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사람들이 서로가 소통하는 과정에서 인간관계가 이뤄진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소통에는 서로의 언행에 따라 받아들여지거나 안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서로의 언행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고 이해를 도울 때, 소통의 일치와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의 다름 앞에 자기 고집과 아집으로 일관하다면, 서로에게는 상처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인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사람으로서 영원함을 갈망하고 있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동등하게 여기려 하십니다.

아담과 이브의 탐욕으로 인한 원죄로 죄와 죽음에 묶여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다시 하나님과 일치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말씀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고 그 사랑을 우리 안에서 드러내시려 목숨을 바쳐 우리의 생명이 되셨던 주님이십니다.

서로 간에 소통이 부재중일 때는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감정이 앞서고, 상대를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참으로 난감합니다.

소통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주장과 내 뜻만 앞세우다 보면,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이 어떻게 해서 향기로 뿜어지는지, 자신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알아들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이해 방식을 살펴, 사랑 안에서 나의 이해 방식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는지 늘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통이라는 목적을 위해, 서로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소통은 어떤 방식이나 선택을 통하여 한 마음으로 모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믿음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어떤 직업이 더 윤리적인지 또는 반대로 비윤리적인지를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좋은 일도 그것을 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나쁜 일로 바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문직이라고 일컬어지는 직업들에는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자격이 있고,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자격에는 그에 따르는 특별한 권한이 주어집니다.

그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가진 직업의 가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거짓, 진실
▲ⓒPixabay 제공
특히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간들의 언어가 서로 달라졌으므로 많은 소통의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가 서로 달라도 인간들은 몸짓 발짓으로, 그리고 얼굴에서 나타나는 모습으로 소통하여 지금까지 잘 적응하며 소통하고 있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외국어를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다른 나라에 가서 몸짓, 발짓을 시작으로 그 나라 언어를 배웠을 것입니다.

가까운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양반을 제외한 백성들은 글을 몰라도, 서로 소통하며 함께 사회생활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께서 순교하시면서 던진 한문 성경책 한 권을 통해, 많은 조선 백성들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사건들이 벌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 성경을 통해 지금까지 신앙이 지켜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대개 자신을 너무 앞세웁니다. 자신 외에는 이해를 도울 생각이 없습니다. 소통이 참으로 어려운 분들이 신앙인들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항상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 한 마디만 하시면 다 이뤄주실텐데, 주님은 늘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이미 아시고 도우려 하십니다. 우리는 그냥 주님께 맡기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의심하며, 고집과 탐심으로 소통을 하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때는 분명 문제가 발생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원활한 소통을 이루어내는데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 앞에는 어떠한 고집이나 아집, 그리고 교만은 통하지 않습니다.

나를 먼저 내려놓을 때, 매끄럽게 일이 풀리지 않았던 것들이 소통의 힘을 통해 윤활유 같이 원활하게 이뤄짐을, 신앙인들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 할 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에게 돌로 치라’ 하는 최고의 소통의 말씀을 내놓으셨을 때, 주님을 시험하려 했던 그들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며 달아났습니다. 여인도 살고 율법주의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습니다.

거짓은 신실한 소통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이해를 도울 때, 멋진 소통과 더불어 좋은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잔칫집의 어려움을 소통을 통하여 해결했습니다. 의심하고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 했더라면, 가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을 차마 거절 할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아직 내 때가 아니다’고 하셨지만, 어머니와 의 신실한 소통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시작이 됐음을 깨달았습니다.

물을 길러 항아리에 가득 채우라는 주님의 말씀에 하인들은 ‘예’하며 순종했습니다. 그 소통 속에 기적은 빛을 발했고, 예수님 공생애 최초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소통은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서로 합심하여 한 마음이 될 때, 최고의 능력이 발휘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먼저 소통하는 열린 마음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