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초가을의 높푸른 하늘에서 해맑은 햇살이 내려 비쳤다.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던 더위도 저만큼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극성스럽던 모기떼도 거의 다 사라지고 이따금 힘을 잃은 녀석이 구석진 곳에 엎드려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옛날 사람들은 한여름에 그토록 물어뜯겠는데도 그런 가을모기를 보면 애처롭게 여겨 죽이지 않았다. 그렇게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 땅엔 더 이상 평화가 없었다. 간악한 일본 놈들이 조선 사람들을 모기보다 더 하찮게 여기며 살벌하게 설쳐댔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국 황제로부터 받은 명령에 의하여 식민지의 백성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정책을 폈다.

그들은 일본 본토를 내지, 조선은 외지라고 차별하여 불렀다. ‘조센징’은 신성한 일본인에게 개돼지처럼 취급받아야 하는 식민지의 백성이 되고 말았다.

설령 재능이 있고 힘이 있다고 한들 제 마음껏 펼칠 수도 없었다.

총독부는 한민족의 눈과 귀와 입이 되어 주던 황성신문을 결국 폐간시켜 버렸다.

이제 조센징들은 자기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살아야 했다.

오직 일본의 입장에서 알려주는 엉터리 뉴스를 사실인 양 받아들여야 할 처지였다. 그것은 암흑보다 더 암울한 거짓의 세계였다.

“아, 어쩌면 좋은가!”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며 무엇인가 할 일을 궁리하고 있던 남궁억에겐 또다시 가슴이 멍드는 타격이었다. 그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남궁억뿐만 아니라 모든 애국지사들이 일본의 억압정책에 손발이 묶인 채 이빨을 갈고 깊은 한숨을 쉬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오후에 배화학당(培花學堂)으로부터 남궁억에게 영어 교사로 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배화학당은 1898년에 미국 남감리교의 여선교사인 캠벨이 기독교 복음 전파와 여성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였다. 종로구 내자동의 사직공원 부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남궁억은 별로 오래 생각하지 않고 응낙했다. 교육은 그가 오래 전부터 해온 일이었으며 스스로 필생의 사업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는 이미 33세 때 민영환이 설립한 홍화학교에서 영문법과 우리 역사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양양군수로 재직할 때는 직접 현산학교를 설립해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몇 년 전에는 관동학회를 설립해 청년 교육사업을 벌이고 「교육월보」를 발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것은 학교에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통학교 과정을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통신강의록과 같은 잡지였다. 그 내용은 동국역사, 대한지리, 산술, 물리학 등이었다.

그만큼 그는 교육의 힘을 믿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를 빼앗겨 민족의 얼과 마음마저 짓밟히고 있지 않은가. 하루 빨리 민족정신을 지닌 인재를 길러내 나라를 되찾을 궁리를 해야만 했다.

배화학당에 부임하기 전부터 남궁억은 밤이 늦도록 등불을 밝혀 놓고 미리 수업 준비를 했다. 배화학당은 학생이 모두 여자이기 때문에 그 특성에 맞게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교사로서 자신이 추진해 나갈 교육 목표를 정했다.

첫째, 자라나는 젊은 세대를 올바르게 길러야 나라의 미래가 있다. 특히 여성 교육이 제대로 되어야만 현모양처로서 가정과 사회를 밝게 한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그로 인하여 다음으로 이어지는 미래 교육에 기대를 걸 수가 있다.

둘째, 우리말과 역사를 올바로 가르쳐야만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자주 독립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역사는 과거의 일만이 아니고,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는 거울이다. 오늘과 내일의 삶에 유익한 역사교육을 한다. 우리말에는 우리 민족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을 늘 잊지 않도록 한다.

셋째, 지식 위주의 교육보다는 참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인성을 교육한다.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실천적으로 가르쳐서 자기 힘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갈 만한 힘을 길러 준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