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 현장. ⓒ김신의 기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이정익 목사, 이하 한복협)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절과 한국교회의 과제’라는 주제로 8일 상동교회에서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개최했다.

먼저 기도회에서는 최이우 목사(한복협 부회장, 종교교회 담임)의 사회 아래, 유관지 목사가 ‘하나가 되어(요 17:21~23)’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하나 된 3.1운동

유 목사는 “3.1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중 특히 감동적인 것은 모두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라며 “한국교회가 이 민족을 하나로 만들어야 하고, 복음을 듣지 못해 구원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동족에게 복음을 힘써 전해 통일 선교에 힘써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회복해야 할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또 상동교회에 대해 “한국교회 민족운동의 성지”라며 “이 자리에 이준 열사, 김구 선생, 그 밖의 많은 분들의 발자취가 스며 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중 네 분이 상동교회 출신”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기도회에서 서철 목사(상동감리교회 담임)와 김중석 목사(한복협 회계, 사랑교회 원로, 북세연 사무총장)가 각각 ‘한국교회의 3.1운동 정신의 계승’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기도를 인도하고 이에 따라 참석자들이 합심으로 통성기도했다.

발표회에서는 지형은 목사(한복협 교회갱신위원장, 성락성결교회 담임)의 사회 아래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신학전문대학원 교회사)와 민경배 교수(백석대학교 석좌)가 각각 ‘3.1운동을 주도한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과 ‘3.1운동정신이 오늘 한국교회와 사회에 주는 준엄한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박명수 교수는 “3.1운동 당시 기독교의 역할이 과소 평가가 됐다. 그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3.1운동의 실행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준비 과정과 그 이후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연결고리인 임시정부수립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박민수 교수
▲박명수 교수가 ‘한국교회의 3.1운동 정신의 계승’를 제목으로 발표하고 있다. ⓒ김신의 기자
◈3.1운동 준비 과정과 임시정부 수립 당시의 기독교

박 교수는 3.1운동 준비 과정 당시를 언급하며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 사회가 개편되고 있었는데,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보면 국제 정세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며 “독립을 위해 처음엔 러시아를 의지하다 이후 중국에 의지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했고 미국이 세계 중심국가로 등장하게 됐다.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전쟁 없는 세계가 되기 위해선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면 안 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다. 이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이 미국 교포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 교포를 중심으로 한 대한인국민회는 민주주의를 접했고,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임시정부를 만들고자 했다”며 “1918년 대한인국민회에서 민족 대표로 선출된 윌슨의 제자 이승만은 1919년 4월 7일 연합통신 기자에게 새로운 국가는 예수교국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1919년 4월 중순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에서의 결의문에는 기독교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원한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또 박 교수는 “임시정부 유지를 위해 결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상해엔 기독교인 청년들이 가득했다. 신한청년당원들이다. 창립 멤버 여운형, 선우혁은 전도사, 한진교는 회계집사, 김철, 정덕수, 조동호도 모두 기독교인이었다”며 “여운형은 임시정부가 기독교, 민주주의,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덧붙였다.

◈임시 헌장에 드러난 기독교 정신

이어 1919년 4월 11일 만들어진 임시헌장을 살피며 “전문의 제일 첫 번째는 하나님과 인간의 뜻을 하나로 해서 만들어진 나라라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이었고, 헌장 7조에서는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류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라고, 또 선포문에서 우리민족은 하나님이 건설하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고 역설했다.

또 박 교수는 “당시 우리 나라는 ‘왕권 시대’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 선택권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임시정부 헌법은 첫째로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를 표방했다”며 “당시 조선사회는 신분 사회였고, 유럽의 시민사회는 경제능력이 있는 사람이 주권을, 공산주의는 노동자와 농민이 주권을 가졌고, 미국도 아직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정말로 혁명적인 생각이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박 교수는 “삼권분립과 개인의 기본권(즉 신앙, 표현, 소유, 영업의 자유)이 보장된 나라를 표방했다”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을 때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만들어진 임시정부에 기초해서 세워진 국가’라고 말했다. 그 밑바닥엔 기독교가 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는 기도로 시작했고 이윤영 목사가 대표기도를 했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 박사는 ‘하나님과 국민 앞에서 올바로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고 했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탄생했다”며 발표를 마쳤다.

