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오후에 그는 집을 나와 남산으로 올라갔다.

늦여름의 매미들이 처량한 가락으로 마지막 울음을 울고 있었다. 몇 해 동안이나 어두운 땅속에서 빛을 그리며 살다가 날개를 달고 나와서는 겨우 한 달쯤 저렇게 울어대다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고 마는 매미였다.

매미도 자기가 짧은 기간이나마 사는 이 나라를 빼앗긴 것이 원통한지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남궁억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괴로울 때나 혹은 뭔가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만 할 때는 남산을 찾아 오르곤 했다. 산은 세상 속에서 나쁜 일이 있더라도 그것에 굴복하지 말고 꿋꿋한 정신으로 일어서서 옳게 살아 나가라는 메시지와 기운을 주었다.

남산 꼭대기에서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옛날처럼 활기가 없고, 기분이 그래서 그런지 도시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느껴졌다. 흰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마치 유령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 경복궁과 경운궁도 보였다. 6백 년 왕조의 희비애락이 서려 있는 곳, 며칠 전에 한일병합 조약이 강압에 의해 이뤄진 곳. 그 쓸쓸한 황성의 지붕마루에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조선 침탈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1905년 11월 9일 특명전권대사로서 한국으로 부임했었다.

그리고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뒤에서 조종하여 대한제국을 허수아비 꼴로 만들려는 흉계를 꾸몄다. 그런 다음 일본 군사를 이끌고 경운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고종 임금과 국무대신들을 총칼로 위협해 을사늑약에 서명하라고 강요했다. 고종은 끝까지 거부했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일단 외부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가져와 조약문서에 찍게끔 했다.

회의장에서 몇몇 대신은 그 불평등한 조약에 반대했지만,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은 고종 임금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조약 체결에 찬성했다. 역사는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부른다.

이토 히로부미는 8명의 대신 가운데 5명이 찬성하였으므로 조약이 가결되었다고 뻔뻔스레 선언하였다. 이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국가이지만 통치권을 모두 빼앗겨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늦가을의 차가운 비가 세찬 바람과 함께 을씨년스럽게 부슬부슬 내렸다. 나라 잃은 백성의 눈물과도 같았다. 그와 달리 을사오적들은 일본으로부터 백작의 작위와 많은 돈을 받고 희희낙락했다.

고종은 “짐을 협박하여 체결한 조약은 엉터리다!”라고 선언하고, 해외에 특사를 보내 알리도록 했다. 그러자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엉터리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과 항일투쟁이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다.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일본 경찰을 공격했다. 일본 군대와 경찰은 총칼을 앞세우곤 마구 쏘고 찔렀다.

남궁억이 관여하던 황성신문은 일본의 잔인함을 고발하고 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장지연의 논설 ‘오늘 목놓아 통곡한다’를 실었다가 무기정간을 당하고 말았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사내 대장부의 길을 걷는 것일까?”

남궁억은 큰 소나무에 기대 선 채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죽는 사람도 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죽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내가 죽어 이 나라가 되살아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러겠다. 하지만 죽는다 해도 살인강도 같은 일본 놈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히죽 웃고 말겠지.

아, 물론 목숨을 끊어 버리면 이토록 심한 울분과 괴로움도 끝이 나겠지. 하지만 내 한 몸의 고통을 잊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는 건 비겁한 짓이다. 설령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살아서 이 나라를 되찾는 방도를 모색하는 게 사내 장부가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소나무를 쳐다보면서 마치 조언을 구하기라도 하듯이 물었다.

“외부의 상황이 나쁘다고 해서 그 나쁜 상황에 그냥 억눌려 살아서는 안 된다. 그건 소나 돼지 같은 짐승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짐승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 삶은 인간의 치욕이다!

상황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내부의 깨달음,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힘을 모아 악한 환경을 깨부수고 멋진 세상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소나무에 이마를 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소나무 속에서 지혜의 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푸른 솔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솔향을 뿌렸다.

암흑의 시대에 한국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죽은 듯이 조용히 시키는 대로 살거나,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총칼에 맞서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하거나, 또는 먼 외국으로 망명하여 내일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 등이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차마 원통해 자살하거나 중국의 상하이, 간도, 미국 등지로 떠났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그 성향을 몇 종류로 분류했다.

-이제 나라의 독립이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단념한 채 고분고분 살아가는 자들.
-일본인에 빌붙어서 동족을 괴롭히며 살아가는 친일파.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못하므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화파.
-나라의 멸망을 개탄하며 입으로만 뇌까리는 양반 유생.
-지하로 숨어들거나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시도하는 자들.

그리고 우매한 조선 백성들은 나라가 멸망하든 말든 당장 먹고 살 일을 걱정한다고 파악했다.

남궁억은 산 아래의 시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무엇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끝끝내 해야만 할 일을….”

결국 남궁억은 이 땅에 남아서 우리 민족 내부의 변화를 꾀하고 힘을 길러 나라를 되찾는 길을 선택했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고 참된 실력을 갖출 때 그것이 한데 모여 거대한 동력이 되어 악질 강도를 몰아내고 내 집 내 강토를 되찾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머나먼 국외로 나가 찬 이슬을 맞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누군가는 이 땅에 남아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그는 자문자답하듯 말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서산 마루에 걸려 있던 석양의 마지막 빛이 반짝였다. 그 빛이 절망일지 희망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험악한 시대가 왔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시나브로 내리기 시작했다. 풀숲 어디선가 풀벌레가 아픈 속마음을 긁듯 울어댔다.

그는 천천히 산길을 걸어 내려갔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