사해 보인다.

그것이 비록 ‘예수 사랑’, ‘성화’ 등을 표방하지만, 바라봄의 대상인 ‘예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삼위 일체 하나님이라기보다, 사념(邪念)을 떨쳐내고 자신의 의식을 무의식에서 떼어놓기 위한 ‘가상 대상(imaginary object)’처럼 보인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쉬임없이 읖조리는 동방 정교회의 ‘예수 기도’나 로마가톨릭의 ‘묵주기도’와 다를바 없어 보인다.

‘예수’ 라는 대상(對象)에로의 몰입을 통해 사념을 떨쳐내고, 피조물에게서 마음을 떼어놓는, 곧 샌드위치의 속살(stuffing) 기능과 유사하다는 말이다.

성경의 “예수 바라봄(히 12:2)”은 구속 주에 대한 신앙적 바라봄이지, 몰입이나 의식화의 수단으로서의 ‘예수 바라보기’가 아니다.

‘24시간 예수 바라보기’의 또 하나 문제는 그것이 사람을 부치게 하는 매우 힘든 정신노동이라는 점이다.

휴식 없는 노동이 사람의 육체를 지치게 하듯, 의식(意識) 역시 텀(term) 없이 계속 각성 상태로 두면 정신을 지치게 한다.

물론 사람의 정신력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지속적인 각성(覺醒)으로 인한 의식의 혹사는 정신쇠약을 야기할 수 있다.

하루 수백 번씩 쉬임없이 ‘예수 기도’를 시행하는 로마가톨릭에서 교인들에게 ‘예수 기도’를 주의하여 행할 것을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그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예수 기도’를 하다가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며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지속적인 예수 바라보기 역시 그런 부작용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요즘 ‘멍 때리기(brain fade)’ 라는 것이 유행하는데,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상무념으로 멍하니 있자는 것이다. 육체에 휴식을 주듯이, 정신에도 짬을 주자는 것이다.

특히 정신은 혹사를 당해도 자각 증세가 잘 나타나지 않아, 부지불식간에 혹사로 이어지기 쉽다.

이 점에서 ‘멍 때리기’는 정신노동을 주로 하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해 보이며, 나름대로 의학적 근거도 있어 보인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평생 심한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했는데, 이는 그의 기질적인 탓도 있었겠지만 엄격한 수도사 생활의 후유증 탓이었다.

복음을 발견한 후 율법적 압박과 긴장에서 벗어나 자유 할 수 있었다 고 한 그의 고백은 이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후에 그는 ‘잠자는 것도 믿음이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다음의 말도 남겼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잠자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신다.”

그는 복음을 통해 ‘나의 구원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꽉 붙드느냐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나를 붙든 하나님의 강한 손에 의존돼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예수 바라보기’에서 따라오는 여러 체험들에 대해, 반드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보장이 될 수 없음이 유념돼야 한다. 종교다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에도 유사한 체험들이 따르기 때문이다.

교회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에큐메니칼(ecumenical)한 영성훈련들에 사람들이 ‘혹’하는 것은 나름의 신비한 체험들이 따르기 때문이다. 분별력이 결여된 사람들에게는 ‘내가 그동안 찾았던 것이 바로 이것이야’라고 무릎을 칠 만한 것들도 있다.

사람들이 신비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 뉴에이지언(new agian)이 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위대한 교부(敎父) 어거스틴(Augustine)마저, 플라톤(Plato) 철학을 통해 기독교를 만났다고 했을 정도로 그에게 있어 ‘철학적 체험’과 ‘영적 체험’은 분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실제로 의식과 영의 경계성, 심리적 메카니즘과 성령의 기능의 차이는 분별하기가 어렵다).

이런 그의 플라톤적 신비주의는 평생 그의 신앙과 신학에 고착돼 오늘날까지 신·구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오고 있다. 위대한 신학자가 그랬다면 범인(凡人)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우리의 ‘예수 바라봄’은 몰입이나 의식화가 목적이 아닌 구속주에 대한 신앙적 바라봄이다. 믿음이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지 ‘예수 바라보기’가 아니다.

‘예수 바라보기’라는 말 자체가 풍겨내는 그럴싸함에 ‘혹’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은혜의 대상을 무거운 숙제와 짐으로 만드는 변종 율법주의이다. 예수를 떠올리면 은혜와 감격이 몰려와야 하는데, ‘예수 바라보기’는 성도들에게서 그런 기대를 앗아 가버린다.

예수님은 율법의 멍에를 메고 힘겨워하는 자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했는데, 쉼을 얻기 위해 예수께로 나온 이들에게 ‘24시간 예수 바라보기’라는 또 다른 멍에를 지웠다.

무엇보다 예수를 소망스럽고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대상이 아닌 무거운 과제물로 만들므로, 복음 신앙에 손상을 입힌 것은 가장 심각한 폐해이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보다는 주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심에 의존된다. 나의 시선은 주님을 놓칠 수 있어도, 주님의 시선은 결코 나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전은 내가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데 있지 않고, 내가 나를 지킬 수 없는 동안에도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않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시 121:3)’께 의존돼 있다.

당신의 신앙은 ‘당신이 예수를 바라보는데 세워졌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당신을 바라보는 데 세워졌습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