민경배 교수
▲민경배 교수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제목으로 발표하고 있다. ⓒ김신의 기자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전국, 세계적으로 연합한 기독교

이후 민경배 교수는 “3.1운동은 교회 주도의 전 민족 궐기 운동이었다. 특히 교회의 국제적 네트워크로 인해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세계와 결속한 가운데 진행할 수 있었다”고 했다.

민 교수는 “당시 한국교회는 전국의 1%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곳은 기독교뿐이었다. 교계 분담책임제와 교회의 민주주의 대의적 지역대표제로 전국 조직을 하나로 묶는 선교 정책으로 전국적 동력 동원 체제의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총독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시위 참여인원이 200만명, 사상자가 23만 4천명, 피살자가 7천 5백명, 불탄 교회가 47동, 민가가 715채였다. 이때 기소자들의 25%가 기독교인, 입감자의 15%가 기독교인이었다”며 당시 기독교가 중심에 있던 상황은 <군국주의 통제>, <미야꼬신문> 등에 기록된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당시 참가 시위인원은 일제의 기존 자료보다 1.7배 높은 수치로 기록되고 있다”고 했다.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미래의 소망을 전한 기독교

이어 “3.1독립운동은 전국을 넘어 세계 역사의 조류에 올라 선 거대 운동이었다. 한국교회는 그 태생기부터 세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혹독한 시련에도 교회가 미래 희망을 노래하는 민족의 계시록이었다”고 했다. 또 “이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회의 갑작스런 발전과 부흥이었다”며 “기독교 학생 수는 전년 비 90%가 널었고, 교인은 3배가 늘어나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당시 일제는 한국 인종 멸절정책을 위해 주초를 장려했고, 주초세 수입이 전체 조세 수입의 48%까지 육박하던 형편이었다. 총독부는 예산을 투입해 아편을 재배해 팔았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가장 중요하게 개혁을 요구한 것이 도덕적 패악이었다. 국가적 차원의 부패를 고발한 운동이었다”고 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 모인 참석자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김신의 기자
또 민 교수는 “3.1독립운동으로 일제의 잔학 행위는 극에 이르렀고, 한국도 피해를 입었다. 교회는 참상을 당했다. 그런데 한국에 일간지 자체가 없었고, 선교사 주간지에도 일언반구 보도가 없었다. ‘독립’이라는 말을 못 쓰게 하는 상황에서 1919년과 1920년 10월에 소집된 장로교 제8회 및 제9회 총회록과 부록에 실린 노화상황보고서는 ‘조선독립만세사건’에 대한 피해 상황과 통계를 자세하게 쓰고 있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일본 최고의 국수주의자 도꾸도미 소호가 ‘서울 프레스’ 총 감독으로 있으면서 1919년 3월부터 11월까지 수십 편의 논설을 통해 인도주의를 외치고 일경의 만행을 매섭게 고발했다. 또 총독부 고위관리 나까라이 기요시가 ‘독립운동’을 곡해해 공격한 자를 비난하는 글을 내고,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에서도 같은 논조로 글을 냈다”며 “일제 고위층이나 일부 언론이 3.1독립운동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이러한 현상은 비록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희망과 미래를 약속하는 거대한 징표로 빛나고 있다”고 했다.

이후 이정익 목사(한복협 회장, 신촌성결교회 원로, 희망나눔재단 이사장)가 인사하고, 3.1절 100주년을 기념해 원성웅 목사(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감독)의 인도로 삼일절 노래를 제창하고 만세 삼창하는 시간을 가졌다. 축도는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 강변교회 원로)가, 광고는 이옥기 목사(한복협 총무, UBF 대표)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