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다음 날 아침 남궁억은 흰 한복 두루마기를 단정히 차려 입고 학교로 나갔다. 길가와 공원의 나무들이 소슬바람에 낙엽을 한 잎 두 잎 떨구고 있었다. 좀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인력거를 타지 않고, 흰 고무신을 신은 채 뚜벅뚜벅 걸었다. 그는 사람이 끄는 인력거를 절대로 타지 않았다.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사람이 끄는 수레를 탈 수 있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엔 아직 조선인끼리도 신분의 차별이 심하고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심했다. 그래서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여자는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여학교가 세워지긴 했어도, 학생이 얼마 되지 않았다. 여자가 공부하는 것은 마치 암탉이 우는 것처럼 가당찮고 재수없는 노릇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남궁억은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일찌감치 버린 상태였다. 생각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써 낡아빠진 사고방식을 타파하려고 노력했다.

일찍이 그 자신이 주위 사람들의 멸시와 비웃음을 무릅쓰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외국어와 신학문을 배웠던 것이다. 사람은 부자든 가난하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배움을 통해 자기를 계발하여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했기에 그가 설립한 학교에는 어떤 사람이든 뜻만 있다면 와서 마음껏 배울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었다.

공원을 돌아 좀 걸어가자 단아한 학교 건물이 보였다.

남궁억은 좀 비장한 기색을 띤 표정으로 교문을 들어서 운동장을 지나갔다.

눈이 초롱초롱한 소녀들이 낯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허연 수염을 기르고 두루마기 차림에 고무신을 신은 그 남자가 새로 오시는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소녀들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리기도 했다.

“여러분들도 안녕하세요?”

남궁억은 대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교무실에 들러 얘기를 나눈 뒤 교장과 함께 교실로 들어갔다.

“새로 오신 남궁억 선생님이십네다.”

외국인 교장은 억양이 이상스런 조선말로 소개했다. 그런 다음 곧 밖으로 나갔다.

“이쁘고 총명한 여러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남궁억은 학생들에게 인사를 한 뒤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썼다.

“이름은 부모님께서 붙여 주신 것이라 소중하지만, 또한 그 속에 자신의 인격과 개성이 깃들어 있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식 이름을 일본에 빼앗겨 버려서 없습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깊이 생각해 보세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름이 없으면 우리가 누군지 아리송하니까 되찾아야만 해요!”

앞쪽에 앉은 한 소녀가 대답했다.

“그래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서구의 유익한 문물을 진취적으로 받아들이되, 우리 고유의 얼과 미풍양속을 결코 잃지 말아야 합니다.”

“네!”

모두 함께 대답했다.

“지금은 영어 시간이지만 더 중요한 문제라서 먼저 이야기해 보았답니다. 자, 이제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맨 앞줄에 앉았던 소녀가 손을 들더니 말했다.

“선생님,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 안중근 의사께 총살되었잖아요? 그런데 왜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나요?”

남궁억은 목청을 한번 울리고 나서 침착하게 말했다.

“그 후인 1910년 늦은 봄, 일본은 육군대장 데라우치를 통감으로 임명해 조선으로 보냈어요. 그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충실하고도 저돌적인 하수인이었습니다.

데라우치는 친일파의 괴수인 이완용과 함께 모의하여 우리 한반도를 완전히 뺏아 먹을 작전을 짰답니다.

그 자는 일본정부가 만들어 보낸 조약안을 들고 회의장으로 들어가 동의하라고 강요했어요. 수많은 경찰을 거느린 삼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였지요.

그리하여 데라우치는 결국 우리 순종 임금의 허락과 대신들의 동의를 받아냈답니다.

마침내 8월 29일 순종 임금은 ‘일본국 황제에게 대한제국의 모든 통치권을 영구히 양도한다’는 조서를 내려 한일합병 조약의 체결을 공포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우리 대한제국의 국호를 고쳐서 조선이라 부르고, 한반도에 총독부를 설치해 자기들의 식민지로서 완전히 통치하게 된 것이지요.”

남궁억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문질렀다. 그리고 덧붙였다.

“안중근 의사와 같은 한 명의 영웅은 목표의 길잡이가 되어 주지만 영웅 혼자만으로는 큰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백성이 모두 참뜻으로 깨어나 뭉칠 때라야만 악의 나라를 물리치고 찬란한 빛의 나라를 세울 수가 있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주인공이 되어 그런 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질문자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생님, 저도 질문이 있는데요.”

중간쯤 앉은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네, 말해 보세요.”

“저희 집 옆에 일본 사람이 이사와서 살고 있는데요. 그 집 애가 참 예쁘고 착하거든요. 제가 그 애와 동무해서 친하게 지내면 안 되나요? 일본 사람은 모두 나쁘니 미워해야 하나요?”

남궁억 선생은 곧 대답하지 않고 눈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지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윽고 남궁 선생은 기침은 한 후 학생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본인이라고 모두 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착하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하얀 천과 같습니다. 그 하얀 천에 빨간 물을 들이면 빨강 보자기가 되고 검은 물을 들이면 검정 보자기가 되지요.

사람은 순수하게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로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미화시키기 위해 조선인뿐만 아니라 자기네 국민들도 속이고 세뇌시킵니다.

조센징은 개돼지처럼 더럽고 열등한 자들이므로 일본이 지배해서 끌고 가야 한다고 세뇌를 합니다. 일단 하얀 천에 검은 물이 들어 버리면 흰 바탕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잘못된 생각이 나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뇌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죠. 일본놈들뿐만 아니라, 양의 탈을 쓴 이리 같은 친일파들의 감언이설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쁜 정부는 언제나 국민을 속이려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배움을 통해 우리들 자신이 깨어나야 하며, 나아가 이 민족을 깨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알았죠?”

“네.”

학생들은 합창하듯 대답했다. 몇십 분 사이에 눈빛이 더 초롱초롱해진 것만 같았다.

“미움만으로는 미움 그 자체를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미워하면 미운 그것을 닮게 됩니다. 그만큼 그것에 집중을 하게 되어 무의식적으로 닮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내면을 계발하여 아름답게 활짝 꽃피워야만 합니다.”

남궁억 선생은 손녀 같은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항상 높임말을 썼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지켜온 그의 수칙이었다.

교육이란 지위 높은 교사가 낮은 학생들에게 뭘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서로 묻고 배워서 함께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태도는 겉꾸밈이 아니라 그의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웠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학생들은 남궁 선생의 수업 시간에 자신들이 존중받으며, 각자가 모두 중요한 존재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종이 울렸다. 첫 시간이기도 했지만 질문과 대화로 이어지는 수업 방식 때문인지 학생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모두들 흡족한 표정이었으며 개중엔 너무 빨리 끝났다며 아쉬워하는 아이도 있었다.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